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66)
2-136. 고난을 넘어 별을 향해 -完-
#136
“좋아요. 까짓거 한 번 해보자구요.”
아카샤가 로난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간 그녀가 아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외할아버지.”
“그래 아카샤···후우, 지금 바로 출발할 거니?”
그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완전히 탈진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시간 마법에 손을 댄 부작용이었다.
아카샤가 주억거렸다.
“네. 마지막으로 점검하려 왔어요. 수도 없이 많이 읽었지만 그래도 좀 불안해서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녀가 작은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하도 많이 읽어서 넝마가 된 표지에는 [나의 평행세계 대모험] 이라는 한없이 직관적인 제목이 적혀 있었다. 로난이 그녀를 위해 쓴 이야기의 문고본이었다.
책을 쭉 훑어본 아카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각 평행세계마다 있는 세니엘의 생명력을 모으는 거에요. 첫 번째 평행세계의 세니엘 님만 파괴하고요. 거기는 너무 손상이 심해서 복원에 한계가 있으니까.”
“응. 생태계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야. 유일하게 거인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평행세계였으니.”
“세니엘 님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 하셨죠?”
“맞아. 이미 세니엘 님 본인과 교차검증한 사실이니까 안심해도 돼. 별의 영혼은 행성이 물리적으로 완파당하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아.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문명이 세워질 즈음에는 세니엘이라 불릴 만한 바위가 다시 나타날 거야.”
“휴, 그리 말해주시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아카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모험을 떠나야 했다.
포지션은 악당.
그것도 ‘미래에서 온 재앙’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붙은 최악의 대악당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과거의 로난과 함께 모든 평행세계의 거인들을 박멸하는 것.
둘째. 시간을 네 번 되돌릴 수 있는 마도구를 만든 뒤 로난에게 건네주는 것.
셋째. 임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이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지금까지의 역사가 붕괴해 버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의 기반이 된 것은 로난이 손녀를 위해 집필한 [나의 평행세계 대모험]이었다.
아카샤는 그 책을 아주 좋아했다. 자신과.이름이 같은 악당에게 이입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되는 해, 정원에서 놀던 아카샤는 소설처럼 평행세계를 오가는 능력을 각성했다. 평범한 소설로만 여겨지던 해당 도서의 입지는 전대미문의 예언서로 격상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놀랐지. 소설 속 악당과 능력이 완전히 같아서.’
평행세계는 모두 네 개였다. 상태는 소설과 대부분 일치했다. 아데샨이 회귀하며 버려진 세상과 그곳의 사람들은 불행한 결말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었다.
아카샤는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세기의 지성들은 긴 토론 끝에 충격적인 결론을 내놓았다. 평행세계를 저대로 방치해 두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난은 세 번 회귀했던 대장군에게 구슬을 받아 회귀한다. 회귀를 경험하지 않은 대장군에게 구슬을 준 것은 평행세계 여행을 마친 로난이다. 그리고 로난에게 회귀의 구슬을 얻도록 도와준 건 그의 손녀 아카샤였다.
모순투성이지만 이 순환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화가 존재할 수 있었다. 평행세계의 상황을 무시한다면 이 순환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스레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왜 하필이면 프로포즈를 앞둔 그 때의 로난이 가야 했는가?
왜 아카샤는 능력을 갖췄으면서도 혼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는가?
애당초 미래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과거가 변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같이 명쾌한 대답이 불가능한 의문들.
아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 기묘한 현상에 타임 패러독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마 영원히 정답을 알 수 없을지도.’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되어야 했다. 누구도 삶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민 끝에 소위 말하는 ‘자기 실현적 예언’을 이루기로 했다. 소름끼치게도 이 무렵 인류는 로난의 소설에서 벌어졌던 대부분의 일을 재현할 수 있었다.
마른세수를 한 아카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구슬. 제가 잘 만들 수 있겠죠?”
“잘 해낼 거야. 수백 번씩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오류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별에 너 뿐인걸.”
“세니엘 님이 불쌍해요. 소설대로라면 거의 다 부숴야 하던데.”
“나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시간 마법의 동력원이 될 만큼 강력한 에너지는 현재로서 별의 영혼 뿐이거든. 사란테 님을 잠깐 과거로 보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생명력이 필요했고, 세계의 시간을 네 번 되돌리려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많은 생명력이 필요하겠지.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방법은 이것밖에 없더라.”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잘 해볼게요.”
“용서해 주실 거야. 별의 영혼께서는 자비로운 존재니까. 오늘 이후로 시간 마법은 영원히 봉인시킬 예정이니 더는 노여움을 살 일도 없겠지···흠흠, 그리고 아카샤?”
아셀이 헛기침했다.
오랜만에 말을 더듬는 모습에 아카샤가 갸웃거렸다.
“네?”
“그···개인적인 부탁인데. 평행세계에서의 나를 너무 괴롭히지는 말아줘. 젊은 시절의 나는 겁이 참 많았거든···당시의 나와 만날 거라 생각하니 좀 부끄러워서.”
“에이, 제가 뭐 좋다고 외할아버지를 괴롭히겠어요? 그런 짓을 할 리가.”
“그렇지? 역시 우리 손녀는 참 착하다니···”
“가벼운 장난은 칠 지도 모르지만.”
“자, 장난?”
“네. 아셀 할아버지는 너무 귀여우니까요. 솔직히 아직도 제 또래 같은걸요.”
아카샤가 아셀의 볼을 콕콕 찔렀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는 여전히 청년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아한 귀부인이 된 마르야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났다.
“참. 마르야 할머니는요?”
“오늘도 훈련 중이야. 자이파 님이 담당하고 있어.”
“정말로 시간의 장벽을 넘을 생각이신가 보네요.”
“그렇지.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아셀이 미소지었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노화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신이나 로난과 달리 마르야는 여전히 늙어 가는 중이었다. 환골 탈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필멸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카샤가 말했다.
“반드시 성공하실 거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에 마르야가 실패한다면 나도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여야겠지.”
“불멸을 포기하신다고요?”
“그게···이크,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셀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걱정 마렴 아카샤. 마르야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설령 환골 탈태에 실패하더라도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어. 브라움처럼 흡혈귀가 된다거나.”
“아, 북부 변경백 말씀이시죠?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응?”
“두 분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거든요. 할머니가 만약 자기가 늙어 죽으면 어쩔 거냐 물어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흘만 더 살고 죽을 거라 대답했어요. 당신이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면서···.”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기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흘의 유예는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기 위한 시간이었다. 눈물이 마르면 자기도 따라갈 거라는 로난의 말은 기어코 어린 아카샤가 울음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아직도 기억나요. 할아버지는 농담이라며 저를 달랬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로난이라면 그럴 거야. 아데샨 누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니까.”
“네. 그런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겠지만요.”
아카샤가 웃었다. 아데샨은 3년 전에 노화를 극복했다.
세월을 역행하는 축복은 비단 검사나 마법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림자 마나의 극치에 다다른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젊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셀에게 감사를 표한 아카샤가 로난에게 돌아갔다.
“할아버지. 저 이제 갈게요.”
“제기랄, 진짜 가는구만. 옷 입는거 도와줄까?”
“괜찮아요. 워낙 잘 만들어서 갈아입는 것도 편하더라구요.”
로난은 아데샨과 손을 잡고 아카샤를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에는 근심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귀여운 손녀를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임무 내내 과거의 자신과 치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특수복을 착용하던 아카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런데 저, 궁금한게 있어요.”
“궁금한 거?”
“네. 왜 하필 그 때였나요? 조금만 더 미래로 사란테 아저씨를 보냈으면 훨씬 더 강한 할아버지가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타임 패러독스군. 애초에 설명이 안 되는 이야기잖냐.”
“그래도 궁금해요. 사란테 아저씨가 그 시점으로 간 이유는 단순히 역사가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답습한 것 뿐이에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답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책으로 쓴다면, 할아버지의 역할은 첫 번째 문장일 테니까.”
“일리 있네. 어디 볼까.”
논점을 꿰뚫는 질문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카샤의 말대로였다. 지금 이뤄낸 성취와 비교하면 과거의 로난은 애송이라는 말도 모자란, 칼 든 원숭이에 불과했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
당시의 기준으로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는 왜 프로포즈 전날을 운명의 분기점으로 삼았을까?
침묵이 깨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통수를 긁적이던 로난이 입을 뗐다.
“아마도 가장 엿을 먹기 좋은 시기라서가 아닐까.”
“······네?”
“성취는 언제나 고난의 종점에 묻혀 있지. 인생이라는 게 전반적으로 그렇더라. 사람이 기쁨의 단맛을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쓰디쓴 엿을 아득바득 씹어 삼킨 뒤거든.”
아카샤가 눈매를 좁혔다. 당췌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뜬금없이 엿이라니. 방금까지 정정하던 분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로난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는 생각이 참 많았어. 세계는 어찌어찌 구했지만 새로운 문제가 또 생겼지. 아데샨은 네 아빠를 임신한 상태였고, 멍청한 두뇌는 프로포즈 구상으로 모자라서 평행세계의 존망까지 걱정하고 있었어. 그러던 와중에 사란테가 나타나서 미래를 구해 달라 부탁한 거야.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니.”
로난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도 꿈처럼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운명을 짊어졌을 때 만큼이나 내적으로 번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로 보낸 것 같아. 약하고 건방졌지만 바라는 건 많았던, 나를 엿먹이는 온갖 고난을 극복했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던 순간으로. 그런 시기에 모험을 겪었기에 깨달을 수 있었어. 내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버려졌던 평행세계들의 결말을 바꾸는 모험은 회귀만큼이나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출. 그러니까 세계를 깨달은 것도 그 모험 도중이었고.”
“어음, 나름 해석을 해 보자면···뭔가 극적인 일을 겪었을 때 가장 뽕이 찰 것 같은 시기가 그때였다는 말인가요?”
“역시 우리 손녀는 머리가 좋다니까. 근데 요즘은 그걸 뽕이라고 부르냐?”
“사실 이것도 철이 좀 지난 유행어기는 해요.”
“쉽지 않군···어쨌건 네 말이 맞다. 나는 모든 여정을 마쳤을 때 치사량으로 뽕을 느꼈어. 그때의 감정을 동력원 삼아 살아왔기에 그 소설과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던 거야.”
로난이 끄덕였다. 만약 모험의 시기가 달랐더라면 자신은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란세는 어찌어찌 태어났겠지만 세치카와 이어졌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사소한 변화로 아리아와 이어졌을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변수를 뚫고 아카샤가 태어나더라도 책이 없기에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 수 없다. 평행세계로 이어지는 균열을 여는 방법을 각성할 계기도 없다. 각성하더라도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자연스레 지금과는 다른 역사가 흘러갔겠지.
허나 따지고 보면 다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던 것은 애초에 아카샤가 대장군님과 나를 엮어준 덕이니까.
역시 타임 패러독스는 거지 같은 주제다. 도통 앞뒤가 안 맞고 복잡하기만 하니.
다만, 다른 복잡한 요소를 싹 집어치우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아카샤. 내 결론은 우리는 그냥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거야.”
“할아버지.”
“그거면 충분해.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어. 아마 거기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네가 의도와 다른 실수를 하더라도 그건 내가 겪은 일이 되겠지. 설령 너무 긴장해서 바지에 똥을 싸도 나는 알아채지 못할 거야. 그런 기억이 없으니까.”
“안 지려요. 그런 거.”
아카샤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특수복을 입은 그녀는 이제 키가 3m가 넘는 괴한으로 변한 채였다. 가면을 아직 쓰지 않아서 하얀 얼굴만 둥둥 떠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로난이 손녀를 올려보며 말했다.
“자, 이제 칼 좀 쓴다고 설치는 애송이에게 한 방 먹여주고 와라.”
“후아···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연습했다지만 어떻게 할아버지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패니까.”
로난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직도 가끔은 평행세계에서 아카샤에게 두들겨 맞는 악몽을 꾼다.
특히 막바지에 처맞은 펀치는 세니엘의 파편이 없었다면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중간에 할아버지한테 지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당시의 내 실력은 네 발가락만도 못하니까. 왜 이걸 확신할 수 있느냐. 우리 손녀에게 쌈박질을 가르친게 지금의 이 몸이기 때문이지.”
“역시 그렇겠죠? 하긴 시간이 흐르면서 마법 자체가 워낙 발전하기도 했고요.”
“당연하지. 네 마법이 안 베이는 사실만으로도 기절할 만큼 놀랄 거야. 오러도 그렇고. 좀 건방져진다 싶으면 그 무시무시한 세계를 처먹여 줘.”
로난이 낄낄거렸다. 자신이 손수 단련시킨 아카샤의 마법은 과거의 자신 따위에게 베어질 만큼 약하지 않았다. 물론 평행세계의 모험이 길어지면서 발전을 하겠지만.
아카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응. 그건 억울해서라도 쓸 거에요 세계의 풍경을 완전히 뒤바꾸느라 특훈한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대악당의 심상이 파란 하늘이라는 건 좀 깨잖아.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저갱으로 상대하는게 좋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첫 번째 세계에 나오는 르탄시에라는 여자는 어떡할까요? 책에 나온 대로면 제가 죽여야 하는데.”
“날다람쥐군···싹수가 괜찮아 보이면 죽이지는 말고 그냥 적당히 다리 위쪽으로 잘라서 어디 던져 버려. 나바르도제 누님도 건재하니 알아서 다시 붙이겠지 뭐.”
“그거 좋네요.”
아카샤가 끄덕거렸다.
로난은 비로소 첫 번째 평행세계의 르탄시에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심호흡하는 아카샤에게 로난이 무언가를 던졌다.
“자, 받아라.”
“우왓?!”
길고 앙상한 손가락이 그것을 붙잡았다. 아카샤의 눈이 커졌다.
로난이 넘겨준 것은 특수복의 마지막 파츠인 가면이었다. 내구성과 쾌적함을 갖춘 것은 물론, 모든 대사를 악당에 걸맞는 괴성으로 변조시켜주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가면을 감상하던 아카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가 이렇게 많이 붙어 있어요?”
“모두의 염원이랄까···도발 겸 성공을 기원하며 붙인 거야. 네가 실패하면 다 끝이니까.”
아카샤가 쓸 가면에는 이름 높은 조직이나 개인의 문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명 마탑과 만월 마탑, 제국 기사단, 가운데를 장식하는 로르혼의 황혼 마탑 문장.
작전에 협조한 사람들이 뜯어서 붙인 거였는데, 마치 모두를 처치하고 난 뒤의 전리품처럼 보였다. 조금 을씨년스럽기는 했지만 아카샤와 조우한 과거의 로난을 돌아 버리게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연출이었다.
아카샤가 방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나도 안다. 피곤하면 꼭 돌아와서 쉬어. 너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으니까.”
“응,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허리를 확 숙인 아카샤가 로난의 뺨에 입을 맞췄다.
성공을 기원하는 함성이 대광장을 흔들었다.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그녀가 가면을 뒤집어썼다.
『■■■■■■■!』
기괴한 변조음이 울려 퍼졌다.
아카샤가 손가락을 휘두르자 공간이 찢어지며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피처럼 붉은 파도가 하얀 백사장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거인에게 점령당한 첫 번째 평행세계였다. 아카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
균열이 닫혔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오직 로난 뿐이었다.
그는 아카샤가 성공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다만 완전한 마침표는 아니었다.
시간 마법은 영원히 봉인됐다. 회귀나 같은 일은 더는 벌어지지 않는다. 평행세계 여행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아카샤가 못을 박아 놨다.
아카샤가 끈을 잇고 돌아오는 순간, 다시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시작될 것이다.
“날 좋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중얼거렸다.
사람이 거의 떠난 대광장에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나와 아데샨을 포함한 일부만이 남아 들개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손녀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곱씹느라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웃기는 일이야. 고작 한 명이 몇 분 과거로 다녀왔을 뿐인데, 그걸 못하게 됐다고 쩔쩔매는 꼴이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통제했다는 사실은 막연함에서 오는 미래의 공포를 잊게 해 주었다. 만약 돌이킬 수 없는 불찰을 저지르더라도 미래나 과거에서 온 자들이 구원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더 이상 시간과 평행세계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한데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우리 세상과 네 개의 평행세계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고, 무언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각자의 힘으로 해내야 마땅했다.
좋든 싫든 운명은 나아갈 것이다. 미개척의 망망대해를 향해서.
‘쉽지는 않겠지.’
물론 아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불확실함은 우리에게 종종 엿을 먹일 것이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불행에 슬퍼하고, 당황하고, 겁에 질리고, 심하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할 것이다. 어느날 하늘을 찢으며 날개 달린 대머리들보다 더한 침략자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좋은 일도 그만큼 많을 테니까. 여지껏 그래왔듯 싸워서 이겨내면 그만이다.
성취의 황홀함은 언제나 고난의 종점에 묻혀 있고, 가장 단맛을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쓰디쓴 엿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직후였다.
별안간 아데샨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여보. 저거 좀 봐.”
“응?”
고개를 들었다. 황혼기의 하늘이 관보처럼 펼쳐져 있었다.
보라색으로 녹아내리는 석양이 낮의 종말과 밤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앞머리를 뒤집는 바람에는 들꽃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다웠다.
이걸 보기 위해 세상을 구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그러게. 죽이는데.”
“비가 안 와서 다행이야. 배웅하기에 딱 좋은 날씨잖아.”
아데샨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장대비가 쏟아진다는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픽 웃은 내가 하늘을 향해 외쳤다.
“시타!”
“뺫?!”
화들짝 놀란 시타가 우리 앞에 착륙했다.
나는 아데샨을 공주님처럼 끌어안고 시타의 등에 올라탔다.
거의 동시에 시타가 하늘로 솟구쳤다. 간만의 드라이브다. 긴 꼬리와 날개가 일자로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세상이 작아졌다.
“가, 갑자기 뭐 해?!”
“날이 좋잖아. 더 높은 곳에서 보자.”
“하여튼 당신은···.”
아데샨이 배시시 웃었다. 당황했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유려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내 청혼을 받아들인 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얼굴은 노을 속에서 붉게 물든 채였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서로의 얼굴을 떼어내니 지평선 위로 가라앉는 해가 보였다. 대지를 빼곡하게 뒤덮은 도시에 서서히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물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건···?”
제도의 서편이었다. 낙조를 등지고 있어서 시커멓게 보였다.
종이비행기처럼 생겨먹은 거대한 물체 세 대가 하얀 꼬리를 끌며 솟구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것이 꼭 하늘로 돌아가는 별 같았다.
아데샨이 눈썹을 치켜떴다.
“별의 배야. 그렇게 난리를 떨더니 결국 쐈네.”
“아, 그게 오늘이었어?”
“응. 첫 번째 목적지는 달이라고 했던 것 같아.”
들었던 것도 같다.
고대 다인하르의 유적에서 단서를 얻어 제작된 별의 배.
대머리 거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이냐는 우주 진출 반대파와,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지 않는 것은 하늘에 대한 모독이라는 찬성파가 매일같이 싸움을 벌였었다.
저 모습을 보니 결국 찬성파가 이긴 듯했다. 아카샤의 평행세계 대작전이 이렇게 완벽한 비밀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저 배가 이목을 끌어준 덕도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우리도 언젠가는 다른 별에 갈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 다 이런 거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쩌면 미래는 벌써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석양을 종단하는 비행운이 아름다웠다.
멍하니 별의 배를 지켜보던 내 입술 사이로, 조금 메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녀와라. 아카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내일을, 그렇기에 기대되는 미래를.
나는 기꺼이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