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2)
2-112. 등대
#112
“저게 뭐야?”
호수 한복판에 작은 탑이 솟아 있었다. 분명히 엊그제 까지만 해도 없던 구조물이었다. 등대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는데, 꼭대기 부근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에르제베트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으히히···저와 엄마가 만든 일생일대의 역작이죠. 들어가 보면 깜짝 놀라실 걸요?”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엄마라는 호칭을 정정할 생각도 못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배도 없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려던 차였다.
“인비저블 핸드.”
“아하.”
에르제베트가 주문을 영창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마법사는 참 편리한 직업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와 그녀의 몸을 공중에 띄웠다.
우리는 푸른 거울 처럼 변한 호수의 상공을 천천히 가로질러 탑으로 이동했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물고기가 이따끔씩 튀어오를 때마다 넓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죄송했어요.”
문득,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엉?”
“응접실에서 가주님과 대화하실 때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로난 님께는 사죄를 안 드렸더라고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녀는 시선을 내리깐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기나긴 사과를 마친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여러모로 죄송하고 감사드려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젠장,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
헛웃음이 나왔다. 지난 며칠간 벌어졌던 일에 대한 사과와 감사 인사였다.
이걸 그냥 안 넘어가고 굳이 챙기다니, 잘 나가는 귀족 중에 얘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신경 꺼. 우리는 같은 사람을 좋아했던 사이잖아.”
“같은 사람······응, 그렇죠.”
에르제베트가 설핏 웃었다. 입술을 질겅이던 그녀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로 아데샨이 있는 푸른 하늘을.
“그 뿐만이 아니야. 나는 너를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아무래도 취향이 비슷한 것 같거든.”
“네?”
“정말 의도치 않게 네 컬렉션을 봐 버렸지 뭐냐. 아마도 가주님이 폐지로 버리려고 묶어 두신 것 같았는데···워후, 그냥 죽여주던데.”
나는 양 손으로 엄지를 쳐들었다. 내가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폐지 뭉치는 아드리안이 에르제베트의 침대 밑에서 찾았다는 불온서적이 분명했다.
디디칸이 카메라를 발명하기 전이라 죄다 그림이나 만화였는데, 인간의 상상력은 한없이 천박해질 수 있다는 증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에르제베트가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하얀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몇 개는 감동적인 수준이었어. 모델이 죄다 검은 머리카락인게 인상적이더라고. 역시 대가문의 적통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특히 군복에 가터벨트는 정말 고귀하다고밖에···”
“이, 잊어요! 당장 잊어버리지 못해!”
“잊을 수 없는 그림만 모아 놓고 잊으라 한들 내 어떻게 잊으리오?”
“캬아아악!”
에르제베트가 마녀처럼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가볍게 어깨만 비틀면서 공격을 피했다. 힘이 빠진 에르제베트가 헉헉거릴 즈음이었다.
“후후, 보기 좋네요. 그새 사이가 좋아지신 건가요?”
익숙한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려왔다.
가주 아드리안이 탑의 입구에서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나와 에르제베트는 일시 휴전을 맺고 착지했다. 나와 마주선 아드리안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웃음쳤다.
“이틀만에 뵙는군요 로난 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도 반가워요. 이게 다 뭐에요?”
“후후, 아칼루시아 마도학의 집약체죠. 들어가실까요?”
아드리안이 탑의 문을 열었다. 사람 한 명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단촐한 외문이었다. 간만에 보는 그녀는 에르제베트와 마찬가지로 셔츠에 긴 바지 차림이었다.
‘진짜 등대인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나선계단을 끝까지 오르니 아무것도 없고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이 나왔다. 돔 구조의 천장은 전체가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법진으로 추정되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뭐지 시발.’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시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의 저열한 두뇌로는 갑자기 에리가 각목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쳐서 기절시킨 뒤, 저 의자에 묶고 손톱을 하나씩 뽑는 전개만 떠오를 뿐이었다. 아데샨 언니와 약혼자라면 그렇고 그런 짓도 이미 했냐고 추궁하면서.
잡념에 빠져 있던 와중이었다.
“로난 님. 저희가 준비한 선물은 두 개입니다.”
아드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아주아주 비싸 보이는 목재함이 들려 있었다.
“두 개나 주시게요?”
“그렇습니다. 아칼루시아의 어둠을 걷어내 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첫 번째로 드릴 선물은 이 마나 추적자입니다.”
함의 뚜껑이 열렸다. 실크 깔개 위에 체리만 한 크기의 유리구슬이 놓여 있었다. 심부에는 뾰족한 바늘 하나가 떠 있었는데,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나 추적자요?”
“네. 혈계침과 동일한 원리지만 피를 뽑아내지 않아도 되서 훨씬 간단하고 빠르게 대상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입체적인 형태라 상공이나 지하의 적도 찾기 용이하고요. 추격하고자 하는 대상의 마나가 떠 다니는 곳에서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마나를 채집하고 가동합니다.”
“좋은데? 잘 쓸게요.”
나는 냉큼 마나 추적자(누가 생각한 이름인지)를 챙겼다. 확실히 유용한 도구였다. 전례 없는 강적인 아카샤를 상대로는 피를 얻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으니까. 귀찮은 절차 없이 버튼만 누르면 작동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요. 사실 이걸로도 충분한데, 두 번째는 뭐에요?”
“이 등대입니다. 저희 모녀가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한 끝에 만들어진 물건이지요. 탐색과 추척에 관련된 마도구 수십 개를 분해하고 재조립한 끝에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드리안이 벽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에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그녀도 에르제베트 못지 않게 피곤해 보였다. 설마 진짜로 등대였다니,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건가?
주변을 훑어보던 내가 눈썹을 으쓱였다.
“어음, 일단 고마워요. 그런데 뭘 어떻게 쓰는건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후후···최고의 설명은 실행이니 바로 가동해 보도록 하죠. 이 의자에 앉아 보시겠어요?”
“그러죠.”
나는 그렇게 했다. 다행히도 각목이 뒤통수를 때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팔걸이에 양 팔을 걸치고 등을 기대는 순간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휘도는 감각과 함께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어서 반투명한 눈앞에 유리창이 떠올랐다.
“썅, 뭐야?!”
너무 놀라서 욕이 나왔다. 유리창은 둥실둥실 떠 있었다. 뭔가 싶어서 팔을 뻗었지만 내 손은 창을 그대로 통과하며 허공을 휘적거릴 뿐이었다. 참 오랜만에 쓰는 표현인데, 유령이 젖꼭지를 비트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정하세요 로난 님. 집중을 돕기 위해 자동으로 암전 상태가 조성된 것 뿐이니까요. 우리는 모두 기존 위치에 서 있습니다.”
“제 앞에 유령 창문이 떠 있어요.”
“그건 염사를 위한 화면입니다. 지금부터 로난 님은 극도로 집중해주셔야 합니다. 등대가 사고를 보조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심상을 떠올려야 하는 건 로난 님 본인이니까요.”
“염사? 심상?”
“네. 저희는 어떻게 하면 위치도 모르고 물질적인 단서도 없는 적을 추격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사흘을 지샌 끝에 우리 에리가 답을 찾아냈죠. 로난 님이 추적하고자 하는 대상을 집중해서 떠올리시면, 그 대상 주변의 풍경이 앞에 있는 창에 떠오를 겁니다.”
“어, 엄마···!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
모녀가 피곤해 보이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에르제베트의 당혹성과 함께 툭툭 치는 소리가 났다. 쟤는 확실히 잠을 자야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새로운 발명품의 기능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거 죽이는데요. 원리가 뭐에요?”
“사고라는 개념을 마나로 치환해서 방출하는 겁니다. 지붕에 새겨진 마법진이 기억을 담은 마나를 온 세상에 퍼뜨리고, 파장이 일치하는 대상과 닿았을 경우에만 돌아오는 거죠.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아니,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목소리가 들뜬 걸로 봐서, 설명할 기회를 주면 끝도 없을 타입이었다.
“제가 죄송해요. 어차피 들어도 모를 질문을 왜 했는지 원. 바로 하면 될까요?”
“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옆에서 보조하겠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추격 대상을···그 아카샤라는 마법사의 특징과 얽힌 기억을 집중해서 떠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머릿속에 그 자만 남을 때까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카샤의 끔찍한 외모가 어둠 속에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가면, 웨어울프만큼이나 큰 키, 비쩍 마른 팔다리와 악의로 번들거리는 여섯 개의 역안.
‘너는 뭐냐. 아카샤.’
집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 번의 평행세계에 걸친 악연은 잊으려 해도 잊혀지는 게 아니었다. 에르제베트가 몰래 보는 성인 잡지의 누님들처럼.
아카샤의 외모를 확립시킨 나는 이어서 놈과 싸운 기억을 반추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치고 받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맞설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했다. 지난 세상에서의 격돌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바다 위에서 폭발하는 세니엘. 손가락질 한 번에 구덩이로 변한 산. 폐허가 된 창백한 성.
놈이 만들어낸 무저갱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추락할 뿐이었다.
어둠을 가르며 날아간 검기가 아카샤의 다리와 균열을 자르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눈꺼풀 너머가 밝아졌다. 다급히 눈을 뜬 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입김이 낀 것처럼 부옇던 창문 위로 선명한 풍경이 나타나 있었다.
“이건.”
새하얀 설원 위에 이질적인 구조물이 서 있었다. 직각삼각형을 뒤집어서 박아 놓은 듯한 건물은 고대의 기술로 지어진 것이었다. 패스워드로만 열리는 건물의 입구에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엘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엘시아.”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킨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간부였다. 염사가 됐다는 것은 바로 근처에 아카샤가 있다는 뜻인데,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경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이 시점이라면 아직 살아 있을 터였다.
저번 생에는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이.
“이런 시발.”
나는 불에 데인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단번에 주위가 밝아지며 에르제베트와 아드리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리돔에 새겨진 마법진은 휘황찬란한 색채로 점멸하는 중이었다.
“로, 로난 님?”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두 여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염사를 마쳐서인지, 의자에서 일어났는데도 풍경을 담은 창문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참았던 숨을 뱉어내듯 중얼거렸다.
“···아버지.”
“네?”
“제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