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65)
2- 135. 이어지는
#135
“날 좋네.”
로난이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낮 내내 달아올랐던 세상을 식혀 주고 있었다. 석양을 받은 필레온 아카데미의 대광장은 아름다운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건이 되지 않았다.
대업을 앞둔 광장에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란세. 출입 통제는 확실히 되고 있는 거겠지?”
“물론이죠. 교장님.”
나비로제가 묻자 란세가 대답했다.
자신만만하게 경례를 취하는 그의 어깨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별이 세 개씩 붙어 있었다.
란세는 제국군 장성으로서 오늘 진행되는 극비 프로젝트의 보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휘하의 최정예 요원들이 필레온 전역에 배치되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좋아. 너를 믿겠다. 다른 때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실수를 용납할 수 없어.”
“동감합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출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아다오. 나는 취약점이 없나 순찰하고 오겠다.”
나비로제는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렸다. 어깨에 걸친 녹색 제복이 멋들어지게 펄럭였다.
란세와의 나이 차이가 마흔 살에 가까운데도 둘의 연배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시타와 꿈새 아벨이 하늘을 선회하며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낮은 하늘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바로 날려 버려.】
“뺘!”
“휘욧!”
인간 형태에서 날개만 꺼낸 오르세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장난치느라 바빴을 꿈새들도 각이 딱딱 잡혀 있었다. 여기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나바르도제를 비롯한 화룡 일족도 함께 높은 하늘을 수호하고 있었다.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주변을 쭉 둘러보던 그가 입맛을 다셨다.
“쩝. 어째 나만 노는 것 같군.”
대광장 한복판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수십 개의 원과 그 내부의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점멸하고 있었다. 로난이 여지껏 본 것 중에 가장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 로르혼과 크라티르를 포함한 당대의 마법사들이 원 주변에 들러붙어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하아아아!”
“크윽···으윽···.”
모두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방대한 양의 마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마법진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아데샨이 그림자의 마나를 이용해서 그들의 정신력을 강화해 주고 있었다.
“후우···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고···마워요.”
아셀만 유일하게 감사를 표할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별도 만들어낼 것 같은 마법사들을 이토록 엿먹일 줄이야. 우리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실감이 났다.
로난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법사들의 분투를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두 눈을 가렸다.
“누굴까~요?”
곧이어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긴장이 탁 풀렸다.
로난은 입꼬리를 올리며 갸웃거렸다.
“글쎄다. 못생긴 고블린?”
“······땡.”
“틀렸나. 그럼 아빠도 아니고 할아버지랑 결혼할 거라고 일기에 썼던 코찔찔이?”
“씨이, 일부러 그러는 거죠?!”
목소리가 격양됐다. 그 순간 몸을 돌린 로난이 손의 주인을 공주님처럼 안아들었다. 예쁘지만 눈매가 날카로운 소녀였다. 로난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소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우왓, 언제 움직인 거에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쳇, 역시 할아버지는 못 당하겠네요.”
소녀가 분하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뽀얗고 말랑말랑한 피부는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로난과 아데샨의 손녀이자 오늘 작전의 핵심인 아카샤 데 발투레였다.
“좋아. 이제 내려라.”
“조금만 더요.”
“너 내년이면 성인 아니냐?”
“원래 손녀딸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잖아요. 오 분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아카샤가 뻔뻔하게 엄지를 쳐들었다.
로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녀를 내팽겨지치지 못했다. 실제로 아카샤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였으니까. 약아빠진 꼬맹이 같으니.
로난의 품에 안긴 채 마법사들을 지켜보던 아카샤가 입을 열었다.
“우움, 역시 저도 도울까요?
“아서라. 너는 힘을 빼면 안 돼.”
“외할아버지가 저렇게 힘들어 하는 건 처음 봐요. 에르제베트 이모도 그렇고···.”
아카샤가 걱정스레 말꼬리를 끌었다.
그래도 자신 바로 다음 가는 마법사들인데 저토록 힘들어할 줄이야.
로난이 말했다.
“그래서, 준비는 얼추 됐니?”
“네. 일단은요.”
아카샤가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만한 크기의 균열 네 개가 동시에 발생했다. 크기는 작지만 엄연히 평행세계와 이어지는 통로였다. 그것도 저마다 다른 세계로.
로난은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훌륭하군. 네가 미래에서 온 재앙이 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으엑, 또 그 소리네.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래요?”
“그럴 리가 없잖냐. 특수복은 이제 적응됐고?”
“그럭저럭은요.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니더라고요.”
아카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작전을 수행하는 내내 특수 제작된 의상을 입어야 했다. 절대 자신의 정체를 유추할 수 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악당의 옷을.
기다렸다는 듯이 호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
“크하하! 우리 회사의 모든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는 걸작이란다.”
로난과 아카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정장 차림의 디디칸과 알리브리헤가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바렌 제약과 더불어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회사 중 하나인 디디칸&알리브리헤 중공업의 회장들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신장이3m에 이르는 시커먼 인형이 서 있었다.
“이거 참···오랜만에 보는군.”
로난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실소했다. 반갑지는 않았다.
가면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가 평행세계에서 치고 받았던 아카샤와 같은 모습이었다.
“걱정 마라 로난. 원래 몸과 다를 것 없이 조작할 수 있을 테니까. 지겹도록 들어 온 소리겠지만, 나는 네 손녀만큼 우수한 인재를 본 적이 없다!”
“안정성도 확실하지. 외부의 위협이 가해지면 자동으로 첨단 방어 체계가 작동하거든. 손상을 입으면 실제 사람이 다친 것처럼 피와 내장이 나와서 적을 기만하기도 그만이야.”
그들은 거의 십 분이 넘도록 특수복의 장점을 늘어 놓았다.
액체처럼 몸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 반으로 잘린다 해도 착용자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다칠 일은 없다는 것,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완전히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서 아카샤의 몸에 딱 맞는 커스텀 복장을 여벌로 마련했다는 점까지.
로난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알아. 그걸 당한 게 나잖아.”
애초에 특수복은 그가 쓴 책의 묘사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미래에서 온 재앙 아카샤의 정체는 저 특수복을 입은 손녀였던 것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효수했던 머리의 주인은 아카샤가 몰래 바꿔친 시체였다.
어찌보면 참 다행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가 진짜로 괴물처럼 변한 게 아니라서.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한 디디칸과 알리브리헤가 다시 설명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파아아아아-!!!
대광장의 마법진에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하얀 섬광이 필레온을 뒤덮었다. 인식 저해 마법 탓에 부지 내부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꺅!”
“오오···! 드디어?”
아카샤가 로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대광장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왔군.”
빛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탈진한 마법사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지않아 기둥이 소멸하며 마법진 중앙에서 말쑥한 엘프 신사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정장 차림의 엘프는 고작 2년 전에 돌멩이 신세를 벗어났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사란테. 어서 와요.”
“네. 다녀왔습니다.”
사란테가 싱긋 웃었다. 그의 어깨에는 새카맣게 탄 브리기아가 들쳐메져 있었다. 물론 마공학으로 만들어낸 가짜였기에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입자로 변하며 소멸해 버렸다.
로난이 물었다.
“어때요. 과거의 저는 잘 속아넘어 가던가요?”
“상당히 의심하셨지만…어찌어찌 성공했습니다.”
별안간 사란테가 주먹만한 수정구 하나를 꺼내들었다. 특정 버튼을 조작하자 구체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네뷸라 클라지에와 거인에게 파괴당하는 제도의 모습이었다.
로난이 평행세계 모험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당시의 사란테는 이 영상을 두고 미래에 벌어진 재앙이라 소개했었다.
지금의 로난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런 조악한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사란테가 구체를 다시 집어넣었다.
“꿈꾸는 천둥 감독의 ‘대침공’ 다시 봐도 참 잘 만든 영화란 말이죠.”
“동의해요. 속편은 영 별로더라고.”
“로난 님이 빨리 자극받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감상했다가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을 테니까요. 이야, 십년감수했습니다.”
“제기랄, 진상을 아니까 원숭이가 된 기분이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진실이란 때때로 뒷맛이 쓴 법이다.
그날 밤 숲에서 본 영상은 다인하르의 원주민 꿈꾸는 천둥이 제작한 가족 영화였다. 제도를 침공하는 대머리 군단과 광신도는 모조리 배우나 환각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짜였던 것이다.
고생했다는 말을 한 로난이 사란테와 악수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대광장 전역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실이 이어졌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거나 서로를 얼싸안고 우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사란테의 복귀는 오늘의 작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란테가 다녀온 곳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의 과거였다. 그는 과거의 나에게 아카샤의 피와 코트를, 평행세계 모험이 시작될 단초를 넘겨 주고 돌아왔다.
사란테가 웃었다.
“당시의 로난 님은 참 무섭더군요. 손발이 벌벌 떨렸습니다 ”
“아직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때였죠. 욕봤어요.”
“이제부터 아카샤 님의 역할이 중요해지겠군요. 부디 잘 되면 좋으련만···.”
사란테가 말꼬리를 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 여행은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첫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었으니까.
사란테의 시선은 로난에게 안겨 있는 아카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카샤가 굵은 침을 삼켰다.
“···…마침내 제 차례가 온 거군요.”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아카샤 님만 할 수 있는 일이죠.”
“후우, 좋아요. 까짓꺼 한 번 해 보자구요.”
로난의 볼에 입을 맞춘 아카샤가 폴짝 뛰어내렸다.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51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