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61)
2-131. 가장 빛나는 것
#131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눈을 떴다.
“윽.”
나는 어두운 숲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흔들리는 나무 꼭대기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일출이 머지 않았는지 별은 거의 다 저문 채였다.
나는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도 움직이지 않는 부위는 없었다. 칼도 허리춤에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후우우우···씨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균열은 어찌어찌 통과한 것 같았다.
“우욱.”
갑작스레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이번 균열을 통과하는 것은 유달리 지랄 맞았다.
아카샤의 마나로 이루어진 보안 입자는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열 배는 더 무거워져 있었다.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탈출하지 못할 뻔했다.
“개새끼.”
욕지거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여간 더러운 게 아니었다.
너를 돕긴 했지만 같은 편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아카샤에게 일갈을 당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상경한 촌놈처럼 두리번거렸다. 주변의 나무와 돌의 배열이 눈에 익었다. 밤새 이슬이 내린 수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결론은 금새 나왔다.
“내가 떠났던 곳이잖아.’
확실했다. 여기는 미래에서 온 사란테와 내가 만났던 장소였다. 하늘의 색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때와 일치했다.
‘얼마나 지난 거지?’
다만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다.
금방 끝내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 년에 가까운 모험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여기서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아데샨이 벌써 홀몸으로 아이를 낳았고, 나를 기다리다 못해 다른 놈팡이와 결혼해버렸다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력은 폭주한다.
나는 싱글벙글하면서 집에 들어간다. 손에는 탐스러운 꽃다발이 들려 있다. 아데샨은 앞치마를 두른 채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친다. 접시가 깨진다. 소리를 듣고 놀란 두 명이 방에서 튀어나온다. 한 명은 나와 그녀를 반반씩 닮은 꼬맹이고, 한 명은 처음 보는 남자다. 재수없는 안경을 쓴 책상물림 스타일이다. 놈은 나와 아데샨을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정중하게 물어볼 것이다.
‘선생님. 집을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그 순간 나는 칼을 뽑는다. 대머리 킹만 네 번 죽인 성검은 벼락보다 빠르게 안경잡이를 토막내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른 몸 위로 수백 가닥의 붉은 선이 그어진다. 피와 살점이 폭발한다. 지옥으로 변한 거실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데샨이 외친다. ‘여보!’
코흘리개가 외친다. ‘아빠!’
당연히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피웅덩이 위에 널브러진 안경이다.
“안 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가장 나무가 적은 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달리다 보면 뭐라도 나올 터였다. 잔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앞머리가 바람에 뒤집힌다. 이윽고 수풀이 흩어지며 탁 트인 공터가 펼쳐졌다.
“···이건.”
눈썹을 치켜떴다. 머리는 까마귀 둥지처럼 변해 있었다.
건물의 잔해가 널브러진 공터 한복판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을 거의 다 먹은 불꽃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꺼져 가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난쟁이가 그 앞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셀.”
눈물나게 반가운 얼굴이었다. 내 친구 아셀은 평행세계로 떠나는 날과 같은 옷차림이었다. 꼬질꼬질한 작업용 로브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흐윽···아, 안돼···!”
녀석은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침낭도 벗어던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얼굴은 붉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허공에 손사래를 치던 아셀이 쥐어짜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르야···더는 안 돼···내게도 인권이라는 게 있어···.”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야.”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잠꼬대였다. 자비를 구하는 대상이 마르야인걸 보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온게 맞는 것 같았다.
당장 깨울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 대화를 한 번 시작하면 평행세계의 모험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고추냉이를 씹은 것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아셀의 작은 몸 위에 모포를 덮어 주며 인사했다.
“다녀왔다.”
“다, 다섯 번은 정말 무리야···살려줘엇···!”
녀석은 추잡한 잠꼬대로 답을 대신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반파당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복구 공사가 진행 중인 제도의 중심부였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혼잣말했다.
“···정말로 돌아왔군.”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났던 날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나 뿐이었다. 새벽바람에 펄럭이는 코트가 내가 겪은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맞아.’
불현듯 아데샨의 얼굴이 다시 눈앞을 스쳤다. 안경잡이가 나오는 상상이 뒤따라 붙었다.
내 머리속에서 그녀는 안경을 부여잡은 채 오열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머뭇거렸다가는 나를 돌아보며 ‘왜 돌아온 거야! 왜! 우리를 버리고 떠난 주제에!’ 라며 증오 어린 목소리로 외칠 것만 같았다.
“웃기지 마.”
상상에서라도 그딴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셀을 등지고 도심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이면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제국 복원회의 중직을 맡은 그녀는 수면 시간을 철저히 엄수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일거리와 뱃속에 들어선 친구의 투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어떤 미친놈이 우리 누나 집에 들어가서 남의 애인을 건드려?’
나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심신을 안정시켰다.
당연히 별 일 없을 터였다. 고작 몇 시간이다.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를 개뼈다귀가 가정을 침식할 만큼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나는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데샨을 보지 못했다. 손을 잡고 산책한 날도, 부둥켜 안은 채 잠을 청하던 밤도, 생명이 들어선 배에 귀를 댄 채 대화하던 날의 기억도 이제는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후우.”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푸른 그림자에 휩싸인 세상은 이제 횃불을 켜지 않아도 앞이 잘 보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도시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복구된 건물이 늘어나고 있었다.
“형씨, 옷 한번 죽이는데!”
“방금 그거 로난 님 아니야?”
“깜짝이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사람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새벽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었다. 익숙한 면면은 하나같이 땀이나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이 세상에는 영웅이 참 많았다.
“고마워요. 다들.”
나는 그렇게 뇌까리며 도시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필레온 앞에 있는 누나의 집이었다.
지금 나와 아데샨은 누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필레온에 다닐 무렵 매입한 안전가옥은 파괴를 빗겨나간 운 좋은 건물 중 하나였다. 어디까지나 임시로 거주하는 것이었기에 2층의 큰 방만 쓰고 있었다.
별안간 허리춤의 칼자루가 웅웅 진동했다.
“별 일 없을 거야 로난. 너는 밤일을 잘하잖아.”
“린···!”
“응. 나를 믿어.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아데샨이 바람을 필 확률은 0에 수렴해.”
성검의 정령 린이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하고 있었는데 칼에 잘 붙어서 돌아온 것 같았다. 정말 기쁜 일이었지만 상황이 워낙 여의치 않았다.
“반갑다.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오늘만큼은 너한테 욕을 하고 싶지 않거든?”
“응. 미안. 나도 반가워서 그랬어.”
린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너무 고분고분해서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렇게 십오 분 정도를 더 달리니 집의 윤곽이 나타났다. 하늘의 동쪽에는 이제 옅은 황금색이 차오르고 있었다.
“엇차.”
이 정도 거리면 무난할 것 같았다. 허벅지가 부풀었다. 나는 속력을 유지한 채 집을 향해 도약했다.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하던 몸이 2층 발코니에 착지했다. 뒤꿈치를 들고 있어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커튼 때문에 외부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었다.
안경잡이는 아닐 거야. 안경잡이는.
심호흡한 내가 유리문을 열었다.
“아데샨?”
아데샨이 깨지 않을 크기로 속삭였다. 재회의 기쁨은 그녀가 기상한 뒤에 나눠도 충분했다.
어두컴컴할 것이라 예상했던 방에는 의외로 불이 켜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내가 미간을 좁혔다.
“응?”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적막이 실내에 맴돌고 싶었다.
뭔가 싶어서 방을 둘러보던 내 시선이 침대 위에서 얼어붙었다
“···안 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2인용 침대에 놓인 베개 두 개가 모두 눌려 있었다. 원래 내가 머리를 놓는 베개에는 보라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러붙어 있었다.
상상 속의 안경잡이가 부활하고 있었다. 안경을 중심으로 신체를 수복한 그의 머리카락은 포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녀석이 재수없는 손동작으로 안경을 매만진다.
‘선생님.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발코니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모공 하나하나에 마비독을 투여당한 것 같았다. 불현듯 방 안에 설치된 욕실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
눈이 커졌다. 누군가 몸을 씻고 있었다.
아데샨이면 좋겠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명이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카샤를 마주했을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내가 방으로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로난. 거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울려 퍼졌다.
사무칠 정도로 그리운 목소리에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아데샨?”
“왜 발코니로 들어왔어? 신기한 옷을 입고 있네.”
거기에는 아데샨이 서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그녀가 나를 보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검은 머리카락의 끄트머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반 년 만이다. 잿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이 표백됐다.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입술이 마침내 말을 뱉어냈다.
“···욕실에 누가 있는데.”
“응? 아아, 에리가 씻고 있나 보네. 어제 복구 작업을 도와줘서 같이 잤거든.”
“아하. 에르제베트가.”
나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의심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앞에서 눈처럼 녹아 내리고 있엇다.
그렇게 된 거였군. 보라색 머리카락에서 왜 기시감이 느껴지나 싶었다.
아데샨이 눈매를 좁혔다.
“뭐야 그 표정은. 설마 훔쳐본 건 아니겠지?”
“아하하···하하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웃음이 자꾸 나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점점 눈매를 좁히던 아데샨이 허리춤에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수상한데···잠깐 이리 와 봐.”
나는 그렇게 했다. 코트의 옷자락이 큰 새의 날개처럼 퍼덕였다. 놀란 아데샨이 움찔거렸지만 머지않아 평정을 되찾았다. 키가 워낙에 커서 눈높이가 맞았다.
그녀가 내 양쪽 볼을 가볍게 잡아당긴 채 되물었다.
“내가 훔쳐봤냐 묻고 있잖아.”
“안 봤어.”
“진짜?”
“뭐가 아쉽다고 그런 걸 봐. 네가 있는데.”
“···좋아. 믿을게.”
볼이 놓아졌다. 장난으로 잡은 거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를 마주보던 아데샨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서로가 너무 좋아서 자연스레 나오는 웃음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일찍 깼네.”
“아, 응.”
“피곤하지 않아? 더 자지 그랬어.”
“그럴까 했는데 로난이 너무 보고 싶어서···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만나고 오려 했어. 우리 애도아빠가 보고 싶다 하는 것 같고….”
아데샨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웠는지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랐다.
왜 일찍 일어났나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던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읍···!”
아데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둥거리던 그녀가 내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반대쪽 손으로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이윽고 저항을 멈춘 아데샨이 내 목에 양 팔을 감았다. 내가 잠깐 떨어지면 저쪽에서 먼저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우리는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 걸 아는 연인처럼.
발코니에서 누군가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에르제베트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시선은 이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크.”
어째 내가 안경잡이 포지션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데샨을 공주님처럼 안아들고는 필레온 아카데미를 향해 도약했다. 착지한 곳은 가장 높은 성탑 위였다. 지평선 너머로 솟아나는 해와 황금색으로 물든 도시, 모교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입맞춤한 뒤 얼굴을 떼어냈다.
“로, 로난···?”
아데샨은 언어 기능을 상실한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흐트러진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잿빛 눈동자 속에는 움트는 서광과 여느 때보다 진지한 내 자신이 엇비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카샤도, 평행세계에서 겪은 모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데샨.”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내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잿빛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미루고 미뤄 온 프로포즈였다. 서늘한 아침바람에 우리의 머리카락이 불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무슨 결말을 맞이하게 되든 간에.
벌어지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면서 살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찬란했다.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5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