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5)
2-115. 아버지의 이름으로(3)
#115
좋은 생각이 났다. 착지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거인의 팔이 내 옆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푸른 피가 울걱거리는 단면은 보기만 해도 토가 쏠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첫 번째 평행세계에서는 어떻게 저따위 고기를 먹은 건지.
손을 말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소리쳤다.
“엘시아! 병 같은 거 좀 가져와 줘요. 가급적 큰 걸로!”
“네? 병이요?”
“여러 개면 더 좋아요!”
엘시아가 갸웃거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요구 사항을 들어 주었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엘시아를 따라온 정령들이 종자 보관소에서 들고 온 용기 수십 개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후우···가져왔어요. 이걸로는 부족할까요?”
“저기, 남들한테 부담스럽다는 말 들은 적 있죠?”
용기들을 훑어본 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하나를 목장에서 우유통 대신으로 써도 될 것 같았다. 난 기껏해야 양동이 같은 걸 생각했는데 말이지.
엘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구원자님은 제가 가끔 선물을 드릴 때마다 그런 반응을 보이시고는 했어요. 저는 진짜 감사해서 드린 것 뿐인데···.”
“뭘 줬길래 그래요? 값비싼 보석 같은 거?”
“가장 최근에 드린 건 금광이었어요. 무단 점거하던 산적 백 명도 노예로 얹어서 드렸는데 부담스럽다면서 거절하시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죠.”
“아.”
할 말이 없었다. 고고하던 하이 엘프 누님의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설마 슐리펜네 아빠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말을 이었다.
“······별 의도는 없는 질문이었어요. 그런 맹목적인 사랑도 수요가 있는 법이죠. 어쨌거나 제가 말하는 대로 해 주세요. 이 고래 똥처럼 큼직한 팔에서 피를 모조리 짜내면 돼요.”
“피, 피를요?!”
엘시아가 당혹성을 뱉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칼을 휘둘렀다. 하얀 거인의 팔뚝 위로 십자 모양의 칼자국 수십 개가 새겨졌다. 절단면에서만 흘러 나오던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꺄아악!”
“신선함을 잃기 전에 어서 담아야 해요. 그리고 피를 조금씩 아버지에게 투여해 보세요. 어차피 아버지나 아벨이나 능력의 근본은 이 자식들의 피니까···못 해도 진통제는 되겠죠.”
장담은 못 하지만 효과는 있을 터였다. 당장 원래 세상에서 내 피를 투여했을 때도 눈을 뜨고 웃어주는 정도까지는 호전되었으니까. 거인의 워
“자, 잠깐만요 로난 님. 지금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죠? 별의 도래 때에 나타나야 할 거인들이 왜 지금···!”
“돌아와서 설명해 줄게요. 시간도 없거니와 저거 내버려 두면 또 튀어나올 수도 있어서. 새 정령 한 마리만 불러서 저 태워 줄래요? 소환할 수 있는 스크롤도 하나만 주시고.”
“새?”
엘시아가 갸웃거렸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하늘에 난 균열을 가리켰다.
대머리 월드와 연결된 아카샤의 균열이 한여름의 백사장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네. 이 뒷부분은 싹 자르죠.”
“뭣이?”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부라렸다. 오탈자 교정은 빈번하게 있었어도 내용을 통째로 갈아엎으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편집자 에르제베트의 태도는 장인처럼 완고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번 주 치 내 원고가 들려 있었다.
“잘 쓰기는 했는데 너무 뻔해요. 첫 번째 평행세계랑 별로 다른 점이 없잖아요. 균열을 통과하니 튀김 가루를 입힌 대머리들이 세때처럼 날아다니고···로난 님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파란 피가 터지고···거인들이 사는 세상은 전체 이야기를 통틀어서 한 번만 보여 줘도 될 것 같아요.”
“확실해?”
“확실해요.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아냐, 믿지. 그럼 화끈하게 빼 버리자고.”
에르제베트가 원고를 돌려주었다.
나는 대머리 월드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부분에 모조리 X자를 쳐 버렸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았다. 첫 번째 세상에서는 르탄시에랑 판타시온, 오르세와 아벨이 감초 역할을 해 주기라도 했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 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전개가 단조로워졌다.
원고를 재차 검토한 내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좋아. 아주 좋아 에리. 이래서 내가 너를 편집자로 뽑은 거라니까.”
“으흥, 제 안목은 확실하다고요? 전개를 빼 줄때는 빼 줘야 좋아요.”
“동의해. 가장 중요한 건 지루해지지 않는 거니까. 물론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는 선에서.”
“바로 그거죠. 참, 이번 원고를 보고 떠오른 건데···”
“응?”
갑자기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도끼눈을 뜬 그녀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초대장까지 줬는데 왜 안 왔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그래서 저쪽 세상에서 다녀왔잖아. 내 절절한 미안함이 활자를 통해 전해지지 않든?”
“이건 소설이잖아요. 와, 심지어 여기서도 본인은 안 들어가고 아셀 님만 보냈네.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아칼루시아에 들어가서 뭐 하냐? 기껏해야 메이드 언니들 엉덩이나 힐긋거리면서 여생을 낭비했겠지. 물론 그것과 별개로 네 호의는 정말 고마웠어.”
“정말이지···제가 무슨 심정으로 그걸 드렸는지도 모르고···.”
에르제베트가 팔짱을 끼며 으르렁거렸다. 별 말이 없길래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쌓인게 제법 큰 듯했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저히 아칼루시아에 갈 짬이 안 났으니까.
나는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해. 그런데 진짜 좋은 곳이더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 당연하죠. 코빼기도 안 비치셨으면서 와 본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진짜 가 봤다니까.”
나는 에르제베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장성한 그녀는 내가 평행세계에서 봤던 아드리안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얼굴도 몸매도 아주 훌륭한 정변을 이룩해 냈다. 그녀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국 남자의 삼 대 비극에 넣어도 될 정도로.
에르제베트가 말했다.
“또 그런 농담을···하지만 어디에 조사를 맡기셨는지는 몰라도 이걸 알아낸 건 신기하네요.”
“엉? 뭔데?”
“아칼루시아에는 분명 리즈라는 메이드가 있었어요. 청소도 잘 하고 다리가 참 예뻤죠. 저랑도 꽤 친했는데, 제국에서 네뷸라 클라지에를 소탕할 당시 잡혀갔어요.”
“어떻게 잡았대? 나도 운이 없었으면 못 잡을 정도였는데.”
“자이파 님이 멋대로 끌고 갔어요. 자신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다면서···엄마, 아니 가주님이 길길이 날뛰면서 항의하려 했는데, 하루만에 광신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허.”
실소가 나왔다. 나조차 놓칠 뻔했던 리즈를 잡아낸 것은 자이파의 주먹구구식 직감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연신 끄덕거리고 있는 내게 에르제베트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럼 이번 주도 힘내세요. 제 의견을 받아들여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조심해서 가라.”
“넹. 아데샨 언니랑 수다 좀 떨다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책상 앞에 앉은 뒤 한층 가벼워진 원고를 살펴 보았다. 확실히 자른 쪽이 더 나았다. 교통 체증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이 뭔지 생각해 보면,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만년필을 돌리다가, 글을 이어 쓸 부분 위로 촉을 가져갔다.
“음. 그러니까···.”
[『크아아아아악-!!』
거인은 여덟 장의 날개에서 여덟 갈래의 피를 뿌리며 추락했다. 대머리 월드를 지배하는 거인의 왕이었다. 모든 날개가 잘린 녀석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종족의 근원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추락하던 놈이 팔을 뻗으며 절규했다.
『멈춰, 멈추어라!』
“좆까.”
당연히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칼을 휘두르자 근원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유지력을 잃은 근원이 유리잔이 깨지듯 폭발하며 흩어졌다.
사흘에 걸친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왕이시여···!』
『아아, 아아아.』
『소···멸한다.』
일대를 포위하던 대머리들의 몸이 입자로 화하며 분해되고 있었다. 근원을 모시는 신전에서는 이 기묘한 세상의 정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불현듯, 사흘간 정체되어 있던 통증이 단번에 몰려왔다.
“윽.”
가슴을 움켜잡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아무리 대머리 월드를 공략해본 적이 있고, 근원까지 오는 가장 빠른 길을 타고 이동했어도 대머리들은 상당한 강적이었다.
나는 엘시아가 준 바람 정령 소환 스크롤 열 장을 모조리 날려 먹고 나서야 근원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열 마리 모두 멋진 아이들이었다.
“민머리들끼리 지옥에서 삶은 계란이나 나눠 먹거라.”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중지를 쳐들었다.
수억 개의 빛줄기가 머나먼 우주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대머리 종족에게 사로잡혀 있던 영혼이었다. 손 대신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배웅하던 찰나였다.
멈춰 있던 마나 추적자의 바늘이 발 아래를 가리켰다.
“오?”
아래를 내려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너무 먼 것이다.
나는 주저없이 신전에서 뛰어내렸다. 얼굴 가죽이 뒤로 당겨지며 뼛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미터 아래의 황야에는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가 서 있었다.
“찾았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빛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자다가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탁 풀려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수천 년에 걸쳐 구상한 원대한 야망이 실시간으로 분해되고 있었으니까.
빛의 입자로 분해되는 거인의 군단.
무적이라 믿었던 종족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한참이나 벙쪄 있던 사내가 오줌을 지리듯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우리의 사고뭉치 아벨이었다. 끝내 아카샤를 찾지 못한 나는(씹새끼가 그새 또 다른 세상으로 간 듯했다)이틀차부터 추적 대상을 바꿔 놓았다.
아벨은 별의 도래를 위해서 주기적으로 대머리 월드에 로비를 뛰러 오는데, 그 주기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훨씬 오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
“엇차.”
등 뒤로 검을 휘두르자 폭발이 일어났다. 한 차례 더 가속한 몸은 붉은 벼락처럼 아벨의 뒤편에 착지했다. 소리를 들은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음?”
“안녕. 삼촌.”
클클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꿈을 겁탈당한 사람을 대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너무 반가워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속죄···해야겠지?”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내가 땅을 박찼다.
너무 넘겨도 그러니 딱 여기까지만 생략하겠다. 15초 걸렸다.
아벨의 검을 부러뜨리고, 양 팔을 자르고, 칼자루를 뒷구녕에 쑤셔박아 주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근원도 없고 아카샤 표 금속 갑옷도 없는 아벨은 이제 내 상대가 아니었다.
팔을 수십 토막 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은 마지막 단계에서 저항 없이 흘러 나왔다.
“크악! 크아아악! 크오오옷-!”
비명이 처절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울부짖는 아벨을 어깨에 들쳐멘 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귀환을 위한 마법진은 엉덩이에 꽂은 칼로 그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