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4)
2-114. 아버지의 이름으로(2)
#114
다인하르의 종자 보관소는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발광 다이오드로 이루어진 조명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뒤쪽에서 엘시아가 빽빽거리며 쫓아오고 있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달렸다.
‘분명히 여기서 오른쪽이었지.’
나는 달리는 내내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평행세계에서도 방문했던지라 몸이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칠해진 철문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이번 비밀번호는 좀 헷갈렸다.
마지막 두 개가 뭐더라. 4? 7?
“모르겠다.”
나는 삼 초쯤 고민하다가 칼을 휘둘렀다. 문짝 위로 긴 사선이 그어졌다. 두 동강이 난 철판이 무너져 내리며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각종 기계장치와 전선이 널브러진 방은 거대 괴수의 내장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청색광을 흘리는 원기둥 하나가, 그 한복판에 솟아 있었다.
“······!”
시선은 자연스레 기둥에 고정됐다. 다인하르 시대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생명 유지 장치였다.보존액이 채워진 기둥 안쪽에는 나신의 사내가 둥둥 떠 있었다. 입구를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사내와 마주선 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잇, 씨발.”
당연히 기분이 더러워서 하는 욕은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어내리고는 다시 사내를 올려보았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대롱 수십 개가 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서 시커멓게 썩어든 상처는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는 호로자식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누나와 똑 닮은 은백색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틀림없는 카인, 내 아버지였다.
“잘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네요. 엉?”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사무칠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원래 세상에서 아벨의 일격을 막아내고 전사한 이후 처음이었으니. 심지어 지난 두 번의 평행세계에서도 카인은 이미 죽은 뒤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숨을 들이내쉴 때마다 하얀 수증기가 유리로 된 표면에 맺혔다 사라지고 있었다.
유리관에 손을 올리고 있던 내가 갸웃거렸다.
“이보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잠들어 있는 것은 원래 세상과 동일했지만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 구멍 뚫린 가슴은 고래의 폐처럼 아주 느릿하게 부풀었다 꺼지고 있었다. 원인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악화되고 있군. 영 위독해 보이는데.’
원래부터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었다. 눈앞의 유리관과 무수한 대롱 다발은 죽기 전에 나를 만나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연명 치료에 불과했다. 그를 고칠 수 있는 특효약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그때, 카인의 뒤편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멈춰!”
시선을 내렸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문간을 짚은 채 호흡을 고르는 엘시아가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과 붉어진 얼굴의 대비가 강렬했다.
“허억..! 허어억! 드, 드디어 잡았다···!”
“엘시아.”
“당신은 도대체 뭐죠!? 여긴 왜 찾아온 거고, 비밀번호는 도대체 어떻게···!”
상당히 무리해서 뜀박질한 모양이었다. 반가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버지에게만 집중하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그녀 역시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불현듯, 걸쭉한 액체 한 방울이 내 발등 위로 떨어졌다.
“으르르르···.”
“뭐야?”
쇳물이 끓는 듯한 소리에 위를 올려보았다.
황소도 한 입에 삼킬 것처럼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천장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반투명한 걸 보니 진짜 늑대가 아닌 정령이었다. 녀석은 목덜미의 털을 바짝 곤두세운 채, 먹어도 좋다는 엘시아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또 어느 틈에 소환했대?”
양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실소했다. 희번득거리는 송곳니가 제법 살벌했다.
이제 보니 늑대 정령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카인의 방은 어느새 크고 작은 정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타는 달팽이, 거꾸로 매달린 채 나를 노려보는 박쥐와 바닥을 선회하는 상어 지느러미···눈치채지 못한 새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긴 엘시아가 검지를 뻗었다.
“말 돌리지 마. 대답하기 전에 당장 유리관에서 물러나요.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짓을 한다면···”
“그렇게 합죠.”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양 팔을 들어올린 채 뒤로 세 발자국을 물러났다.
예상 외의 태도에 당황한 엘시아가 그대로 벙쪄 버렸다.
“무슨···.”
“나는 적이 아녜요. 딱히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됐네요.”
“놀래키다니···? 잠깐. 그 살기를 흘린 게 당신이라고요?!”
“일단은요. 많이 놀랬으면 미안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자 보관소 인근에 도착하기 무섭게 살기를 발산했다.
척수반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아카샤를 바로 마주칠까봐 긴장하기도 했었고, 연속적인 공간 이동의 부작용으로 속이 존나게 뒤틀려서 심기가 불편하던 탓도 있었다. 빌어먹을 뱃속의 장기들은 아직도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럭키 스트리퍼가 그리운 날이군.
엘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그런 기운은 아벨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 좆밥보다는 제가 더 세니까.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설마 아벨이 누군지도 아는 건가요?”
“왜 모르겠어요. 제 친형을 찌른 천하의 호로쌍놈새끼잖아요. 그거 말고도 어지간한 건 다 알아요. 후우우···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진짜.”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인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나니 실날같은 마음의 여유라도 챙길 수 있었다.
엘시아는 이제 나를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대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이 아저씨 아들이에요.”
유리관을 향해 턱짓했다. 엘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이름은 로난. 이 아저씨가 한두번쯤 말했을 법도 한데, 못 들었어요?”
“로난. 로난이라고요?”
찰나 모든 정령의 행동이 멈췄다. 은근슬쩍 가까워지던 늑대 정령의 아가리도 허공에 정지했다. 나는 아직도 두 팔을 들어올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엘시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이 어찌나 신중한지 반쯤 녹아내린 강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세 걸음 앞에 멈춘 그녀는 아버지와 내 얼굴을 연신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한 번 시선이 반복될 때마다 루비색 눈동자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서른 세 번째 반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맙소사.”
엘시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큼직한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정말. 정말 로난 님이세요?”
“반가워요 엘시아. 아, 여기서는 처음 보는 거겠구나.”
모든 정령이 역소환됐다. 마나로 이루어진 연기가 푸른 조명 속에 흩어졌다.
그녀에게서 적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내가 씩 웃었다.
“그럼요. 살아 있는 걸 봐서 기쁘네요.”
“어, 어떻게? 금제를 모두 없애신 건가요? 로난 님은 구원자님을 볼 수 없어야 할 텐데···아니, 그보다 왜? 성인식이 한참 지났는에 왜 이제야 온 거죠? 저는, 저는···!”
“엘시아. 진정해요.”
나는 질문 공세를 퍼붓는 엘시아의 양어깨를 감싸 쥐었다.
길고 하얀 귀가 움찔거렸다.
“내가 먼저 설명을 해 줄테니까.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 물어보세요. 괜찮죠?”
빤히 나를 올려보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딱 필요한 정보만. 세 번의 평행세계에 걸쳐서 단련된 요약 실력으로.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어요. 평행세계라고요?”
“네. 저는 이쪽 세상의 로난이 아니에요. 그 등신은 지금쯤 짬밥 꼬라지가 왜 이러냐면서 범죄자 출신 전우들이랑 투덜거리고 있겠죠. 그래도 사람을 보내 놨으니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아, 누나는 고향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어디 시골 흥신소도 아니고 아칼루시아에 맡긴 의뢰다. 거기서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아드리안 누님은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로난3를 잡아와줄 터였다.
말을 맺은 내가 아버지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보다,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요.”
“아···네. 몇 개월 사이에 상태가 많이 나빠졌어요.”
엘시아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그녀가 시선을 떨구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수준까지 왔어요. 눈만 감고 있을 뿐 목소리는 듣고 계시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네요. 유일하게 나을 방법은···”
“호로자식의 피 뿐이죠.”
“말씀하신 대로에요.”
엘시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벨의 검에 찔린 상처를 고칠 특효약은 오직 아벨의 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깊고민에 빠졌다.
“음.”
솔직히 아벨의 팔다리를 자르고 피와 눈물을 뽑아내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점이면 근원을 흡수하기는커녕 대머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로비나 열심히 뛰던 시기일 테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카샤.
‘너는 왜 여기에 왔던 거냐.’
나는 마나 추적자를 꺼내들었다. 에르제베트가 줄을 달아 준 덕에 목걸이처럼 목에 착용한 채로 다니고 있었다. 마나를 감지하는 구슬 내부의 바늘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새 떠났다. 얼굴만 비춘 수준이야.’
나는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마나 추적자를 가동했다. 아칼루시아 모녀의 역작은 눈보라 속에서 흩어지던 아카샤의 미세한 마나조차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감지에 성공한 직후, 바늘은 분명 종자 보관소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었다.
하지만 고작 삼 분이었다.
열심히 내달리던 와중 바늘은 맥없이 방향성을 잃고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에르제베트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라고 언질했었다.
아카샤가 다른 평행세계로 갔거나, 추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가버렸거나. 후자의 경우는 이 별을 벗어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근심이 깊어졌다. 그렇게 큰 부상을 입은 놈이 어디를 싸돌아다니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다른 평행세계로 갈 수는 있나? 그런 꼴로는 가자마자 죽을 텐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함정이고,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면?
이러는 와중에도 카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머릿속의 저울을 움직이며 침음을 흘리던 와중이었다.
쿵-!
전선으로 뒤덮인 천장 너머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뭐, 뭐죠?!”
화들짝 놀란 엘시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 느낌은···.”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흔들림이 익숙했다. 팔다리의 털이 곤두서고 있었다. 사고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엘시아를 뒤로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 제가 정령을 보내 볼 테니···”
“그럴 시간 없어요.”
생명 유지 장치에 문제가 생길까 여기서는 함부로 굴 수 없었다. 나는 적당히 외진 방으로 이동한 뒤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형상의 검기 두 개가 천장을 부수며 빠져 나갔다. 환한 햇살이 무대의 조명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역시.”
손바닥만큼 작게 보이는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마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허벅지가 부풀었다. 자세를 낮춘 뒤 다리를 펼쳤다. 용수철처럼 솟구친 몸이 순식간에 구멍을 통과하고 지상에 다다랐다. 확 몰려온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종자 보관소의 입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저 푸르른 상공 위에 하얀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하고 희멀건 인간의 팔이 균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통과할 수 없다. 길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나를 흥분케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고 굵은 중저음과 하얀 팔뚝은 틀림없는 거인의 것이었다. 하얀 팔, 쭉 타고 올라가면 머리 맨질한 대머리가 있을 것이 분명한 팔은 공기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이 허공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균열이 발생한 이유는 자명했다.
“그래. 어디로 갔으면 당연히 흔적이 남겠지.”
아카샤가 이동했다는 증거였다. 그를 방증하듯 균열의 크기는 잘 쳐봤자 웨어울프 한 명이 통과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머리를 꺼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훨씬 더 컸을 터였다.
아카샤가 이동한 장소가 다른 평행세계가 아닌, 거인들의 세상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잘 됐군.”
입꼬리가 올라갔다. 호재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고점에 다다른 내 몸은 슬슬 속도를 잃고 추락하는 중이었다. 나는 붉어진 검을 뿌리듯이 휘둘렀다. 궤적을 따라 쏘아진 검기가 거인의 팔을 관통했다.
“더러운 손 치워.”
『······!!!』
팔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잘려 나갔다. 분수처럼 솟구친 푸른 피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윽고 속옷까지 축축해졌지만 고민거리가 해결되서 그런지 별로 불쾌하지가 않았다.
“세상에! 저게 무슨···!”
저 멀리서 엘시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요동치던 거인의 팔이 균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제비를 돌며 착지한 내가 피로 번쩍이는 칼을 들어 보였다.
“엘시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네, 네에?”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아버지는 죽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