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3)
2-113 아버지의 이름으로(1)
#113
“지, 진짜 가는 거야 로난?”
“가야지. 그럼.”
“그런···아직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아셀이 울먹거렸다. 단정하게 입은 아칼루시아의 제복이 썩 잘 어울렸다. 나는 아데샨의 화장식이 거행된 언덕 위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될 놈이 된 건데 뭐가 고마워. 이제 한스 같은 놈하고 어울리지 말고.”
“응. 절대 안 어울릴게.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건방져지면 또 곤란해. 신발이 더러워졌으니 지나가는 평민 아가씨에게 핥아서 청소하라 시킨다거나, 재능도 없는 천치가 어디 마법을 배우냐면서 얼굴에 침을 뱉는다거나···”
“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닷새 전까지만 해도 평민이었는걸!”
“농담이야 등신아.”
아셀이 다급하게 손사래쳤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성품이 뿌리부터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내년에 필레온 입학 시험도 준비 잘 하고.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 하실 거다.”
“······응.”
아셀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끄덕거렸다. 눈에서 반짝거리는 액체는 못 본 척하고 시선을 옮겼다. 아드리안과 에르제베트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떠나기 전에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스크롤을 찢는 순간 연속으로 공간 이동 마법이 발동할 거에요. 로난 님의 목적지를 감안했을 때 10번에서 13번 정도겠군요.”
그녀의 검지가 내 손에 쥐어진 스크롤을 가리켰다. 흑단처럼 새카만 두루마리에는 좌표를 지정하면 최대 스무 번까지 공간 이동을 사용해서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잘만 하면 대륙도 건너갈 수 있는 최고급품이었는데, 무서워서 가격은 물어 보지 않았다.
“공간 이동 마법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네. 열 번이면 사흘은 굶어야겠네요. 젠장, 벌써부터 니글거리네.”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마음같아서는 비공정이나 그리폰을 타고 싶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치게 소모되었다.
아카샤가 왜 거기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놈의 목적이 아버지나 엘시아를 제거하는 거라면 절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스크롤의 양 끝을 움켜쥔 채 말했다.
“아. 부탁 하나만 할게요.”
“무슨 부탁인가요?”
“사람 한 명만 찾아 주세요. 아시는 군 관계자한테 제국군 징벌 4연대의 로난 일병을 찾고 있다 말하면 알아먹을 거에요.”
시간이 꽤 지난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일병이 아니라 상병이던가?
어쨌든 별 일이 없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격 더럽고 사람 잘 죽이는 걸로 정평이 나 있던 시기니까.
잠시 벙쪄 있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 하셨죠. 그렇네요. 당연히 이쪽 세상에도 로난 님이 계시겠군요.”
“저를 보고 젠틀한 신사를 기대하면 곤란해요. 사람 말 하는 짐승이나 다름 없는 놈일 테니까. 만약 가능하면 아칼루시아로 데려와서 붙잡아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꼭 호위랑 같이 가시고···저항이 극심하면 이 쪽지를 전해 주세요.”
나는 미리 적어둔 쪽지를 내밀었다. 접혀 있지 않아서 내용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눈매가 좁혀졌다.
“사실은 누나가 좋아. 흑발, 집착이 있는 타입, 크면 클 수록 좋음(중요)······이게 무슨 뜻이죠?”
“저만 아는 암호 같은 거에요. 아마 쪽지를 보는 순간 바락바락 성을 내면서 이걸 누가 적었냐고 물어볼 테니까, 그걸 빌미로 아칼루시아에 데려와 주세요.”
저번 평행세계에서 검증된 절차였다. 이쪽 세상에서도 머리에 화살을 맞지 않은 이상 여자 취향이 바뀔 일은 없을 터였다. 나는 신념이 확고한 남자니까 말이지.
“그럼, 볼 수 있으면 또 봅시다.”
부탁을 마친 내가 스크롤을 찢었다. 강렬한 빛무리가 몸을 휘감았다. 일대의 공간이 뒤틀리더니 복통이 시작됐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아셀이 크게 팔을 휘적였다.
“로난! 나 반드시 훌륭한 마법사가 될게! 반드시!”
“좋은 자세야.”
저항 없이 웃음이 나왔다. 에르제베트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시아갸 암전됐다.
저 멀리서 타이멘 강이 물결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빛무리가 사그라졌다. 언덕에 남은 것은 이제 세 사람 뿐이었다.
로난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가셨네요. 조금 더 머무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요.”
“아쉬워서라도 부탁을 빨리 들어드려야겠어요. 이쪽 세상의 로난 님이라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그녀가 눈웃음쳤다. 로난은 짐승 같은 놈이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분명 근사한 사람일 터였다.
배웅을 마친 세 사람은 저택으로 이동했다. 아셀이 웅크리며 걷는 걸 주시하던 에르제베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셀 님. 똑바로 허리를 피고 걸어 주세요. 눈은 바닥이 아닌 정면을 보고. 이제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되셨으니 그만큼 당당해지셔야죠.”
“히익!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으으···그렇다고 너무 깍듯하게 나오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그냥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었어요······아 참, 그리고 저 알아냈어요.”
“알아내다니요?”
“그때 아셀 님이 말해주셨던 생생한 꿈 있잖아요. 지하실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꿈. 그건 꿈이 아니라, 유체 이탈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유체···이탈?”
아셀이 갸웃거렸다.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네. 영혼이 몸을 떠나서 빠져나오는 현상인데, 뛰어난 마법사들은 가끔씩 겪는 일이에요. 실험체를 마법으로 날려 버릴 수 있던 것도 유체 이탈이라면 설명이 돼요. 아마도 아셀 님의 강력한 마나 감응 능력이 지하실에 반응해서 벌어진 게 아닐까 싶어요. 위기를 미리 감지해낸 거죠.”
“아하···그렇게 된 거였군요.”
“저도 옛날에 몇 번 겪어 봤지만 아셀 님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하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기량의 차이겠죠. 불세출의 재능이 진심으로 부럽네요.”
“저, 저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오히려 에르제베트 님이···”
“아니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버지의 마법을 모조리 그 날 배운 역마법으로 날리신 분이 그런 망발을 하다니. 겸손도 대단해서 입이 안 다물어지네요.”
에르제베트가 아셀을 째려보았다. 예리한 눈초리에 찔린 아셀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에르제베트가 픽 실소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대단한 사람으로 있어 주세요.”
“네?”
“빛나는 재능을 내버려 두는 것은 큰 죄악이에요. 끊임없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올라가세요. 그래야 저도 경쟁할 맛이 나니까. 아시겠어요?”
“······응. 그렇게 할게요.”
아셀이 주억거렸다. 배시시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아드리안은 마법 세계의 미래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그녀의 비서가 다가왔다.
“아, 여기 계셨군요 가주님. 죄송하지만···.”
“네. 밀린 일을 할 시간이죠. 다음 일정은 뭔가요?”
“카라벨 상단과의 회동입니다. 십 분 전부터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고요. 그···사흘간 밤을 지새우신 걸로 아는데, 많이 피곤하시다면 다음으로 미루시는 게···.”
“아니에요. 이미 기다리신 손님들의 시간을 더 빼앗을 수는 없죠.”
아드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라벨 상단은 비교적 최근에 아칼루시아와 거래를 시작한 상단이었다. 규모는 아직 작았지만, 비전과 새로운 상단주의 영업 지침이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도 관계를 지속할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 아셀 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이참에 아칼루시아가 하는 일을 배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제 옆에 서 계시기만 하면 돼요.”
“네, 넵! 동행하겠습니다! 절대로 이상한 짓 하지 않겠습니다!”
“후후.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돼요. 갈까요?”
그들은 쉴 틈도 없이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은 부족하고, 신경도 예민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 일을 미루지 않았기에 아칼루시아는 지금의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마침 잘 됐어요. 새로 취임한 상단주가 아주 유능하거든요. 분명 아셀 님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배울 점도 많을 거에요. 이름이 센이라고 했던가요?”
“그건 가명입니다. 조사 결과 본명은 마르야 센 카라벨이었습니다. 가주님.”
비서가 말했다.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그랬었죠. 마르야 쪽이 훨씬 더 예쁜데 왜 가명을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물론 가명을 썼다는 점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어느새 도착한 세 사람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손님용 소파에는 금발의,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정중한 인사치레가 오갔다.
“아, 안녕하세요.”
“···귀공은?”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아셀이 어색하게 웃었다.
센, 그러니까 마르야 카라벨과 그의 시선은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서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늘이 어두웠다. 사람도 날려 버리는 눈보라가 미친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인기척을 감지한 엘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음?”
분명 뭔가를 느꼈는데 아무도 없었다. 눈 묻은 돌과 얼음 덩어리들만 폭풍 속에서 굴러다닐 뿐이었다. 눈매를 좁힌 그녀가 마나를 끌어모았다.
“거기 누가 있나요?”
말투는 태연하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벨을 배신하고 도망친 그녀에게 삶이란 곧 경계이자 투쟁이었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정찰용 하급 정령 몇 마리를 추가로 소환하려던 차였다.
“무슨···!”
엘시아의 몸이 갑자기 뻣뻣해졌다. 한없이 원초적인 공포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날아드는 살기가 전신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 윽.”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내장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도망자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지만 지금까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벨이 배신하던 순간에도 이 정도의 압박감과 공포를 느끼지는 못했었다.
“하…”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엘시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정체불명의 살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카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원통 속에 갇힌 은인을, 이제는 꺼져 가는 촛불로 전락한 그 사람을.
마침내 목을 막고 있던 응어리가 사라졌다.
“하이란!!”
날카로운 외침이 폭풍 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 머리 위의 상공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빛에 휘감긴 독수리 한 마리가 기하학적인 문양을 찢으며 튀어 나왔다. 최고위 바람 정령인 하이란이었다.
“휘오오오!”
하이란이 날개를 펼쳤다. 거목도 뽑을 기세의 강풍이 와류하며 터져 나왔다. 일대의 눈보라가 폭발하듯 소멸했다. 굴러다니던 돌과 얼음이 동력을 잃고 정지했다.
“하아…하아아…!”
엘시아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반경 1km에 평화가 찾아왔다. 시야가 탁 트였다. 자욱하던 잿빛 구름에도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파란 하늘을 보니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다가오던 살기도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도, 도대체 뭐였지?’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대충 넘길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감지한 존재가 생물이었다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것보다 카인에게 위협적일 터였다. 하이란은 그녀 머리 위를 맴돌면서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엘시아가 본격적인 경계 태세에 돌입하려던 차였다.
“이봐요.”
“히야아아아악!!”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새된 비명을 내지른 엘시아가 뒤를 돌면서 주문을 영창했다. 집도 불태우는 화염구를 쏘아 내는 마법이었다.
“이그니 서클!”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눈앞이 붉어지나 싶더니 화염구가 반으로 갈라졌다. 엘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웬 코트를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칼을 집어넣었다.
“역시 그대로네. 반가워요 엘시아.”
“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제 이름을···!”
“그건 차차 말해줄게요. 일단 아버지한테 가죠.”
로난이 말했다. 그는 엘시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출입구의 수십 자리 패스워드를 단번에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엘시아는 갑자기 튀어나온 사내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갈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뒤늦게 이상한 점을 눈치챈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