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57)
2-127. 아카샤(4)
#127
아카샤가 균열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쇠사슬에 감긴 주먹이 검의 배면을 강타했다.
“크윽!”
손목이 저릿거리는 충격과 함께 몸이 밀려났다. 뼈다귀만 있는 주제에 제법 주먹이 매웠다.
아카샤의 마나로 벼려진 쇠사슬 수십 가닥이 그의 소매와 망토 아래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
갑자기 녀석이 손가락을 뻗었다.
두꺼운 쇠사슬 두 가닥이 날아와 내 허리를 휘감았다. 잡아당겨지는 감각과 함께 아카샤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주문쟁이 주제에···!”
하늘 속으로 추락하던 내가 이를 악물었다.
감히 육탄전을 건 용기가 가상했다. 사실 용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일 테지만. 발악하는 모습을 보니 녀석의 마나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큰 기술을 내가 헤치고 들어올 줄 예상하지 못했겠지.
“오냐, 받아주마!”
나는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허리를 감은 쇠사슬은 단번에 잘려 나갔다. 연이어 날린 찌르기가 아카샤의 주먹과 격돌했다. 길항하는 힘과 함께 서로의 몸이 튕겨 나갔다.
“흐읍···!”
『■■···!』
나와 아카샤는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지독한 난타전이 시작됐다. 검격이 아카샤를 칠 때마다 섬광이 번쩍였다. 가끔씩은 살을 베는 느낌도 전해졌지만, 대부분의 공격은 뱀처럼 살아 움직이는 쇠사슬에게 막히기 일쑤였다.
물론 아카샤의 공격도 내게 닿지 않고 있었다.
“아카샤!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새끼냐!”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바람 소리가 커서 없는 목청까지 쥐어짜내야 했다. 아카샤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나부끼고 있었다.
놈이 갸웃거렸다.
『■?』
“왜 미래를 파괴하는 거지?! 뭐가 불만이라 그런 개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기이한 행적도 행적이지만, 악당이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심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니 새끼의 목적이 뭐냐! 그토록 많은 생명력을 흡수하고, 세상을 망가뜨려 가면서 이루고자 하는 잘난 목적이 도대체 뭐냐는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카샤의 행적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놈은 세 개의 평행세계에는 그다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둠의 구세주라 칭송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첫 번째 평행세계에 사라졌던 생명을 되돌려 주었고, 두 번째 평행세계에서는 하늘을 열어젖힘으로서 거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세 번째 평행세계에서 내가 아칼루시아의 비밀을 밝히고 카인과 재회할 수 있던 것은 녀석이 단초를 제공해 준 덕이 컸다.
그런 과정에서 살생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네뷸라 클라지에의 버러지들처럼 전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놈들 뿐이었다.
‘왜.’
하지만 미래에서 저지른 악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카샤는 내가 알고 사랑하는 거의 모든 인연을 파괴했다. 마르야, 슐리펜, 에르제베트, 나비로제 누님과 자이파, 로르혼을 비롯한 친우들이 몰살당했다. 도시나 문명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물을 이 꺽다리가 부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남긴 유품이 코트 주머니에서 뒤섞이며 절그럭거리고 있었다.
얼핏 스치는 친구들의 면면을 떠올린 내가,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니 새끼는! 반드시 내가 찢어 죽일 테다!”
『■■■■ ■■■■!』
“알아듣게 말하라고 병신아!!”
노호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보다 격렬해진 검의 난무가 아카샤를 향해 쏟아졌다. 포말처럼 출렁이던 내 세계의 형상이 사진처럼 선명해졌다.
콰아앙!
우리는 추락을 멈추고 노을 지는 들판에 착지했다. 자세를 바로잡을 틈도 없이 전투가 재개되었다.
『■■■■···!!』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을에 삼켜진 아카샤는 더는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쇠사슬이 미처 재생하기도 전에 날아든 참격이 놈의 몸을 찢었다. 찌르기는 망토를 꿰뚫고 노을색 구멍을 만들었다. 물감처럼 튀기는 피가 들판을 적시고 있었다.
『■■! ■■!』
“뒈져라!”
결착이 다가오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아카샤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선으로 검을 올려 벴다. 본래 싸움이란 상대의 머리를 베어야 끝나는 것이었다. 피로 물든 칼날이 아카샤의 목을 쳐내려던 순간이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사람은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각도였다. 빗나간 참격이 가면의 표면을 쓰다듬듯 스쳤다.
“쓸데없는 발악을···.”
이를 악물었다. 참 끈질긴 놈이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려 벴다. 아카샤의 왼팔이 불쑥 들어올려졌다.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이 눈앞을 가렸다.
“뭐.”
그리고 내 숨이 멎었다.
아카샤의 앙상한 약지에는 은으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수수하지만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는 목걸이는 내가 아는 물건이었다. 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이가 들어서기 전, 한창 연애의 재미를 느낄 시기에 내가 아데샨에게 선물해준 목걸이였다.
“···아데샨.”
일 초가 일 년처럼 느껴졌다.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있었지만 틀림없는 그 목걸이였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장신구 선물이라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던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미래의 아데샨까지 죽어 버린 것이다.
내려치던 검의 궤도가 흔들렸다.
『■.』
그리고 아카샤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녀석이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잘려서 아무것도 없어야 할 오른쪽 어깨 아래로 팔이 생겨 있었다. 크고 작은 쇠사슬 수백 가닥이 엉켜서 만들어진 팔이었다. 꽉 움켜쥔 주먹 위로는 무저갱의 어둠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아카샤가 뭐라 외쳤다. 반동이 실린 주먹이 급가속했다. 딱 봐도 맞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저런 걸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모든 게 끝이었다.
하지만 아데샨이 죽었다.
나도 피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샨이 죽었다.
심상이 펼친 노을이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아카샤의 주먹이 내 복부 깊숙이 꽂혔다.
“······컥.”
뇌가 흔들렸다. 노을이 사그라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내 세계가 바스라지듯 소멸했다.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해.
그리 말하는 아데샨은 웃고 있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 틈새로 새빨간 귀가 드러나 있었다.
처음으로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정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나뭇잎 틈새로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온기를 느끼고, 새벽에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며, 문득 서로의 나신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며,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그녀가 내게 안기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웃고,
웃으면서.
[어둠이 폭발하며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둑하던 다 코냐의 계곡에 빛이 드리웠다.
저 높은 곳에서 추락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면에 처박혔다.
『■···■■···!』
흙먼지가 가라앉자 아카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당장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숨을 껄떡거리고 있었다. 쇠사슬로 만들어진 오른팔이 제 역할을 다하고 마나의 형태로 분해되고 있었다.
『허억···■어■···.』
그의 가면 아래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묘한 음성이 새나오고 있었다.
망토 아래로 붉은 웅덩이가 고이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붓처럼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카샤가 멈칫거렸다.
『■런···.』
그는 후들거리는 왼손을 들어 가면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잠깐이지만 사람의 말처럼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 기괴하게 변조되었다.
문득, 뒤쪽에서 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
아카샤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로난이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피가 흘러나오는 곳은 입 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난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
아카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분을 기다려도 로난은 움직이지 않았다. 엎드린 채 죽어버린 것 같았다. 한참 더 숨을 고르던 아카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파도에 얻어맞는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행색이었다.
다리는 절뚝거리고 가녀린 몸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발걸음을 옮긴 아카샤가 세니엘 앞에 섰다. 영험한 바위는 생명력의 분출을 멈추고 스스로를 수복하고 있었다. 매끄럽던 절단면은 상처에 딱지가 앉듯이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카샤가 세니엘에 손을 얹었다.
『■■ ■■■■■■.』
그리고 기묘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지난 평행세계에서 읊은 것과 같은 단어의 나열이었다.
바위 속에 잠들어 있던 생명력이 그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때와 달리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카샤는 일대를 떠다니는 세니엘은 물론, 바위가 발산하는 생명력이 눈에 띠게 줄어들 때까지 힘을 빼앗은 뒤에야 손을 뗐다.
『···■■.』
아카샤가 팔을 떨구었다. 수 세기에 걸쳐 파괴된 생태계조차 돌려놓을 수 있는 생명력이 그의 가슴 속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허나 몸에 새겨진 중상은 조금도 아물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생명력의 사용을 억제하는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
아카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후련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모습은 평생의 숙원을 달성한 노인을 연상케 했다.
그가 공활한 다 코냐의 하늘을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아···카샤.”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카샤가 얼어붙었다. 그는 녹슨 경첩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로난이 서 있었다. 그는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카샤가 입을 뗐다.
『■■■···?』
“막았거든···간발의 차로.”
로난이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시 빠져나온 손에는 웬 부서진 광물 덩어리 세 개가 쥐어져 있었다. 세니엘의 파편이었다. 쪼개지며 드러난 단면이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덩어리가 아카샤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준 것이었다.
로난은 다시 파편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여러모로 신세를 졌지.”
『■■!』
아카샤는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다섯 손가락이 전부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쓰기 위해 남겨 둔 기력이 마법으로 변했다. 해일처럼 난폭한 힘이 로난을 향해 쏟아졌다. 침착하게 검을 뽑은 로난이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반으로 갈라진 힘의 흐름이 그의 양 옆으로 지나갔다.
『■···!』
아카샤가 뒷걸음질쳤다. 자신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로난의 검은 본 적 없는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기의 진홍색도, 세계를 담은 주홍색도 아니었다. 황금과 새벽을 반반씩 뒤섞은 듯한 아름다운 색채가 검신 위를 흐르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거의 끝날 뻔 했는데 아쉽게 됐네···마지막에 그런 걸 보여주다니···정말 좋은 작전이었어.”
『■■■···.』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봐.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모두를 구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없더라고···다 사랑이 깊은 탓이지.”
그리 말한 로난이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아카샤가 추락하며 떨어뜨린, 미래 아데샨의 유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렸어···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덕분에. 네게는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
“그래···따지고 보면 세 개의 평행세계를 구할 수 있던 것은 니 새끼 덕분이야.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던 문제였는데, 결국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됐지···분명 대장군님도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실 거야.”
아카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난의 얼굴은 평온하다 못해 살짝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과 세계 속에서 격전을 벌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래서···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어···허억, 미래의 비극은 어차피 없는 일이 될 테니까···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도 불행한 죽음을 맞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 ■■■■ ■■■?』
“맞아···나는 다 죽어가고 있지. 하지만 그건 너도 피차 마찬가지잖아···?”
로난의 대답을 들은 아카샤가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가면의 상태를 점검하기도 전이었다. 로난의 검신을 타고 일렁이던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러니까, 이거 한 방으로 끝낸다···.”
햇살처럼 따스한 빛이였다. 어렴풋하면서도 생기가 넘쳐 흐르는 것이 능선 위로 터오르는 먼동을 떠올리게 했다. 허나 아름다운 것과 별개로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아.”
위기를 직감한 아카샤가 행동을 취하려던 차였다.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터져 나온 일출의 빛이 계곡을 뒤덮었다.
“감사의 마음이 담긴···내 선물이니까.”
목소리가 멀었다.
거대한 무언가 자신을 밀어내는 감각과 함께, 아카샤의 의식이 끊어졌다.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5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