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7)
2-117. 아버지의 이름으로(5)
#117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물과 하늘은 푸르고 땅과 나무는 초록색을 띄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기지개를 켰다.
그래. 이게 풍경이지 씨발.
사흘간 무채색의 대머리 월드와 총본산에 갇혀 있다 나와서 그런지 더 감회가 새로웠다.
“날 좋고.”
물가에는 수천 명의 신도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심판과 죽음 중에 심판을 택한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티에리아가 참 큰 역할을 해 줬다. 개인의 죽음으로 이 많은 목숨을 구하다니. 순교자로 훈장이라도 수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르탄시에를 돌아보며 물었다.
“날다람쥐, 이걸로 다 모인 거냐?”
“자, 잠시만요!”
그녀는 공중에서 신도들의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과 별개로 일처리가 굉장히 능숙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인원 파악을 마친 르탄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걸로 전원 다 나왔어요. 그런데 왜 아까부터 저를 날다람쥐라고···”
“신경쓰지 마. 다시 들어가 봤는데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널 죽여도 되는 거지?”
“그, 그런 가혹한 처사가···하지만 정말 다 나왔는걸요. 확실해요!”
르탄시에가 호소했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신도들을 세 보려다가 집어치웠다. 내가 기억하는 날다람쥐는 이만큼 겁을 줬는데 꿍꿍이를 꾸밀 만큼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수면을 바라보다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좋아. 그럼 닫는다.”
“네? 닫는다니, 그게 무슨···”
르탄시에가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유성처럼 쏘아진 참격이 호수를 가로질렀다. 수면이 좌우로 찢어지며 하얀 진흙으로 이루어진 밑바닥이 드러났다. 물보라의 벽이 하늘을 가렸다.
“히익···!”
르탄시에가 헛숨을 들이켰다. 일렁이는 물그림자가 호반에 드리워 있었다. 심판의 공포에 떨고 있던 신도들도 잠시 두려움을 잊고 순수한 경악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저항하지 않기를 잘 했군.”
수면에 새겨진 공간 마법이 마나로 분해되며 흩어지고 있었다.
놀라는 쓰레기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추억이군. 그때는 마냥 신기했는데.”
필레온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비로제 누님은 장비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필레온 아카데미의 호수를 반으로 갈랐었다. 그때의 충격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
아직 바르카의 난이 벌어지기도 전이었으니 필레온 아카데미에 재직 중일 터였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뱀 그림이 그려진 잠옷을 입은 채 뒹굴거리겠지.
이번 평행세계의, 누님 말고도 만나지 못한 인연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솔직히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은 한시빨리 아카샤를 때려잡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지당히 누려야 할 평화를 되찾아 주는 게 먼저였다. 네뷸라 클라지에와 대머리 클럽은 박살내 놨으니 절반 정도는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아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나오는군. 괴물 녀석.”
꿈을 잃은 삼촌은 적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였다.
스포츠 경기의 관객처럼 순수하게 내 활약을 즐기는 모습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갈라졌던 호수가 다시 붙었다. 그림자는 물의 장벽이 붕괴됨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출렁이던 물결은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마법을 잃은 호수는 천천히 원래 모습을 되찾을 터였다.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도 돌아오겠지.
어쨌거나 볼일은 끝났다.
“그럼 가자. 신호탄 날려.”
“으으…알았어요.”
르탄시에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팔을 쳐들자 붉은 섬광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구조 신호였다.
‘크라티르나 로르혼 영감님 정도면 괜찮겠지. 내가 이 많은 놈들을 다 잡아나를 수는 없으니.’
이제 인근을 순찰하던 제국군이나 산림 구조대가 올 것이다. 온통 새하얀 놈들이 꼴뚜기 알처럼 바글거리는 걸 보고 한 번, 이 놈들의 정체를 알고 두 번 경악할 테고, 오줌을 질질 흘리면서 상부에 연락을 때릴 터였다.
결국에는 긴급 호송을 위해 대륙에서 제일가는 인재들이 찾아올 터였다. 앞서 말했던 어르신 듀오나 검성 자이파 같은.
그들이 연행을 마치는 것까지 보는 게 내 역할이었다.
거기까지는 해 줄 수 있지. 암.
공중에서 삼 분 정도 머물던 신호탄이 사그라졌다.
축 쳐진 신도들이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사형이겠지?”
“희망을 버리지 마. 너는 별로 나쁜 짓도 안 했잖아.”
“훈트. 보통 방화는 중범죄 취급을 받아. 사람이 다섯 명 이상 죽었으면 더 그렇고.”
“아하. 그럼 나도 안심할 수 없겠군. 세 명만 죽인 게 다라서 솔직히 마음을 좀 놓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구역질이 나는 내용이었다. 그냥 싹 죽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드문드문 일어났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래, 백 명에 한 명 꼴로 죄가 덜한 놈이 있을 수도 있잖아. 막 들어온 신입이라 과일가게 절도가 유일한 전과라거나.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시간을 축내던 차였다.
훌쩍거리는 아기새들을 위로하던 대주교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봐. 저게 뭐지?”
“엉?”
나한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검지는 잔잔해진 호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중앙 부근의 수면에서 1m쯤 떨어진 지점에 검은 구체가 떠 있었다.
“…..마법인가?”
“구슬?”
신도들의 이목이 쏠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었다. 구체의 지름은 1m쯤 되어 보였다. 우주처럼 깊은 흑색은 신비로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나는 저것과 비슷한 걸 지난 평행세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야자수가 이글거리는 남부에서. 아카샤와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여러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쳐들었지만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알리시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여섯 명의 아기새를 멀찍이 내던지며 소리쳤다.
“썅, 다들 흩어져!!”
“꺄아아악! 살려 주세요!”
“잠깐, 이게 무슨 짓…”
알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무천장 위로 날아가는 여인들은 정말로 새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격노에 찬 함성을 내지르려던 차였다.
콰아아아아!
호수 위의 구체가 폭발하며 어둠이 일대를 휩쓸었다. 시야에서 빛이 소멸하지기까지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발밑이 푹 꺼졌다. 추락하는 감각과 함께 알리시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
“빌어먹을. 그새 함정을 쳐 놨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늘도 호수도 보이지 않았다. 빼곡하던 숲의 녹색도 어둠에 덧칠된 채였다. 이질적인 마나가 사방에 팽배해 있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다른 아카샤의 마나였다. 잠깐 허공에 머무르던 몸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채 혼잣말했다.
“…무저갱.”
아카샤의 오러가 만들어낸 세계인 무저갱이었다. 바닥 없는 어둠은 빠른 속도로 확장하며 일대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불현듯, 발 아래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사, 사람 살려!”
“엄마아악!”
시선을 내렸다. 빵 부스러기 수천 개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추락하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끼야아아악! 끼악!”
“교주님…!”
르탄시에와 카일라시스도 보였다.
다만 그들은 신도들보다는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로브를 퍼덕이며 회전하는 르탄시에는 정말 날다람쥐를 연상케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일을 다 겪는군.”
놈은 나를 제외한 사람 중에는 제일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다. 추측컨데 더 강한 자일수록 느리게 떨어지는 듯했다. 설마 이런 기믹이 있었을 줄이야.
칼을 뽑아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나를 보고 있던 거냐?”
왜 이딴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건 함정이었다. 아카샤가 판 함정.
근처에서 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아마 내 행동거지를 예측하고, 호수에 무저갱을 깔아 둔 것이다. 아마 차원문을 파괴하는 게 발동 조건이었겠지.
솔직히 좆됐다. 더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두 번씩이나 엿을 먹을 것 같아?”
하지만 이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자루를 움켜쥐자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점점 넓어지는 어둠의 외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붉은 길을 그리며 날아간 검기가 어둠에 직격했다. 사나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강해지기는 했는지 무저갱이 살짝 흔들린 것 같았다.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만. 제기랄.
이제 다른 사람들의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검기를 날리려던 찰나였다.
“…엉?”
무언가를 느끼고 눈썹을 치켜떴다. 실제로 무저갱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한번 더 검을 휘둘렀다. 응축된 검기가 붉은 선을 그렸다. 동시에 머나먼 어둠 한가운데 새하얀 균열이 그어졌다.
“저건…!”
외부에서 개입한 흔적이었다. 그대로 직진하던 검기가 균열 위에 적중했다.
아까와는 다른, 둔탁한 파열음이 작렬했다. 유리창이 깨지듯 무저갱의 외벽이 무너졌다.
어둠이 산산이 흩어지며 호수의 정경이 펼쳐졌다.
“허윽!”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얕은 호숫물이 엉덩이를 적셨다. 아카샤의 오러는 연기처럼 먼 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눈이 아릴 만큼 푸른 하늘이 드리워 있었다.
“끼야악!”
“으악!”
“큭…”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벨과 그나마 천천히 떨어지던 대주교들이었다. 허나 그들을 제외한 사람은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다 어디 갔어?”
뭔가 이상했다. 다시 봐도 남아 있는 인원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나와 아벨, 대주교들만이 벙찐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어어어억-!
“응?”
소리의 크기로 미루어 봐서 아득히 먼 곳이었다. 드래곤이 똥이라도 갈겼나 싶어서 위를 올려보는 순간이었다. 르탄시에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히이익! 저, 저게 무슨?!”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
나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하늘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액체의 집합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훅 몰려왔다.
“아악!”
르탄시에가 황급히 역장을 소환하려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세차게 쏟아진 붉은 비가 시야를 뒤덮었다.
쏴아아아아-!
만 개의 화살이 동시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피의 폭풍 속에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으깨진 고깃덩이들이 우박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퍼부어지는 피와 고기의 중간중간에 하얀 천쪼가리가 뒤섞여 있었다. 나를 비롯한 생존자들의 면면이 굳어졌다. 그 많은 신도들이 어디로 갔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계속 떨어지면…이렇게 되는 건가.”
호수가 검붉게 물들었다. 먼저 추락하던 수천 명의 피였다.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파훼법을 찾지 못하면 결국은 이런 낙사체가 된다는 소리였다. 무저갱은 단순히 상대를 잡아두는 기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깐.’
찰나 중대한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무저갱의 탈출하는 것을 도와준, 그 균열은 누가 만들어준 거지?
처음에는 구조대가 와서 도와준 줄 알았는데 아직 다른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령에게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와중이었다.
사무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잘생긴 청년.”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는 보이지 않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는데, 칼자루를 쥔 모양새가 나와 꽤 비슷했다.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본 내가 실소를 흘렸다.
“뭐야, 난 또 누가 도와줬나 했네.”
“이 목소리는 설마···?”
나는 물가에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널브러져 있던 아벨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성큼거리며 다가온 사내가 내 앞에 섰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괜찮으냐, 로난.”
그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수 년 동안 통조림 신세로 지내서 그런지 피부가 흡혈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한동안 벌거벗고 다니셔야 겠다고 농담을 건네려 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힘을 줘서 눈을 감았다 뜬 내가 사내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나를 끌어올리는 손아귀에서는 야생마처럼 억센 힘이 느껴졌다.
마주친 사내의 눈동자는 그윽한 주홍색으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벨보다는 나와 누나를 더 닮은 노을의 색채였다.
카인과 마주보고 선 내가 입을 뗐다.
“아버지.”
“반갑다 아들아. 수십 년만의 재회 장소가 피로 물든 호수라니. 아주 끝내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