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49)
2-119. 가족(1)
#119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드리안 누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불치병 판정을 받은 환자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수월하지 않았다니···설마 사람이 죽은 건가요? 설마 그랬다면 내 이 개자식을 당장.”
“아뇨.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위 열 명이 전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죠. 제가 직접 나선 뒤에야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식인 맹수 생포 작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그녀는 대륙 서부에 주둔하던 징벌 부대에서 목표물을 찾아냈다. 저항이 극심했지만 로난이 준 쪽지(흑발, 크면 클수록 좋음)로 간신히 설득해서 데려올 수 있었다.
몸서리치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과연 이쪽 세상의 로난 님이더군요.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런 강함이라니, 정말 감탄했답니다.”
“후우우···별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진짜 고마워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맘때의 나는 한창 성질이 더러울 시기였다. 내심 살인까지는 안 할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불구조차 나오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어디에 가둬 놨어요? 지하 감옥?”
“그럴 리가요. 이틀 전에 모신 날부터 쭉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리고 있어요. 지금은 응접실에 계시겠군요. 돌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셀이 응대와 관찰 역을 맡고 있답니다.”
“아셀 녀석이요? 쉽지 않을텐데.”
“무려 자원이었답니다. 무섭지만 자신은 고향 친구니까 좀 낫지 않겠냐고 이유를 대서 말릴 수가 없더군요. 후후, 참 장한 아이죠.”
아드리안이 웃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대견함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걱정과 달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을 하고 있을 테지만.
응접실로 이동하기 직전, 카인이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노고와 친절한 응대에 감사하오. 좋은 저녁 되시길.”
“···별말씀을요. 그, 로난 님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렇소. 왜 그러시오?”
“후후, 부자가 참 많이 닮았다 싶어서요. 나중에 만찬 때 뵈어요, 카인 님.”
아드리안이 눈웃음쳤다. 말투에 요염함이 묻어나는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복도를 따라 걷던 내가 카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이. 재혼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나는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켰을 뿐이란다.”
“가주님은 그쪽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요.”
“그럴 리는 없지만 설령 사실이라 해도 유감스럽구나. 과부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거든. 내 심장은 영원토록 단 한 사람, 카샤의 것이란다.”
카샤는 엄마의 이름이었다. 눈빛을 보니 진심이라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이런 지조는 썩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내가 불의 어머니의 포옹에도 이성을 유지하고, 나비로제 누님의 키스를 막아낼 수 있던 것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카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개자식이라는 욕은 자제해 주면 고맙겠구나. 내가 개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아, 그걸 깜빡했네. 미안해요.”
“괜찮다. 술을 마시면 조건부로 개가 될 수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여지껏 자식들과 술자리 한 번 가진 적이 없군.”
카인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 같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응접실이 나타났다. 막 호화로운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차였다.
“제, 제발 그만둬 로난! 가주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거라고!”
문 너머에서 아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리를 돌리려던 손이 멈칫거렸다.
웃음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난 분명히 경고했어. 한 시간 내로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 멋진 책상 위에 똥을 쌀 거라고. 내가 여기 온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 그게···한 시간 반?”
“잘 알고 있군. 그럼 내 묻건데 아칼루시아는 시간 약속의 중요성을 모르나? 귀족 아셀의 삼십 분은 황금처럼 귀하고, 비루먹을 평민 나부랭이 로난의 삼십 분은 무시당해도 되는 건가?”
“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하지만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부디···히야악! 뭐 하는 짓이야?!”
“아셀. 너는 삼십 분의 지각 때문에 인간의 대변을 치워야 하는 거야. 이만한 출세를 거듭했음에도.”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카인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 안돼에에! 멈춰!!”
“크하하! 절망해라! 무력감을 느끼며 울부짖어라!”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아셀은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더는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미친 새끼가 남의 집에서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야.”
쾅! 나는 문을 박차며 응접실로 돌입했다.
책상 위에서 쭈그려 앉은 사내와 발을 동동 구르는 아셀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나와 매우 닮아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미간을 좁혔다.
“엉? 댁들은 뭐야?”
“와, 왔구나 로난! 으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온 아셀이 내 뒤로 숨었다.
사내의 엉덩이는 이미 반쯤 까져 있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쌀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 천둥벌거숭이의 정체가 이쪽 평행세계의 나. 즉, 로난-3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심호흡한 카인이 그에게 미소지었다.
“반갑구나. 로난.”
“꼰대는 뭔데 친한 척이야?”
“······꼰대? 나한테 한 말인가?”
“그럼 누구보고 한 말이겠어? 풉, 머리카락 꼬라지 하고는···댁 부모 중 한 명이 염소와 정분이라도 났나 보지?”
로난3가 큭큭거렸다. 카인이 얼어붙었다.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폭언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카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게 진짜 내 아들이라는 거군.”
카인의 눈동자는 실수로 어린아이를 치어 죽인 마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심정인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잘한 건 없었다.
카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갓난쟁이 시절에 유기했으면서 뭘 기대하셨소? 저주까지 덕지덕지 걸어 놓고.”
“그래···그 말이 맞아. 내 잘못이지···분명히 내 잘못이지만···.”
카인이 말꼬리를 끌었다. 아직도 로난3의 엉덩이는 까져 있었다.
끝내 친아들에게 해줄 말을 찾지 못한 카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지만 담배 좀 다오.”
“여기요.”
나는 안주머니에 있던 파이프를 건네 주었다. 능숙하게 불을 붙인 카인이 하얀 연기를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영혼이 빠져나오는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깊은 한숨이었다.
로난3가 눈을 부라렸다.
“니미, 갑자기 면전에서 담배를 태우고 지랄이야. 댁들은 뭐냐는 내 말 못 들었어?”
“닥치고 기다려 봐 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원숭이 새끼가 뭐 그리 입이 더러워.”
“뭐가 어째? 한 번 해보자 이거냐?”
로난3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꼬질꼬질한 셔츠 위로 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내 몸을 엄폐물 삼고 있던 아셀이 어깨를 움츠렸다.
“히이익···!”
순식간에 살기가 응접실을 채웠다. 검이 없어 주먹을 움켜쥔 녀석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저번 세상에서 본 로난2도 심하다 생각했는데 이건 그냥 짐승이었다.
‘일단 기절시켜야 하나?’
이대로라면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피를 볼 기세였다.
물론 싸움이 시작되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자신이 있었지만,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때리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양심이 좀 찔렸다.
머리를 긁적이던 내가 입맛을 다셨다.
“씁···됐다. 뭘 또 싸우냐. 애도 아니고.”
“겁쟁이 새끼. 막상 위기가 닥치니 불알이 쪼그라들었나 보군.”
“지랄은 그쯤 해. 다 필요없고 너를 여기로 부른 손님이 나야. 쪽지 받았지?”
“쪽지?”
“여자 취향 적힌 거 말이야. 사실 누나를 좋아하는 로난 일병.”
“네가 그걸 어떻게···? 잠깐, 그렇다면!”
로난3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내가 바로 평행세계에서 온 너다.”
“무슨 이따위 일이···아니, 진짜로?”
“아까 이 난쟁이가 이름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못 믿겠으면 가까이 와서 보던가.”
나는 성큼성큼 로난3에게 다가갔다. 살기는 잦아든지 오래였다. 녀석은 쇠사슬에 옭매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면밀하게 살피던 로난3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정말 나군.”
“그러게 말했잖아. 의외로 쉽게 믿는군”
“내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니까.”
“그렇긴 하지.”
“어이가 없네. 틀림없이 강제로 전역시키려고 군에서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로난3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목소리에 힘이 풀린 것이 유령에게 홀린 사람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로난2보다 빨리 상황을 받아들인 편이었다.
문득, 눈썹을 치켜뜬 그가 카인을 돌아보았다.
“잠깐만. 이게 평행세계의 나라면 댁은 설마···!”
“그래. 로난.”
카인이 끄덕였다. 염소로 인한 충격이 잦아들었는지 그의 얼굴에는 다시 온화한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카인이 그의 앞에 섰다.
“나는 네 아버지란다. 너무 어린 시절에 이별해서 기억이 안 나겠지. 마음을 전할 방법은 없었지만, 나는 뼈에 사무칠 만큼 네가 보고 싶었단다.”
“아버지···정말로?”
로난2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는 나와 대화할 때보다 한층 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귀족의 대저택에 불려와서는 평행세계의 자신과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튀어나왔으니.
카인이 아들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로난. 내가 네 아버지다.”
“아버지···.”
부자는 서로를 한참이나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가족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따스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부자 상봉을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이 개새끼.”
로난3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응?”
카인이 뭐라 하기도 전이었다. 주먹을 움켜쥔 로난3가 그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뻐어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카인의 머리가 거칠게 젖혀졌다.
“윽···!”
카인의 입술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아셀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상상치도 못한 패륜에 내 손이 칼자루에 얹어졌다.
“얌마, 무슨 짓거리를···”
“잠깐. 나는 괜찮단다 로난.”
휘청거리던 카인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반쯤 뽑혀 나온 칼날이 제자리에 정지했다. 다행히도 후속타는 들어가지 않았다.
떨리는 주먹과 아버지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로난3가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다.
“뭘 잘했다고 지금 나타났어. 당신 때문에 우리 누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미안하다. 할 말이 없구나.”
“씨발, 왜 이제서야 온 거야···.”
흐려지는 말꼬리에서 절절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쯤 되면 나도 뭐라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평행세계에서 온 침입자일 뿐, 진정한 부자는 저 두 사람이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카인이 아들을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
로난3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었다. 카인은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다른 세상의 아들아. 님버튼으로 가자.”
“···고향으로요?”
“그래. 이릴도 만나야 하고···애초에 한 번 들를 생각이기도 했거든. 무엇보다…”
잠깐 뜸을 들이던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아주 많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