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5)
2-125. 아카샤(2)
#125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수억 개의 빗방울은 하나하나가 세상을 종방향으로 베어가르는 참격이었다. 빗물로 난도질 당한 시야는 다섯 걸음 앞의 바위도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된 채였다. 먹구름 자욱한 하늘은 지금이 낮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의 빛만 제공해 주고 있었다.
“날씨 한 번 지랄 맞네요. 사란테.”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공간을 살짝 꼬아 만든 우산이 머리 위를 가려 주고 있었다. 확실히 마법이 좋긴 좋다. 이게 없었더라면 도착하자마자 속옷의 섬유 한 올까지 방금 빤 걸레처럼 축축해졌을 터였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산 바깥으로는 장대한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지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절벽에서 해묵은 세월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빗물이 급류가 되어 휘몰아치는 소리, 폭풍의 우짖음이 어디라 할 것 없는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는 대륙 변방의 성지 다 코냐.
세니엘의 기척을 감지한 마나 추적자가 나를 인도한 장소였다.
바로 옆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크라티르.”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그보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크라티르가 외쳤다.
요란한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악을 써야 했다. 얼굴이 온통 시뻘개진 것이 꼭 교미하는 두꺼비 같았다. 원래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뒤늦게 말뜻을 알아들은 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신세를 졌네요! 무슨 일 생기기 전에 돌아가세요!”
“신세랄 것 까지도 없습니다만! 걱정이 됩니다!”
“뭐라고요?”
“걱정이 된다고 말했습니···커헉!”
크라티르의 몸이 들썩였다.
역시 백 살 가까운 영감님이 내기에는 지나치게 볼륨이 높았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쿨럭거리던 크라티르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딱!
투명한 반구가 우리를 둘러쌌다. 빗소리가 사라졌다.
크라티르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생각해 보니 그냥 사일런트 마법을 쓰면 되는 일이었군요.”
“아.”
나도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아카샤에 심취해 있어서 잠깐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 무안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정말 걱정할 것 없어요. 별 일도 아니고 금방 돌아갈 거니까.”
“하지만 여기는 심상치 않습니다. 단순히 날씨가 나쁜 게 문제가 아니라, 계곡 전체에 기이한 느낌이 도사리고 있어요. 다 코냐는 스승님께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지명이라며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거 노친네 촉도 좋지.”
“예?”
“아니에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요.”
헛웃음이 나왔다. 마법사의 직감이라는게 정말 있는 듯했다.
내가 여기까지 편하게 올 수 있던 것은 크라티르와 더불어 로르혼의 덕이 컸다.
오늘 아침. 시간도 없고, 대책없는 여행에 질린 나는 공간 마법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로르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전에 네뷸라 클라지에의 범죄자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넘겨받게 해 줬으니 명분은 차고 넘쳤다.
‘인수인계는 잘 됐나 모르겠군.’
그렇게 마법사 우편을 보내고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놀랍게도 전서구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인 크라바 크라티르였다.
스승의 지시를 받은 그는 기꺼이 나를 위한 마차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우리는 짧고 긴 공간 마법을 수십 번씩 반복하며 다 코냐에 왔다. 제국령에서 한참 벗어난 객지에 있었음에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로난 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신세 많이 졌어요.”
“별말씀을요. 참고로 일전에 인수인계해준 죄수들은 대부분 심문과 교화를 위해 로돌란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교주 아벨은 원활한 소통을 위해 황궁의 지하감옥에 있고요. 물어보는 대로 답변을 술술 해서 이제 남은 질문도 별로 없다 들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부서졌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본 아벨은 카인을 등에 태운 채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자갈밭에 머리를 박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는 묘한 즐거움이 드리워 있었으니까.
“참, 판타시온이라는 웨어디어는 못 찾았어요?”
“아아···그 자이파 님에 버금가는 거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벨이 수감된 다음날 새벽에 황궁에 무단 침입을 했거든요.”
“뭐야, 구출 시도였나요?”
“놀랍게도 자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총출동한 제국 기사단이 무안해할 정도로 고분고분했지요. 본인의 간곡한 청원과 황제 폐하의 자비 덕에 아벨의 옆 호실에 수감되었습니다.”
“후우, 다행이네요. 싸웠으면 피 좀 봤을 텐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벨에게 설득됐는지, 본인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는 모르겠다만 판타시온이 날뛰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슴은 날고 기는 대주교 중에서도 제일 강했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싸울 수 있겠군.’
아벨과 대주교들의 근황을 듣자 마음이 좀 놓였다.
솔직히 결전을 앞두고 내심 신경이 쓰였으니.
황제 아저씨가 사형을 언도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가급적 정신을 차리고 세상에 기여를 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악수를 주고받은 크라티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건투를 빕니다 로난 님. 그게 무엇이든 목적을 달성하시길.”
“필레온을 잘 부탁해요. 내년 봄에 괴물 신입생 한 명이 들어갈 테니까.”
차원문이 열리고 닫혔다. 크라티르가 사라지자 공간 마법으로 만들어낸 우산과 사일런트 마법도 자연스레 소멸했다.
콰아아아아아!
정체되어 있던 빗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우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굵직한 폭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예상대로 모든 옷이 젖기까지는 2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물풀처럼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럼 찾아보실까.”
나는 즉시 세니엘 수색 작업에 나섰다. 목적지는 바늘이 가리키는 계곡 안쪽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못생긴 돌덩이들이 눈에 밟혔다. 사람보다 훨씬 큰 기암괴석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바람에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완전히 돌았군. 저걸 짊어지고 바이디안 산맥까지 갔다고?”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사란테가 말했던 세니엘의 신상 후보들이었다. 수천 년을 저렇게 내버려 두고 버티는 돌덩이만 신상이 될 수 있었다.
처음 사란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귀가 길쭉한 만큼 안쪽으로 자라서 뇌가 망가진 줄 알았다. 지금에야 세니엘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기에 존중하지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흠.”
나는 지독하리만치 못생긴 돌덩이 앞에 멈춰섰다.
탁 트인 평지에 솟아 있어서 비를 오롯이 다 처맞고 있었다. 저번 평행세계와는 생김새가 달랐지만 바늘은 틀림없이 이 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주머니에서는 세니엘의 파편이 공명하듯 잔광을 흘리고 있었다.
표면에 손바닥을 올려 본 내가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세니엘이 확실했다. 내부에서 맥동하는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어도 주변에 솔솔 자라난 풀떼기가 빼도박도 못할 증거였다.
위치가 지난 두 평행세계에서 본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실상 신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데 까짓꺼 움직일 수도 있지.
“멱이라도 감으려 나왔수?”
나는 그 말과 함께 칼을 휘둘렀다.
세니엘의 상단부에 하얀 선이 그어졌다. 윗부분이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보석 광산처럼 찬란한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 별의 영혼인데,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정도도 용인하지 못하면 별의 영혼 노릇을 어떻게 하겠는가.
뿌리듯이 휘두른 검을 납도하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륵···!
들끓는 소리와 함께 세니엘에서 생명력이 터져 나왔다. 잘린 목에서 솟구치는 피 같았다. 울걱거리며 분출되는 오색 기운은 맥주거품처럼 바위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이윽고 기체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까지는 좋아.”
오색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세니엘의 생명력은 봉화처럼 높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센 폭풍 속에서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 기괴했다.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볼 수 있을 터였다.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세니엘을 찾아 헤매는 마법사라면 말할 것도 없다.
‘준비는 끝났다.’
안주머니의 파편은 흘러넘친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좋은 일이다. 음식을 남기는 건 나쁜 짓이니까.
연기는 이제 먹구름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나는 눈을 감았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적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를 육안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이럴 때는 눈을 감는 것이 낫다. 시각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니까.
피부 위에서 부서지는 물방울이 선명하다. 한 맺힌 바람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시취에 버금갈 만큼 자극적으로 변한 젖은 돌과 빗물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이제 끝을 내자.”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다.
아칼루시아의 어둠을 걷어냈다. 불알친구의 팔자를 펴 주었다. 흩어졌던 가족을 결합시키고, 원래 세상에서조차 실현되지 않은 카인의 숙원을 이루어 주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 평행세계도 구원받은 자들이 이끌어갈 것이다.
세계의 순리에 방해되는 것은 오직 두 명.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들 뿐.
“와라. 아카샤.”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먹잇감을 노리고 강하하는 독수리처럼.
언제나 생명을 갈망하던 네놈처럼.
채찍 같은 빗줄기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속으로 백다섯을 셌을 즈음, 천천히 눈을 떴다.
아카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굉장히 가까웠다. 아무리 길게 쳐 봐야 세 걸음을 넘지 않는 거리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공격을 하지 않았다. 수를 가늠하며 탐색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서로를 인정한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녀석도 순식간에 승부가 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오른팔과 왼쪽 다리는 잘린 그대로였다.
“너, 그건?”
다만 상당한 변화가 눈에 띄었다.
녀석의 망토와 가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원상복구되다 못해 오히려 화려해져 있었다.
맨질하던 가면에는 아카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웬 그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부 어디서 한번씩은 본 것이었다. 뇌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림 중 하나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마르야.”
황금으로 만들어진 수레바퀴는 틀림없는 아르말렌 백작 마르야의 문장이었다. 자기가 고안했다며 내게 자랑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야의 성격 상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가문의 문양을 바꿨을 것 같지는 않았다.
로브에는 반짝이는 장신구 네다섯 개가 붙어 있었다. 유달리 시선을 끄는 것은 수수한 에메랄드와 황금색 파편이었다. 나는 저게 원래 어디에 달려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나비로제 누님···자이파?”
에메랄드는 비검 우루사의 폼멜에 박혀 있던 장식이었다. 황금색 파편은 자이파의 언월도 머리 부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세상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별안간 아카샤가 인사를 하듯 왼팔을 흔들어 보였다.
헐렁거리는 소매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이건···.”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납작한 금속 주괴 두 개가 내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각각 백금과 황금을 가공해서 만들어진 주괴에는 드래곤을 밟고 있는 기사와 달을 향해 우짖는 수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랑시아와 아칼루시아의 상징이었다.
“어음패.”
더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일런트 마법을 썼을 때보다 더 조용했다. 심장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준동하고 있었다.
왜 저 물건들이, 원래 세상 사람들의 물건이 아카샤에게 있는가.
정답은 자명했다.
흔들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끝없이 외치던 찰나였다.
『■■. ■■.』
아카샤가 말했다.
뭐라 지껄였는지는 모른다.
‘덤벼 로난’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실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기어코 충동이 이성을 앞질렀다.
“이 씨발새끼가.”
칼자루에 손이 얹어졌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려졌다. 바람이 멎으며 수억 개의 빗방울이 허공에 정지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인생에서 가장 빠른 발도였다. 하얀 선이 아카샤의 가면 위로 그어지려던 차였다. 불쑥 올라온 녀석의 왼손이 참격을 가로막았다.
“너.”
금속음은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를 따라잡을 것이다.
비기가 파훼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뽑아냈다. 칼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순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
몸이 보내는 경고였다. 거의 동시에 아카샤의 손에서 암흑이 터져 나왔다. 사위가 어둠에 물들며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아카샤의 세계인 무저갱이 펼쳐졌다.
『■.』
아카샤가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는 아카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주홍색으로 물든 검신 속에는 조각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갔을 때부터 전개해 놓은 세계였다.
『■■?!』
아카샤의 눈이 커졌다. 두 번째 참격이 혜성처럼 어둠을 가로질렀다.
폭발하는 노을색 빛무리와 함께, 내 세계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