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6)
2-116. 아버지의 이름으로(4)
#115
하늘은 탁백색을 띄었다. 황무지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어떤 냄새도 묻어나지 않았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인 창백한 성은 오래 전에 죽은 거인의 시체처럼 그 무미건조한 풍경을 굽어 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로 오는 것이었지만, 도통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눈깔이 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하필이면 이딴 곳에 성을 짓고 지랄이야?”
나는 교주 전용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연설용 단상 위에서는 창백한 성의 안뜰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었다. 안뜰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신도 수천 명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긴급 소집령이 내려진 터라, 지위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신도가 집결한 채였다.
내 앞에 서 있던 아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한다.”
“마, 말씀하신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교주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는 군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아벨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하늘을 보고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네뷸라 클라지에는······오늘부로 해산이다.”
비보를 전달하는 사람 치고는 태도가 담담했다.
이미 마음이 완전히 꺾여버려서일수도 있고, 부하들을 이용해서 헛짓거리를 시도하면 다시 칼자루를 엉덩이에 박아 버린다는 내 협박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러갔다. 곳곳에서 당혹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산?”
“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방금 교주님이 뭐라 하신 거야?”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보다 옆에 저 자는 누구지?”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다. 물론 교주의 앞인지라 다들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수천 명의 조곤거림은 그 자체로 이미 소음이었다. 이윽고 계급이 높은 신도부터 본격적인 성토를 시작했다.
“교주님! 그 말이 사실입니까!?”
“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는데 왜···!”
눈치가 빠른 대주교들과 일부 주교는 나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군.
그리 판단한 내가 칼집으로 아벨의 궁둥이를 쿡 찔렀다.
“어이.”
“···알았다.”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작은 접촉에도 움찔거리는 꼬낙서니가 애처로웠다. 후면이 붉게 물든 바지는 그가 겪었던 수모를 새긴 비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양 팔도 재생했지만 바지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두 발자국을 더 걸어 나간 아벨이 재차 말했다.
“사실이다. 교단은 목적을 잃었어. 별의 도래는 벌어지지 않는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째서?!”
‘말 그대로다. 하늘 너머의 위대한 존재들···아니, 어차피 다 끝났으니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군. 그 멍청한 대머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궤멸해 버렸기 때문이지. 몰래 노렸던 힘의 근원조차 파괴되어 버렸는지라 우리에게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했던 주교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헛소리는 집어치우라며 썩은 토마토나 짱돌을 던지기에는 아벨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소란이 더해지고, 이번에는 대주교 쪽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교주님.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익숙한 음성이었다. 쳐다본 곳에는 르탄시에가 있었다.
날다람쥐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하던 여자. 주름 하나 없는 얼굴과 요염하게 휘어진 눈꼬리는 그녀가 백 살도 넘은 마녀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위대한 분들의 세상에 사고라도 생긴 건가요? 우주적인 천재지변이라든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네?”
“무능한 대머리들의 세계는 단 한 명으로 인해 멸망했다. 지금 내 뒤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어차피 알게 될 테니 덧붙이자면, 교단이 해체되는 이유 중에는 이 사내에게 내가 패배한 탓도 있다.”
“······그게 무슨.”
르탄시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교주를 향하던 시선은 고스란히 내게 집중되었다. 아벨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직접 하는게 어떤가. 그게 더 잘 먹힐 것 같은데.”
“흠, 그럴까?”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나는 양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몸을 일으켰다.
아벨을 뒤로 밀쳐내고 나서자 신도들의 면면이 일그러졌다.
“감히···!”
“불손한 자가! 감히 교주님의 몸에 손을 대!”
아직은 충성심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교단의 해체 소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알 바가 아니었지만.
단상 아래로 가래침을 뱉은 내가 입을 뗐다.
“시끄럽다. 하수구에서도 안 받아줄 찌꺼기들아.”
“뭐, 뭐라고?”
“세상을 망하게 하려던 버러지들이 뭐 잘났다고 나불거려?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라. 니들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거의 모든 신도가 발정난 원숭이 군단처럼 격분하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자수하고 죗값을 치르는 거다. 제도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릴 거고, 여태껏 얼마나 패악질을 저질렀냐에 따라서 처우가 달라질 거야. 착하게 살았으면 징역으로 끝나고, 아니면 목이 잘리거나 로돌란에서 심문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개소리 집어치워! 다들 저따위 말을 들을 생각입니까?!”
“두 번째는 간단해. 여기서 죽는 거야.”
나는 말을 맺음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콩알만한 검기 하나가 방금 개소리가 어쩌고 한 신도의 미간을 관통했다. 회전하는 예기의 탄환은 그의 뒤통수를 박살내며 뇌와 함께 터져 나왔다.
“걱. 그게각.”
시체가 된 몸뚱어리가 불에 닿은 지네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허억···!”
“마, 마르손이 일격에!”
삽시간에 일대가 조용해졌다. 지위 높은 신도들의 얼굴부터 창백해졌다. 방금의 일격으로 실력의 격차를 눈치챈 것일 터였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마법도 아니고 검기로 딱 한 명만 죽이는게 절대로 쉬운 게 아니거든.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으며 말했다.
“두 번째를 고르고 싶은 사람은 당장이라도 말해. 솔직히 나는 이쪽이 훨씬 더 편하니까. 판사 나리 앞에서 소명할 기회를 주는 건, 아직 니들 죄질이 최악에 이르지는 않은 시점이기 때문이야.”
일 년만 더 지난 시점이었어도 선택지는 없었을 터였다. 그냥 한 자리에 모으게 한 뒤 무차별적으로 검기를 날렸겠지.
나답지 않게 이런 자비를 베푸는 이유는, 시점도 시점이지만 지난 평행세계를 거치면서 만나온 놈들 중에 꽤 괜찮은 인재가 있어서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인 르탄시에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절대로 나서지 마세요.”
“응?”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절대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진 그녀의 입술을 파리하게 질린 채였다. 역시 교단의 참모인 만큼 눈치 하나는 빠른 아가씨였다. 대주교들은 분해하면서도 그녀의 의견에 동하는 분위기였다.
푸른 머리의 엘프, 아나퀴엘이 끄덕거렸다.
“응. 나는 아직 죽기 싫어. 차라리 로돌란에 갈래.”
“아기새들만 아니었어도···원통하군. 어디서 저런 놈이.”
“내가 움직인다면 교주님을 해하겠지. 어찌할 방도가 없군.”
아나퀴과 알리시아, 강화 인간 카일라시스까지. 하나같이 본 적 있는 면면이었다. 가장 눈독을 들이던 판타시온은 멀리서 임무라도 수행하고 있는지 자리에 없었다.
수뇌부인 대주교들이 주저하고 있으니 아랫계급의 신도들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시간도 없는데 잘 됐군.
정확히 십 초를 기다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법의 심판을 받겠다는 걸로 알면 되겠지? 그럼 바로 차원문으로 이동···”
“아니. 난 싫어.”
“뭐라?”
“요 애새끼야. 감히 누구 마음대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썹을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인이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다른 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저번 평행세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티에리아였던가?
인파를 가르며 앞으로 걸어 나온 그녀가 검지로 단상을 겨누었다.
“재밌어서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밑도 끝도 없이 떠드네. 검을 좀 다룬다 해도 한낱 가축에 불과한 인간이, 우리에게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니?”
“티에리아! 안 돼요!”
“겁쟁이는 다물고 있어 르탄시에. 니들이 그러고도 대주교야? 같지도 않은 잡기술에 바짝 쫄아가지고는.”
티에리아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르탄시에는 반박하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티에리아, 티에리아라.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고대의 흡혈귀인지 뭔지 하던 잡것이었다.
‘로돌란의 최하층에서 머리를 잘랐었지. 무슨 기술을 쓰는지 보지도 못했었는데.’
그녀가 다시 내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가장 한심한 건 당신이에요 교주님. 아니, 이제 교주도 아니지. 이런 겁쟁이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교단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티에리아.”
“감히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역겨우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엉덩이에서 피는 왜 흘리고 있는 거야? 저 애새끼한테 겁탈이라도 당하셨나 보지? 크히히···!”
티에리아가 웃었다.
그녀 말고 웃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과연 흡혈귀라 그런지 피 냄새에 민감했다. 아벨은 그런 수모를 겪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지난 한 시간 동안 겪었던 일은 겁탈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웃음을 거둔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귀찮게 구네 진짜. 덤빌 거면 빨리 덤벼 인마.”
“건방진 애새끼 같으니···안 말해도 그럴 생각이야.”
티에리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콰아아아아! 그녀의 몸이 피보라에 휩싸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던 혈액은 신장이 3m에 이르는 악마의 형상으로 변했다. 책에서나 보던 고대 흡혈귀의 외형이었다. 본모습을 드러낸 티에리아가 쇳물이 끓는 듯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두 머저리를 동시에 찢어발겨 주마!”
피의 악마가 날개를 펼치며 비상했다. 검붉은 궤적이 그녀가 지나온 자리에 새겨졌다.
상당히 빨랐다. 나는 그녀의 자신감이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 티에리아의 모습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많은 인원 중에서도 극소수일 터였다.
“쯧.”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소수 중 한 명이 나였다. 고개를 비틀자 피로 이루어진 손톱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뭐라고···!’
티에리아가 당혹성을 흘렸다. 이미 내 뒤로 넘어간 그녀가 다급하게 방향을 전환하려 했지만 나는 그걸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칼자루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참격을 흝뿌렸다. 악마의 육신 위로 하얀 선 수십 개가 어지럽게 그어졌다.
“어···.”
“니가 마지막이면 좋겠다. 진심으로.”
칼날이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검을 칼집에 꽂아 넣는 순간이었다. 티에리아의 몸 위로 새겨졌던 직선이 단번에 벌어지며 폭발했다. 피의 비가 쏟아졌고, 이윽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리석기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신도들이 충격에 빠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미리 챙겨놓은 머리통 두 개를 던져 주었다.
“자, 선물.”
“선물···? 허어어억!”
머리통을 받아든 신도가 경악했다. 모두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마론과 버미니온. 창백한 성에 남아 있던, 인원을 소집하기 전에 덤벼든 대주교들의 최후였다.
“마, 마론 님!”
“맙소사. 버미니온.”
경악은 머지않아 적막이 되어 내려앉았다.
이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잠해진 군중을 일 분 가량 지켜보다가, 외부 세계로 나가는 호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나도 시간 없어.”
“······!”
따라오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땅에 뿌리박힌 창백한 성만 제외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도 언젠가 꽃이 피겠지.”
쓸쓸한 바람이 한동안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땅을 쓰다듬고 있었다. 거인의 세계와 연결이 끊긴 하늘은 깊은 곳부터, 서서히 푸른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