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1)
2-121. 세계(1)
#121
“웅? 무슨 색 꽃을 제일 좋아하냐고?”
누나가 꽃다발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반질거리는 콧잔등에 꽃잎이 들러붙어 있었다. 노랑색과 하얀색 수선화로 만들어진 다발에서는 달큰한 초여름의 향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적인 재회를 마친 우리는 님버튼의 오두막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비스듬이 스며드는 노을이 부엌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누나가 유별나게 많이 만든 스튜는 네 사람이 먹기에도 양이 충분했다.
로난3이 말했다.
“당연히 하얀색이지? 그럴 수밖에 없어.”
녀석은 삼 년 만의 감자 스튜를 게걸스레 퍼먹고 있었다.
아직도 고집을 못 꺾는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멍청아. 하얀 건 네 머릿속이라니까.”
“이런 씹···후우, 아니다.
로난3이 이를 악물었다. 녀석은 누나의 앞에서만큼은 욕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누나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꽃다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웅, 어렵네에···나는 수선화라면 다 좋아서.”
“그러지 말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하나만? 좋아,나도 할 때는 하는 여자라구. 딱 하나만 정하자면···!”
누나는 의기양양하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침음을 흘리던 그녀가 머리를 쥐어싸맸다.
“으앙, 역시 못 고르겠어!”
인질 두 명 중에서 누구를 죽일 건지 물어봤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간 그녀가 창가의 화분에 수선화 다발을 꽂아 넣었다.
“하얀색도, 노란색도, 주황색도 다 좋아! 게다가 전부 로난이 준 거라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걸! 나 어떡해야 해? 응?”
“그,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무리하지 마.”
나는 다급하게 누나를 달랬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울 것 같아서 나와 로난3은 멍청한 내기를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다.
왜 세 명의 기억이 전부 달랐는지 알 것 같았다. 누나는 그게 무슨 색이든 처음에 선물 받은 수선화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처럼 여겼을 것이다.
불현듯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이런 사람을 두고 집을 나갔던 건가.’
몇 번이고 느꼈던 감정이지만 누나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로난3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갑자기 나를 돌아본 누나가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에헤헤,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
“엉?”
“한 명이 더 있길래 누군가 했거든. 그런데 설마 두 번째 로난이었다니, 기절할 뻔 했다니까? 어디서 왔다고 했었지? 평형세계? 평면세계?”
“평행세계.”
“맞아! 그거!”
누나가 손뼉을 짝 쳤다. 나는 카인 부자의 재회가 끝난 뒤에야 슬쩍 다가와서 정체를 밝혔다.
누나는 대견하게도 기절하지 않고 내 설명을 들어 주었다. 완벽하게 이해한지는 모르겠다만.
“역시 좀 불쾌하지? 갑자기 다 큰 사내놈이 둘로 늘어났으니.”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아. 로난은 어디서 오던 로난인걸. 나를 위해서 편지까지 써 주고···누나는 두 배로 행복해.”
누나는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만큼이나 고왔던 손에는 밭일로 인한 굳은살이 잔뜩 배어 있었다. 두 배가 된 자괴감이 내 심장을 쑤셨다.
“···다행이네. 나도 좋아 누나.”
“응! 맞아, 거기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여전히 님버튼에 사는 걸까?”
“아, 그건 아니야.”
“헉!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나는 우리 마을이 너무 좋은데···!”
“생겼다면 생긴 거겠지. 결혼했거든.”
“겨, 결혼?!”
누나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로난3의 입에서 감자 스튜가 뿜어져 나왔다. 맹렬한 기침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콜록! 커헉! 커허어억!”
“에잇, 더럽게시리.”
“로, 로난! 괜찮아?!”
후다닥 달려간 누나가 녀석에게 물을 건넸다. 식탁 위에 흩뿌려진 스튜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스튜에만 집중하던 카인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건···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그는 숟가락으로 제 그릇을 천천히 휘젓고 있었다.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중이었다.
맞아, 이 사람은 우리 누나의 아버지였지.
“궁금하군. 어떤 개 같은 놈이···아니, 뭐 하는 자길래 감히 내 딸을 데려가는지. 나도 아는 사람이니?”
“알려주면 죽일 생각이죠?”
“그럴 리가. 순수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란다.”
“순 거짓말. 아마 아시기는 할 텐데 누나 앞에서는 말할 수 없어요. 이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뭐,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수컷 중에는 가장 괜찮은 놈이라는 것만 말해 드릴게요.”
실제로 슐리펜은 정말 괜찮은 놈이었다. 사람 됨됨이도 훌륭하고 집안의 재산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오직 누나만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일편단심의 마음이었다.
‘마주치기만 하면 이번 세상에서도 이어지겠지. 아마도.’
애초에 그 자식 말고는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거대한 저울에 누나와 세상을 올리게 된다면 슐리펜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누나를 택할 터였다. 충격에 빠진 카인이 벙쪄 버렸다.
“꺅! 내, 내가 정말 결혼을 했다고? 나 같은 못난이를 데려가는 사람이 있어?”
누나가 양 손으로 뺨을 감쌌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은 조금 과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은 카인 부자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었다.
카인이 말했다.
“···따라와라. 평행세계에서 온 아들만.”
“예?”
“조금만 더 해후를 나누고 싶었는데 속이 터져서 안 되겠다. 바로 수업에 들어가자꾸나.”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식탁에서 일어난 카인이 오두막을 나섰다. 로난3은 여전히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화상을 입은 목을 부여잡은 채 기침하고 있었다.
“아, 좋구나.”
카인이 웃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와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인근의 언덕 정상에서 님버튼의 정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참 아름답지 않느냐. 이거야말로 내가 통조림 신세로 지내던 동안 가장 보고 싶던 풍경이었다.”
“엉. 나도 좋다 생각해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여기는 내가 원래 세상에서 아버지를 묻은 자리기도 했다. 마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언덕은 몇 없었다. 절정으로 치닫은 석양이 님버튼을 불사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저물기 싫나 보네···.”
아데샨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내 오러의 영감이자 원천이 된 풍경이었다.
이만큼 강렬한 노을은 오랜만이었다. 저무는 해는 붉다 못해 약간 보랏빛을 띠는 색채로 이글거리며 세상의 빛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카인이 갸웃거렸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별 거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 기분이 좀 나아지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시끄럽다. 겨우 잊었는데.”
카인이 혀를 찼다. 나를 닮은 얼굴에는 아직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평행세계의 이야기라도 딸의 결혼은 중대한 문제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형편없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릴을 데려가려면 이 카인의 시험을 통과해야 할 게야. 아주 가혹하고 무자비한 시험을 말이다.”
“무섭기도 해라···그런데 뭐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랬었지. 갑자기 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낸 탓이잖느냐.”
카인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조금 더 놀려먹고 싶었지만 특별히 여기서 끝내주기로 했다.
내가 말했다.
“다른 아들은 안 데려와요? 뭔지는 몰라도 같이 배우는 게 좋지 않나.”
“아직 때가 안 됐기 때문이지. 그 애송이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해. 근시일 내에 저주를 푼다 해도, 녀석이 지금 내가 가르쳐주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십 년은 족히 더 걸릴 거다. ”
“빌어먹을, 십 년이나요?”
“그래. 더 걸릴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을에서 시선을 뗀 카인이 나와 마주보았다. 눈동자에 차 있던 애틋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검객의 냉철함만이 남아 번득이고 있었다.
“세계.”
카인이 말했다.
“아카샤라는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서 네가 당도해야 할 경지다.”
“···세계요?”
“그래. 내가 멋대로 지은 이름이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은 그 경지를 세계라 부를 거다. 새로운 것의 명명권은 창시자에게 있는 법이니까. 설마 나 다음으로 세계를 구현한 자가 그런 악당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도대체 그게 뭐 하는 기술이죠?”
“지금부터 설명할 거란다. 나도 너도 학구파는 아니니까 최대한 간단하게 하마.”
카인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아벨에게서 빼앗은 장검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그는 허공에서 검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는 오러의 마지막 경지이자 지금까지 밝혀진 마나 활용의 한계점이다. 기본적으로 오러가 사용자의 심상을 뿌리 삼아 발현하는 기술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기본이죠. 체내에 축적된 자연의 마나에 고유의 심상을 뒤섞어서 만드는 거잖아요.”
“그래. 잘 아는구나. 사실 오러만 쓸 줄 알아도 그 사람은 강자 취급을 받지. 아무리 작더라도 속내를 꺼내놓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 하지만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검의 회전이 멎었다.
“세계란, 네 심상의 세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공간의 개념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상황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을 네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지. 너는 그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대부분 해낼 수 있다. 세계를 벼락으로 바꾸어서 날린다거나,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거나···애초에 모든 것이 너로 이루어진 세상이니까.”
“사실상 신 같은 거네요. 쉽지 않네.”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무저갱의 위력도 이제야 납득이 갔다. 아카샤의 마법을 베어낼 수 없던 것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적보다 놈의 수준이 한 차원 더 높아서였다.
카인이 주억거렸다.
“신이라···확실히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아카샤는 이미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거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구나. 어쩌면 나보다 경지가 높을 수도 있어. 참으로 곤란한 적을 만들었구나 로난.”
나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카인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로난. 솔직히 네 기술은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다. 정교함만 놓고 따지자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야.”
“말이 심하시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네가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이유는 그냥 너라는 사람 자체가 강하기 때문이야.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찍어 누르는 것이 네 방식이다.”
“···그거 좋은 거에요?”
“당연하지. 나 역시 그게 가장 좋다 생각한다. 번잡한 기술을 사용할 필요 없이 상대보다 빠르고 날카롭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영원히 남는 업적을 이룩하는 것은 언제나 찰나를 지배했던 자들이지. 나보다 훨씬 강한 너는 이미 찰나를 지배하는 검사다.”
갑작스러운 극찬에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자신감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영 어색했다.
허나 카인은 칭찬을 위해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는 다르다. 단지 힘만 강하다고 파훼할 수 없어. 남의 세계를 부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사람 뿐이다.”
“제가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장담은 할 수 없다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지. 이론은 충분히 말한 것 같으니 지금부터 실전으로 넘어가겠다.”
카인은 칼자루를 두 손으로 옮겨 쥐었다. 어느새 검신을 타고 하얀 광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봤던 카인 고유의 마나였지만 무언가 결이 달랐다.
검례하듯 장검을 수직으로 세운 카인이 낮게 읊조렸다.
“잘 봐라. 이것이 내 세계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빛무리가 일대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