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0)
2-120. 가족(2)
#120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님버튼은 단풍이 든 산처럼 울긋불긋하게 변한 채였다. 높아진 하늘과 나지막이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보던 이릴이 혼잣말했다.
“날씨 좋다.”
그녀는 이맘때의 하늘을 가장 좋아했다. 어느 계절이나 석양은 아름답지만, 초여름의 저녁 하늘이야말로 동생의 눈동자와 제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님버튼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이릴의 오두막 역시 단풍이 들어 있었다. 발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후우, 오늘도 이걸로 끝!”
이릴은 흡족하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올해는 풍작이라 수확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사람도 납치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삼나무 바구니는 토실토실한 햇감자로 가득 차 있었다. 장정 두 명이 붙어도 나르기 힘든 무게였지만, 그녀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감자 몇 개만 골라낸 그녀가 요리를 시작했다.
“흐흥흥~흐흥~”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늘 하는 메뉴라 굉장히 능숙하다.
잘 씻은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낸다. 감자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 약간의 고기와 다른 채소도 첨가하면 더 좋다.
오늘은 이웃집에서 선물해준 토끼고기가 있었다. 모든 재료를 솥단지에 넣고 우유와 함께 끓이자,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자, 특제 감자 스튜입니다!”
머지않아 요리를 마친 이릴이 솥단지를 식탁 위에 내려 놓았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바람이 뜨거워진 얼굴을 식혀 주고 있었다. 식기를 준비하던 그녀가 손뼉을 쳤다.
“앗, 내 정신 좀 봐.”
콧노래에 취해서 실수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식탁 위에 두 개의 나무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것, 하나는 로난의 것이었다. 그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는 했다.
멍하니 그릇을 바라보던 이릴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이러네. 참.”
로난이 가출한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다.
매번 이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몸에 밴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언젠가 돌아올 로난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벽난로 옆의 항아리가 작년부로 가득 차는 바람에 지금은 피클을 절이는 유리병을 저금통으로 쓰는 중이었다.
이릴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다들.”
오늘따라 빈 집의 적막이 무거웠다.
네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살던 오두막에 남은 사람은 이제 그녀뿐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자식처럼 기르던 동생은 말도 없이 가출해 버렸다.
불현듯, 로난의 의자를 쓰다듬던 이릴의 앞에 웬 소녀와 아기의 환영이 나타났다.
– 자, 로난! 밥 먹자!
– 키에에엑! 시저!
백발은의 소녀는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는 이유식이 독극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격렬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릴은 두 사람의 정체가 어릴 적의 자신과 동생임을 어렵잖게 깨달았다.
– 앗, 마룡 오르세다! 슈우웅~
– 꺄하하하···응악?!
하지만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곡예 비행하는 드래곤처럼 숟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이던 그녀는 아기의 주의가 팔린 틈을 타서 기어코 한 숟갈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기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이유식을 삼켰고, 소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생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에헤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따끔씩 나타나는 어린 날의 환각이었다.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릴이 축축해진 눈을 비비다 떴을 때, 소녀와 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
이릴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엌에는 빈 의자와 그릇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해일처럼 몰려온 상실감이 그녀를 휩쓸었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윽···아···.”
이대로라면 위험했다. 그녀는 약을 찾는 환자처럼 손을 떨면서 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곱게 접힌 쪽지 한 장이 집혀 나왔다. 쪽지에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 미안하고, 금방 돌아온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아아아···.”
틀림없는 로난의 글씨였다. 호흡이 제 박자를 되찾았다. 이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응. 누나는 괜찮아.”
보름 전에 집 앞에서 발견한 쪽지였다. 지금은 이릴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처럼 우울해질 때마다 쪽지를 꺼내서 읽고 있었다. 이릴은 다시 종이를 예쁘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읊조렸다.
“나는 괜찮아요. 아빠.”
심장이 파랗게 물드는 것 같은 슬픔도 이 쪽지만 있다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거의 포기하고 있던 카인의 생환을 기대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로난이 무사하다면 아빠도 어딘가에 살아 있지 않을까.
“그러까 다들···괜찮아야 해요.”
이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에라도 찾으러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로난이나 아빠가 돌아왔을 때 집이 비어 있으면 안 되니까. 게다가 로난은 이번에는 곧 돌아온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다시 얼굴을 든 그녀가 눈썹을 치켜떴다.
“이크, 다 식겠네.”
그녀는 다급하게 식탁에 앉았다.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철칙이었다. 당장 내일도 일을 나가야 했고, 가족과 다시 만나는 날을 위해서라도 건강을 챙겨야 했다.
재료가 다양해서 그런지 오늘 스튜는 유달리 맛있고 풍족해 보였다.
애써 가족 생각을 떨쳐낸 이릴이 첫 숟갈을 뜨는 순간이었다.
“에라이, 대갈빡을 소 여물통으로도 못 쓸 놈아. 가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까먹냐? 누나는 노란색을 좋아한다니까.”
“멍청한 건 너야 등신아. 노란색은 니미, 내가 어젯밤에 싸갈긴 오줌이 노란색이겠지. 무조건 하얀색. 하얀색이라고. 내 말이 맞죠 꼰대?”
“나는···주황색이었던 것 같다만.”
오두막 밖에서 투닥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부 남자였다. 저속한 말투가 어째서인지 귀에 익었다.
이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인의 말을 들은 로난3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주황색은 진짜 아니다. 치매 걸린 거 아녜요? 어떻게 딸래미가 좋아하는 꽃 색깔도 기억 못해?”
녀석은 본인의 머릿속처럼 새하얀 수선화 다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노란색 수선화와 대비되는 색이었다.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부끄럽구나. 쓸데없이 오래 살아서 그런지 기억에 혼선이 생기는군···그보다, 로난.”
“뭐야, 어느 쪽을 부른 거에요?”
“너 말이다. 슬슬 제대로 불러 주면 안 되겠니? 아무리 그래도 꼰대는 너무하지 않느냐.”
“젠장, 아버지가 입에 안 붙는 걸 어떡하라고요. 저도 노력은 하고 있어요.”
로난3이 시선을 피했다. 그는 아직도 카인이 불편한 눈치였다.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못 보다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카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는지 채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노력하고 있다면 됐다. 나도 솔직히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었거든.”
“그게 무슨 뜻이죠?”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너는 아칼루시아 응접실의 책상에 대변을 누려 하고 있었단다. 나와 닮은 엉덩이를 반쯤 깐 채 말이지.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그때의 충격은 동생에게 칼로 찔렀을 때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단다.”
“이런 젠장,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그 쥐콩만한 난쟁이가 사람의 시간을 우습게 보잖아요. 삼십 분이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분명히 이 자식 같았어도 쌌을 거라고요.”
“난 안 싸 병신아.”
삿대질하는 로난3에게 중지를 쳐들었다. 녀석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침을 뱉고는 다시 누나가 좋아하는 꽃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만에 아칼루시아에서의 용건을 마치고 님버튼에 왔다. 뉘엿뉘엿 저무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누나가 사는 오두막은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니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한테 할 말은 정해 뒀냐?”
“당연하지. 얼마나 열심히 외웠다고.”
로난3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녀석은 내가 아칼루시아의 고급 침대를 만끽하며 자는 내내 누나에게 할 말을 정리해서 외웠다고 자랑했다. 하얀 수선화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런 철저함은 마음에 들었다.
“좋아. 기대하마.”
“걱정 마. 나는 누구랑 다르게 기억력이 뛰어나니까. 너도 들으면 아마 감동의 눈물을 쏟을 거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
“누구세요?”
로난3이 나불거리던 차였다.
갑자기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얀 머리카락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어.”
우리 셋은 동시에 박제가 되어 버렸다.
틀림없는 누나였다. 어느 세상과 마찬가지로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별빛을 닮은 백은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크.”
나는 미리 준비해 온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재회의 순간에 로난이 두 명이면 누나가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정체는 조금 늦게 밝혀도 늦지 않았다.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셋을 쳐다보고 있었다.
“얌마.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참다 못한 내가 로난3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녀석은 나불거리던 것이 무색하게도 눈조차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있었다.
잡놈이 기억력이 뭐 어쩌고 어째?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누나 쪽이었다.
“······로난? 로난이야?”
누나는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걸 지적할 만큼 정신을 챙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갈수록 부자의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었다.
다섯 걸음 내외로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로난3의 입술이 처음으로 떨어졌다.
“나, 나 왔어 누나.”
“로난.”
“누나···그, 이거.”
녀석이 바들거리며 수선화를 내밀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로난3이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거···하얀색 맞지?”
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선화를 받지도 않았다. 그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동생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사라지지 마.”
“응?”
로난3이 갸웃거렸다. 누나는 대답하는 대신 굳은살 배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이건 꿈이다. 현실일 리가 없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바들거리며 팔을 든 누나가 로난3의 얼굴을 매만지려던 차였다.
“이릴.”
“······어?”
카인이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누나가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십수 년 만의 재회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카인이 그녀와 마주보고 섰다.
“보고 싶었다. 네게 너무 큰 죄를 저질렀구나. 나는···”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갑자기 누나가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울면서 웃는 듯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인이 주춤거렸다.
“···왜 그러니?”
“저는 알아요. 닿으면 사라질 거잖아요···제발 다가오지 마세요.”
누나의 목소리가 메어 있었다.
“이, 이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로난이랑 아빠가 동시에 돌아오다니···현실일 리가 없다고요.”
“이릴.”
“즐거운 꿈일수록 깨어났을 때가 괴로워요···외로워서, 텅 빈 집이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랑 일 초라도 더 오래 있어 주세요. 네?”
모든 말이 심장을 찌르는 비수였다.
카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새나왔다.
나는 감히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삶을 살면서 처음으로 이룬 가족을, 그것도 지독한 저주까지 걸고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를 터였다.
“미안하다.”
이윽고 눈을 뜬 카인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이건 꿈 같은 게 아니야.”
“아···.”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카인이 누나를 끌어안았다. 과감해 보였지만 쥐면 바스라지는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맞닿은 자리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누나의 눈이 커졌다.
“들꽃.”
내 눈매가 움찔거렸다. 문득 원래 세상에서 누나가 해 줬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곧잘 가족과 님버튼 주변을 산책하고는 했다. 옆에서는 엄마가 팔짱을 끼고 있었고, 님버튼은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
아직 어린 그녀는 산책이 끝나기 전에 곯아떨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잠들어 버릴 때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업어 줬다고 했다. 누나는 그게 참 좋았다고 했다. 넓은 등과, 옷에서 어렴풋이 배어나는 들꽃 냄새가 참 좋았다며 생글거렸다.
“···아빠?”
누나의 노을색 눈동자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래, 이릴. 나다.”
카인이 끄덕거렸다. 가쁘게 숨을 들이내쉬던 이릴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아빠에요?”
“내가 맞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었어.”
“아빠, 아빠. 아빠···.”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하면서도 강직한 가장이 아닌 혼자 남겨졌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갑자기 얼굴을 든 그녀가 바로 옆에 서 있던 로난3을 잡아당겼다.
“누, 누나?”
“사라지지 마. 제발 사라지지 마세요.”
그리고 두 사람을 끌어안은 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릴의 우려와 달리 카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로난3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 나는 이제···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목소리,체온, 저항 없이 흐르는 눈물까지도.
그들이 보고 만지는 모든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멀찍이 나무 뒤로 걸어간 내가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흠.”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족 상봉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비원은 세 번째 평행세계에 도달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오늘만큼은 평행세계의 존재가 싫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내가, 노을 이글거리는 하늘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이, 보고 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