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4)
2-124. 아카샤(1)
#124
카인은 불알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벙쪄 버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입을 뗐다.
“···단어를 고르는 실력이 남다르구나. 천박하기도 하지.”
“유전이잖아요. 그러려니 넘어가죠.”
“네가 어떻게 불···아니, 그걸 움켜쥘 수 있다는 게냐?”
누나 앞이라 말을 조심하는 티가 났다.
다행히도 누나는 일출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우리의 대화를 못 듣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춘 채 대답했다.
“일출을 보고 깨달았어요. 일출은 노을과 달리 세상에 생명을 뿌리죠. 아카샤는 생명을 찾아 헤매고 있고요. 저는 그 생명을 먼저 손에 넣을 수 있어요.”
“잠깐.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좀 난잡했죠?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내가 생각해도 설명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십 초 정도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저는 두 번의 평행세계를 거쳤어요. 아카샤가 만들어낸 균열을 파괴하고, 종국에는 아카샤를 척살하는게 제 목표였죠. 그렇다면 아카샤의 목표는 뭘까요?”
“네가 온 세상의 미래를 파괴하는 것 아니었느냐.”
“맞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죠. 다만 녀석의 최종 목표가 뭐든 간에, 달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모든 평행세계에서 녀석은 ‘그것’을 찾아서 온갖 지랄을 떨었어요.”
“그게 뭐지?”
“각 평행세계의 세니엘. 제가 먼젓번에 언급했던 생명이죠. 세니엘이 뭔지는 예전에 설명했었는데, 기억나요?”
카인의 눈이 커졌다. 포근한 아침햇살이 본격적으로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를 마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힘이 깃든 돌덩이라 하지 않았느냐? 거인의 선왕을 격추시켰다는···.”
“네. 어찌보면 우리 부자의 운명을 기구하게 만든 원흉이죠. 세니엘이 대머리 선왕을 잡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고아가 되지도 않았을 거고, 높은 확률로 어젯밤 보여줬던 마을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었을 거에요. 물론 우리 별도 그때 망해버렸을 테지만.”
“그래···그 말대로다. 허면 아카샤는 세니엘을 어디에 쓰려는 거지?”
“연료겠죠. 힘을 채워줄 연료. 아까도 말했지만 그 힘으로 뭘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당연히 몸을 낫게 하거나 미래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애매해요. 저도 기억을 되짚다가 깨달은 건데, 녀석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생명력을 치유에만 쓰지 않았어요. 만약 자신의 몸을 수복하는 데만 전념했다면 그까짓 부상 따위는 진작 나아 버렸겠죠. 아, 잘린 팔다리까지 붙을지는 모르겠네.”
세니엘이 품은 생명력은 말 그대로 죽은 별을 살릴 수 있는 수준이이었다. 아카샤의 부상을 가늠했을 때 녀석이 치유에 투자한 비율은 흡수한 생명력의 1할에도 못 미칠 터였다. 나머지 9할은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꼬불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미래를 망가뜨리는 것이 목적이라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적이 너무 많아요. 다만 그게 뭐든 간에 엄청난 힘을 요구로 하는 일이라는 건 예측할 수 있어요. 녀석은 지금껏 만난 모든 세니엘에게서 힘을 흡수했으니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먼저 첫 번째 평행세계.
거인에게 지배당한 적백의 세상에서 아카샤는 세니엘을 공중으로 띄우고 박살내 버렸다.
세니엘이 품고 있던 생명력으로 인해 망가졌던 별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녀석은 그에 상응할 만큼 엄청난 양의 생명력을 흡수해 버렸다.
두 번째 평행세계도 결은 같았다.
아카샤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세니엘을 찾아갔다. 어째서인지 첫 번째 세상과 숨겨져 있던 위치가 달랐지만 기어코 놈은 세니엘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놈은 나와 일행에게 저지당하기 직전까지 세니엘을 끔찍한 쇠사슬로 동여맨 채 생명력을 쭉쭉 흡수했다.
내가 아카샤의 목적에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두 번째 세상이었다.
‘거인은 전부 눈속임이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돌이켜 보면 대머리들은 언제나 시간을 끄는 역할이었다.
밀림에서 빛의 기둥을 터트렸을 때도, 창백한 성의 하늘을 찢어발겼을 때도 아카샤는 거인과 함께 싸우지 않았다. 잠깐 같이 노는 느낌으로 우리를 상대한 뒤 곧바로 세니엘을 찾아서 떠나 버렸다.
당장 이번 세상만 봐도 그렇다. 아카샤는 거인들에게 미래 세계를 침공하게 유도하던가 근원을 빼돌리지 않았다. 놈들은 사흘에 걸쳐서 나를 막아내다가 근원이 파괴당해 절멸했다.
왜 그랬을까?
만약 미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게 아카샤의 목적이었다면 거인을 훨씬 더 체계적으로 운용했을 터였다. 별 어디에서나 차원문을 열고 강림할 수 있는 거인들은 누가 뭐래도 위협적인 병기였으니까.
“씨발···.”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세 차원의 거인들을 미끼로 던져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뭘까?
별의 영혼을 연료 삼아서 이뤄야 할 만큼 대단한 야망이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미래를 파괴하기 위해서일까? 정말로?
“후우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카인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거나 요지는 이거에요. 아카샤는 목적 달성을 위해 세니엘이 필요해요. 하지만 녀석에게는 세니엘을 확실하게 찾아낼 방법이 없죠.”
“확실한 게냐.”
“네.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어요. 매 평행세계마다 세니엘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세상을 아주 갈아 엎어놓은 게 그 증거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설마?”
“예상하신 대로에요. 저는 세니엘을 찾을 수 있어요. 그게 어디에 있건 간에.”
나는 목에 걸린 구슬을 들어 보였다.
아칼루시아 모녀가 만들어준 희대의 발명품인 마나 추적자였다. 석양과 일출이 그러하듯 이 발명품 역시 혈계침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대상을 추적하기 위해 혈액 대신 마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 말인즉슨, 대상이 마나만 보유하고 있다면 무생물이라도 상관 없다는 것이었다.
“좋아. 잘 있군.”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작은 파편이 잡혀 나왔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광물 다면체는 일출을 받아 황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건···.”
“맞아요. 세니엘의 파편이죠.”
표면 위로 이글거리는 생명력이 대기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저번 평행세계 세니엘의 기운까지 흡수해서 더욱 생명력의 농도가 짙어진 채였다.
나는 마나 추적자의 버튼을 눌렀다. 아카샤의 마나가 비워진 자리에 세니엘의 마나가 들어찼다. 제자리에 맴돌고 있던 바늘이 한 방향에 고정되었다.
“역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니엘의 위치를 먼저 확보한 것은 나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아카샤가 이미 세니엘을 찾았더라면 그토록 싸돌아다니지 않았을 테니까.
‘진작에 찾아서 생명력을 흡수했겠지. 모기처럼.’
아카샤를 지정했던 마나 추적자는 십 분에 한 번 꼴로 방향을 바꾸거나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놈이 차원까지 바꿔 가면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모르는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물론 저번 세상에서 입은 치명상도 고쳐야 할 것이다.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게릴라성 승부를 벌이는 것이 부상의 심각성을 방증하고 있었다. 아카샤는 아직 저번 평행세계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
서론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안주머니에 파편을 쑤셔 넣은 내가 카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먼저 칠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였군. 불알을 움켜쥔다는 것이.”
“네. 제가 세니엘을 먼저 확보하면 녀석은 올 수밖에 없겠죠. 매번 그 새끼한테 당하기만 했는데, 마지막에는 한 방 먹여 줘야 하지 않겠어요?”
클클거리며 엄지를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카샤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평행세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능력과 도피처로 삼을 세상이 놈에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카샤는 다른 세 개의 평행세계, 도피처를 잃었다.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잘린 다리와 팔은 붙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이 마지막으로 입은 부상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예상하건데 한 번 빼돌린 생명력은 다시 치료용으로 못 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함정 같은 구차한 수단을 쓰지 않고 몸소 나를 죽이러 왔을 터였다.
“녀석은 상처 입은 호랑이에요. 여느 때보다 난폭하지만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냥을 완수하는 것은 제 역할이에요.”
“잠깐. 설마 혼자서 아카샤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그래야만 해요. 아버지, 지금 세상은 이대로 너무 완벽해요.”
나는 그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은 완연한 아침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기지개를 켜는 님버튼에서 수탉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코오···코오오···.”
누나는 졸음을 못 이기고 카인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기절했던 로난3도 이제는 침을 뚝뚝 흘려가며 단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카인과 누나가 그토록 염원하던 온전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저는 이 완벽함이 흐트러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회귀하기 전의 인생까지 합치면 무려 다섯 번의 세상을 유랑한 끝에 찾아낸 완벽이에요.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저를 도우러 왔다가 잘못됐다가는 저는 충격으로 바지에 똥을 싸 버릴 거에요. 아버지도 아들이 똥싸개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죠?”
“그, 그야 그렇다만.”
“진짜로 괜찮아요. 이 세상에서 완벽에 속하지 않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인 저 한 명 뿐이에요. 아카샤 그 씨발놈이랑.”
“···로난.”
“그러니까, 아버지는 친구들과 함께 완벽해진 세상을 지켜 주세요. 왜, 나바르도제 누님이나 아드리안 누님, 갱생한 아벨 같은 인재면 쓸만하잖아요?”
진심이었다. 만약에라도 아카샤가 헛짓거리를 못 하도록 세상을 지킬 인원이 필요했다. 카인과 그의 인맥은 완벽한 적임자였다.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가 볼게요. 이것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알죠?”
“······어이가 없군.”
카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실소했다.
저 표정까지 유전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 알았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아카샤를 물리쳐도 작별인사 정도는 하러 오겠지?”
“가능하면요.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는게 아니라 이 완벽을 지켜 줘야 한다니까요.”
“그건 걱정 마라. 나는 구원자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초대 교주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오래 산 인간이지. 반드시 지켜 주마.”
“여기까지 들으면 영 못 미더운데. 조금 더 신뢰를 줄 수 있는 소개가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아.”
카인이 눈썹을 치켜떴다. 뒤늦게 내 말뜻을 깨달은 것 같았다.
입술을 질겅이던 그가 다시 입을 뗐다.
“···그래. 나는 카샤의 남편이고, 아벨의 형이지. 결정적으로 이릴과 로난의 아버지다. 이번에는 꼭 자식과 한 약속을 어길 정도로 글러먹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
“자식 앞에 ‘버리고 떠나간’ 도 붙여 주세요. ‘악독한 저주를 손수 걸었던’ 도 좋고.”
“까불고 있구나. 역시 너는 내 자식이다.”
“그럼 누구 아들이겠어요.”
카인이 내 손을 맞잡았다. 내 손바닥 못지않게 굳은살이 두터웠다.
악수를 마친 그가 나를 포옹했다.
“끝내고 돌아오거라. 모든 것을.”
나는 대답하는 대신 씩 웃어 보였다.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나 추적자가 가리키는 목적지는 금새 알게 되었다.
성지 다 코냐.
과거에 사란테에 의해 언급됐던,
세니엘의 신상이 만들어지는, 대륙에서 가장 해묵은 성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