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1)
2-111. 바람이 지나간 자리(2)
#111
이후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먼저 일루안과 독살당한 위병조장 아약스의 장례식이 정식으로 거행되었다. 죽기 전에 화려하게 저질러 준 일루안이었지만, 분노한 조문객들이 관짝에 오줌을 갈기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칼루시아 양자들의 추모는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큼 정중하고 기품이 넘쳤다.
“일루안···쯧, 가엾은지고.”
“명복을 빕니다. 내세에는 그토록 원하던 별에 닿으시기를.”
위병조장의 장례식은 보다 감정적이었다. 투구를 벗은 위병들은 한 명씩 대장의 관 앞에 꽃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근무를 서지 못하게 된 대장을 그리워했다.
“크흑, 아약스 대장님. 잊지 않겠습니다.”
“대장.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십쇼. 여동생 소개해 달라고 그렇게 귀찮게 굴었으면서, 기껏 소개해 줄까 하는 시점에 이게 무슨······에잇, 빌어먹을!!”
위병 한 명이 투구를 바닥에 내던졌다. 장례식장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가 팔로 눈을 가린 채 퇴장할 때까지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바로 인덕이라는 거겠지.
“젠장,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로돌란의 악마들이 그 망할 년의 사지를 찢어발겼으면.”
“진짜로 찢고 있다던데요. 제가 얼핏 들었어요.”
리즈는 일루안이 죽은 날 저녁에 비명의 요새로 끌려갔다.
아드리안이 말하기를, 이미 그녀의 왼쪽 다리와 양 눈은 신체에서 분리되었다고 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 내고 있다는데, 네뷸라 클라지에의 정보는 이미 내가 모두에게 말해 줬기 때문에 리즈의 정보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아드리안의 간곡한 부탁 덕이었다.
“절대 쉽게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육신이 너덜너덜해져서 더는 고통을 창출해 낼 부위가 없어지면 그때 심문관들이 진실을 말해 주겠지요. 네가 말한 정보는 진즉에 알고 있는 거였다고. 너는 조금의 가치도 없는, 그저 심심풀이용이었을 뿐이라고···그 때의 표정이 볼만하겠군요.”
“끝내주네요.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구만.”
“아칼루시아를 기만한 걸로 모자라 제 수양딸과 남편을 죽인 자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고개를 들고 살 수 있죠.”
아드리안이 냉소를 흘렸다. 유빙이 떠다니는 망령의 바다도 저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머리 뒤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맑고 푸르기만 했지만, 탈출을 차단하는 역장은 여전히 아칼루시아 영지를 감싸고 있었다.
“사흘이라 하셨죠?”
“네? 아아, 맞아요. 배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그 정도 기간은 걸릴 것 같아서요.”
“사람을 한 곳에 모아만 주시면 제가 하루만에 끝내 드릴게요.”
“···하루요?”
“네. 어차피 물건을 받는데는 며칠이 걸리신다 하셨고···저는 광신도 새끼들을 구별해낼 수 있거든요. 리즈 같은 특이 케이스만 제외하면.”
나는 검지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세례를 받은 신도라면 아무리 미세해도 구분해낼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리즈 그 계집애가 이상한 거였다. 미친년이 그 유능한 실력을 좋은 곳에 좀 쓸 것이지.
아드리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주신다면야 너무 고맙죠.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괘념치 마세요. 그 뭐냐, 저항하면 그냥 팔다리 하나 정도는 썰어도 괜찮죠?”
“첩자인게 확실하면 즉결 처분하셔도 돼요. 아예 참수용 검을 한 자루 드릴까요?”
“적극적이기도 해라.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큭큭거렸다. 완전히 밀폐된 장소였으니 폭력을 행사할 권리만 준다면 이보다 더 쉬운 일도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따사로운 초여름 볕을 받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내 옆에는 아셀이, 그녀의 옆에는 에르제베트가 붙어 있었다.
“아셀. 귀족이 된 기분이 어때?”
“소, 솔직히 잘 체감이 안 돼···내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도 되는 걸까?”
아셀은 자신의 팔다리를 의수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여 보였다. 그는 이제 꼬질꼬질한 로브가 아닌 아칼루시아의 문양이 새겨진 근사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코웃음쳤다.
“흥, 당연한 소리를. 단정한 옷차림은 아칼루시아의 기본 소양이라구요.”
“에리. 머리조차 제대로 안 감던게 당장 엊그제잖니. 내가 그때 말을 못해서 그렇지 몇 달간 얼마나 보기 힘들었는지 아니? 밥도 제대로 안 먹지, 기껏 먹었나 싶어서 접시를 보면 좋아하는 반찬만 홀랑 빼 먹었지, 뭘 물어봐도 대답도 제대로 안 하지···맞아. 로난 님, 제가 예전에 에리의 침대 밑에서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세상에 요즘 애들은 정서발달이 왜 이렇게 빠른지···”
“어, 엄마! 아니, 가주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쏜살같이 팔을 뻗은 그녀가 아드리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드리안은 딸의 손바닥에 얼굴을 눌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명치에 염력 펀치를 꽂을 때는 정말 살벌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그냥 평범한 엄마와 딸이었다.
옥신각신하는 모녀를 쳐다보던 내가 실소했다.
“가족이군.”
“응. 행복해 보여.”
“너도 슬쩍 끼어 봐. ‘엄마!’ 라고 외치면서. 의외로 먹힐지도.”
“그, 그건 좀···.”
아셀이 기겁했다. 당연히 농담으로 한 소리였다. 화목한 모녀를 보고 있자니 왜 대장군님이 세 번째 삶에도 아칼루시아를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저택 쪽으로 계속 걸었다. 단지 햇살을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첩자를 색출하기 전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은 저택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군.’
우리는 머지않아 목적지인 저택 뒤편의 언덕에 도착했다. 정원은 물론 저 멀리 타이멘 강의 본류도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언덕 위에는 장작을 쌓아 만든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그 아이도 아칼루시아를 충분히 눈에 담았겠지요.”
아드리안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목재 관이 제단 꼭대기에 놓여 있었다. 관의 주인은 비로소 안식을 찾은 나의 은인이었다. 이미 장례를 치렀던 아데샨의 장례식은, 일루안이나 아약스와 달리 따로 조용히 거행되었다.
“그럼, 바로 할까요.”
내 제안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입회인은 나와 아드리안, 아셀과 에르제베트 이렇게 네 명 뿐이었다. 죽은 그녀는 아데샨 데 아칼루시아였으니 아칼루시아의 규칙대로 재가 되어야 마땅했다. 나는 발치에서 적당해 보이는 크기의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이거 좋네.”
쥐는 맛이 괜찮았다. 에르제베트가 불을 붙여 주자 작대기는 훌륭한 횃불이 되었다.
내 손 바로 아래 부분을 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같이 해요.”
“물론이지.”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우리와 아데샨의 관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미안해요···정말로 미안해요.”
“흐윽, 흑.”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아셀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웃기는 놈이다.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주제에 왜 울고 앉았는지.
“후우.”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일부러 아데샨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관도 나 말고 에르제베트가 닫았다. 지금 봤다가는 여러모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함께 횃불을 쥐고 있던 에르제베트가 내게 눈짓했다.
“로난 님.”
“그래.”
솔직히 얘가 가장 많이 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런지 오히려 우리 중에 가장 덤덤했다. 나와 에르제베트는 횃불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물러섰다. 빠르게 번진 불길이 순식간에 관을 집어삼켰다.
“잘 가요, 언니.”
에르제베트가 작별인사를 했다. 불길에 휩싸인 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검을 태운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안 우네.”
“더 나올 눈물도 없는걸요.”
“대견하군. 그 의젓함을 높게 사서 멋진 이야기를 해 주지.”
“네?”
에르제베트가 갸웃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대장군님의 영혼이 내가 온 세상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모든 염원을 이루고 성불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천국으로 갔다고. 거기서도 너를 많이 좋아했다고.
“···아.”
에르제베트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담담하던 표정에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입술은 터지기 직전의 제방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십 초를 예상했지만, 제방은 칠 초만에 무너져 내렸다.
고개를 위로 젖힌 그녀가 아이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이앙! 으극, 으아아아앙!”
얼굴도 가리지 않는 원초적인 울음이었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는 두 사람이 원없이 울게 내버려 두었다. 웃음과 마찬가지로, 눈물 역시 흘릴 때는 흘려 줘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이다.
“푹 쉬어요.”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장군님과는 진정한 의미의 이별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평행세계였으니 이제 돌아가기 전까지 내가 아데샨의 주검을 볼 일은 없을 터였다. 우리는 잔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언덕에 서 있었다.
“푹 쉬어요···.”
젖혀진 앞머리가 정수리 위에서 살랑거렸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경쾌했다. 고고하게 흐르는 타이멘 강의 물비늘은 찬란한 군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드리안 누님이 사람을 보낸 것은 아데샨의 화장식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로난 님. 물건이 완성됐어요.”
“엉? 벌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흰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에르제베트가 문간에 비스듬이 기댄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왜 메이드 말고 얘가 직접 온 거지?
“네. 정원의 호수로 가면 돼요. 바로 출발하실 수 있죠?”
“그래. 그래야지.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데.”
걱정스레 물었다. 에르제베트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화장으로 가리려 한 흔적이 보였지만, 눈 밑에 진 음영과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은 끝내 숨기지 못한 채였다.
다시 우울증이 재발하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뭐라도 물어보기도 전이었다. 의사를 확인한 에르제베트가 훽 몸을 돌렸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가시죠.”
“얌마, 같이 가.”
쌀쌀맞아 보일 정도로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빠른걸음으로 그녀의 옆에 따라 붙었다.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평소보다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곧 죽어도 아가씨 티를 내던 녀석인데, 이건 꼭 사무직 노동자나 연구원이 입을 법한 차림새였다.
“여기는 몇 번을 봐도 끝내주는군.”
저택을 나서자 탁 트인 정원이 펼쳐졌다. 아드리안의 역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며칠 된 일이기는 하다. 나는 약속대로 아칼루시아에 숨어든 첩자를 하루만에 추려 내는데 성공했다.
‘잡놈들 같으니.’
모두 서른일곱 명이었다. 일루안과 리즈가 좋은 예시가 됐는지 저항하는 놈은 거의 없었다.
두 명의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는데, 남자 쪽은 내가 다리를 잘라서 살았지만, 여자 쪽은 전류가 흐르는 역장과 충돌하면서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쯤 서른 다섯 명 모두 로돌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호수가 나타났다.
대련장과 마찬가지로 영지 내의 호수라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아름다웠다. 그나저나 왜 호수로 오라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어차피 혈계침 비슷한 마도구일 텐데, 보통은 가주의 방에서 건네주지 않으려나?
“응. 저기 있네요.”
그때, 두리번거리던 에르제베트가 손가락을 뻗었다. 하얗고 긴 검지는 호수 정중앙에 머물러 있었다. 뭔가 싶어서 돌아본 내 미간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염병. 저게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