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3)
2-123. 세계(3)
#123
새벽 공기가 어스름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님버튼은 검푸른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바쁜 걸음을 옮기던 이릴이 입가에 손을 말아 댄 채 외쳤다.
“로난! 아빠!”
“로···! 아빠···!”
메아리가 구릉을 타고 퍼져 나갔다. 제법 멀리까지 들릴 크기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릴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고였다.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요.”
이건 너무했다. 재회를 나눈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벌서부터 꿈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원래 세상의 동생마저 사라졌더라면 진즉에 기절했을 터였다.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은 이릴이 다시 한 번 목놓아 외쳤다.
“로나아안! 아빠아아-!!”
“이런 빌어먹을 것들, 밥 처먹다 말고 도대체 어디로 튄 거야?!”
옆에 있던 로난3이 으르렁거렸다.
누나의 앞에서는 욕을 안 하는 것이 철칙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릴과 함께 수색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잡히기만 해 봐라. 내가 아주 그냥 요절을 내 줄 테니까.”
“로, 로난···어떡하지? 또 아빠가 사라지면, 나는···흐윽, 나는.”
“괘, 괜찮을 거야 누나. 잠깐 어디 간 거겠지.”
로난3이 허둥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진 이릴은 금이 간 유리잔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호흡은 가쁘고, 눈물은 저항 없이 흘러내린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자신의 마음을 찢어 놓는 것 같았다. 입술을 질겅이던 로난3이 누나를 끌어안았다.
“무조건 괜찮아. 내가 찾아 올게.”
“으흑, 응···.”
“옳지. 그러니까 그만 울자. 응?”
“응. 으응. 알았어···나 안 울어.”
이릴이 끄덕거렸다. 로난3은 그녀의 호흡이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세월의 흐름이 실감됐다. 코흘리개 무렵에는 누나가 그렇게 커 보였는데, 이제 정수리에 턱이 얹어질 만큼 작아진 채였다.
“망할.”
로난3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세상이 무너져도 두 사람을 찾아야 했다.
수색이 재개되었다. 벌써 날이 샐 때가 되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동쪽 하늘이 붉어오고 있었다. 분주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차였다.
“뭐야 저거.”
로난3이 눈매를 좁혔다. 무정형의 덩어리 하나가 언덕 꼭대기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 종종 낮잠을 청하던, 아름드리 참나무의 그림자가 자신의 발치까지 늘어져 있었다.
“누나. 저거 봐.”
“······응?”
훌쩍거리던 이릴이 고개를 들었다. 빛나는 덩어리는 이릴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잔잔히 빛나는 백색광 속에, 불씨처럼 작고 붉은 빛무리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도깨비불?”
“한번 가보자···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이한 도깨비불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남매는 손을 꼭 맞잡은 채,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헉···허어억···! 커억!”
“축하한다. 로난.”
카인이 웃었다. 원시의 밤바다는 입자가 되어 바스라지고 있었다. 찬란했던 별빛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인이 펼친 세계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검을 내리고, 땀으로 절여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저···후우, 해낸 거에요?”
“필수적인 지점까지는. 너는 타인의 세계를 부술 수 있을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 말한 카인이 수평선을 가리켰다.
노을색 직선이 바다와 별하늘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이는 수 미터에 그쳤고, 카인이 보여줬던 별빛 모아 슈퍼 베기(내가 지었다)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카인의 세계는 틀림없이 그 선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었다.
미진하게나마 펼친 세계를 참격으로 가공해서 휘두른 흔적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훌륭해. 이 정도라면 그 아카샤라는 놈의 세계도 어찌어찌 탈출할 수 있을 거다. 세계만 제외하면 네가 유리하다고 했지?”
“아마도요. 워낙에 많이 패 놔서.”
“그렇다면 서둘러 승부를 보는 게 관건이구나. 흐음···.”
카인이 턱을 매만졌다. 그의 얼굴은 나와 마찬가지로 땀에 절어 있었다. 내 마나가 고갈될 때마다 셀프 포션이 되어 보충시켜 준 탓이었다.
무너지는 밤바다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덕이에요.”
“고맙기는. 전부 네가 잘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기본적인 재능과 먼젓번의 두 평행 세계에서 쌓아올린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게야. 너는 내 수천 년을 고작 몇 시간만에 따라잡은 거란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겠죠?”
“당연하지. 어디까지나 네 세계는 무저갱을 부수는 일격으로만 쓰여야 한다. 무저갱을 파훼한 뒤에는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계가 완전해지지 않았음에도 수련을 마친 것은 우리 둘의 마나가 고갈됐을 뿐더러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실전이 필요해. 물론 이번에 배운 걸로 결판이 나면 가장 좋겠지만···.’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나는 결국 세계를 넓게 펼치는 건 실패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반경 십 미터 정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세계를 무기로 가공하는 점에 집중해서 수련을 하는 게 어떻냐고 먼저 카인에게 제안을 했다.
솔직히 잔머리를 굴린 것이었는데, 카인의 마음에는 썩 들었던 것 같다.
– 오호. 그런 방법도 있었군.
– 예?
카인은 천재적인 발상이라는 칭찬과 함께 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주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심상을 모으는 것이 넓게 펼치는 것보다는 쉬웠다. 그 덕에 나는 간신히 카인이 펼친 세계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일격을 체득할 수 있었다.
이제 밤바다의 풍경은 절반 정도가 지워진 채였다.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카인이 실소를 터트렸다.
“···로난. 너는 역시 카샤보다 나를 더 많이 닮았다.”
“카샤라면···.”
“네 엄마 말이다. 하여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한 카샤의 유전자는 전부 이릴에게 간 모양이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더 닮았더라면 지금처럼 인생이 꼬이지는 않았을 게야. 얼굴도 꽃처럼 아름다워서 여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겠지.”
“어째 욕처럼 들리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란다. 지금이야 고상한 척을 하고 있다만 소싯적의 나는 고집불통에, 입은 거칠고, 하여튼 내 잘난 맛에 살았지. 사랑받기에는 글러먹은 성격이랄까···너와 보내는 매 순간마다 나는 전율적인 기시감을 느낀단다.”
“음.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어머니마저 카인과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나는 님버튼에 사는 내내 누나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자랐을 터였다. 천사표 유전자가 사라진 누나에게. 내 힘을 아득히 상회하는 별의 딸의 주먹으로. 으, 상상도 하기 싫군.
카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네가 좋다. 어찌됐건 네가 영웅이 된 것은 나를 닮았기 때문이니까. 영웅은 기본적으로 오지랖이 넓고 성격이 지랄 맞은 면이 있어야 하거든. 이릴을 봐라, 솔직히 재능만 놓고 보면 절대로 네게 밀리지 않지만 저리도 얌전하게 살지 않느냐.”
“하긴 누나가 제 자리에 있는 건 상상이 안 가네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그 말대로다. 하지만 성격이 개차반이고 실력이 뛰어나다 해서 모두가 영웅이 되는 건 아니야. 나는 결국 실패했고, 너는 성공한 영웅이 되었지. 작은 차이점 하나가 너와 나의 운명을 갈랐다. 그게 뭔지 아느냐?”
“글쎄요.”
“네가 조금이나마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란다. 이 아름다운 흑발을 제외하고도 말이지···너는 카샤처럼 진심으로 남을 대할 줄 알았고, 그렇기에 배신당하지 않았다.”
갑자기 카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땀으로 뒤엉켜서 지저분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남을 이해하고자 했기에 너는 나보다 강한 거란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아버지?”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 이릴이 기다릴 테니 슬슬 돌아가자꾸나.”
카인이 웃었다. 노을색 검흔을 중심으로 넓어지던 균열이 단번에 시야를 뒤덮었다.
그의 세계에 들어왔을 때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
빛이 사그라졌다. 눈을 떴다. 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아름드리 참나무가 등 뒤에 솟아 있었다. 언덕 아래로 정겨운 고향의 풍경이 펼쳐 있었다.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님버튼은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동쪽 하늘 저편에서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밝아오는 해를 보며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두세 시간이 지난 줄 알았는데 하룻밤을 꼬박 지샌 모양이었다. 물론 얻은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
카인은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무리 멘트가 죽기 전에 남기는 말 같아서 살짝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제자리에 있었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돌아가죠.”
“그래.”
카인이 웃었다. 우리가 사이좋게 언덕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무 뒤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로난3이었다. 내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이었다.
“야! 이 개자식아!”
“윽.”
갑자기 날아든 주먹이 안면에 꽂혔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고개가 확 젖혀졌다.
뺨을 어루만지던 내가 큭큭거리며 놈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미쳤군. 발가벗은 채로 님버튼을 돌고 싶었나 보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녀석은 그 말과 함께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로난3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땅에 처박았다.
콰작! 맷돌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눈이 뒤집혔다.
“커억···!”
“미친 새끼가. 이상한 버섯이라도 잡쉈나.”
갑자기 왜 지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상 외의 전개에 당황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앙 어디에 갔던 거에요! 얼마나,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요?”
“이, 이릴···그러니까 이건 말이다···.”
“다시는 말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했으면서···! 이 거짓말쟁이!”
누나가 카인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죄어드는 힘이 상당한지 카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마를 쳤다. 잠깐의 외출이라 칭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버렸던 것이다.
“오. 시발.”
뒤늦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로난3은 내 발밑에서 거품을 문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누나는 이쪽을 안 보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나는 녀석을 들어서 참나무에 기대 앉혀 놓았다.
입가의 거품까지 닦으니, 영락없는 수색을 하다 지쳐서 선잠을 자는 모습이 되었다.
“나를 용서해라. 나여.”
“이런 개···같은···그르륵.”
로난3이 의식을 잃었다.
카인은 가쁜 숨을 내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허윽, 미안하다. 이 아비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말거라. 응?”
“알았어요. 응, 안 울어요···그런데 이건 못 놔 줘요.”
“허허···어허허···.”
카인이 고통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슬슬 위험할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감히 개입할 수 없었다. 솔직히 우리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불현듯, 언덕 위에 환한 빛이 드리웠다.
“엉?”
“이건···.”
우리 세 사람(미안하다. 로난3)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능선에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던 불덩이가 서서히 머리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카인이 누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억···저걸 봐라 이릴···후욱, 참 아름답구나!”
“와아아···!”
누나가 감탄했다. 가까스로 질식 상태를 벗어난 카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장관이었다. 구름이 없어서 세상에 일어나는 변화를 오롯이 볼 수 있었다.
해의 모습이 온전해질수록 세상이 제 색채를 되찾고 있었다. 얼핏 보면 노을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노을은 세상의 빛을 빼앗아가지만 일출은 빛을 나누어 준다. 한기를 밀어내고 온기를 가져온다. 잠을 재우는 대신 잠에서 깨우고, 자신 속에서 노니는 이들에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준다.
“일출···.”
넋을 놓고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어느새 능선 너머로 떠오른 해가 가족의 얼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별안간 어떤 발상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있죠.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저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아요.”
“으음?”
카인이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다.
당연하다. 나도 갑자기 떠오른, 지금 보고 있는 일출처럼 번득이는 아이디어였으니까.
“그게 뭐지? 세계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니?”
“아뇨. 그건 아니고···.”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아카샤의 불알을 움켜쥘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