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7)
48. 일단락
#48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비로제는 바닥에 널브러진 돌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이 자를 포박해라.”
“포박···말입니까? 어디를···우욱.”
돌란을 둘러싼 수위들이 주춤거렸다. 그의 상태는 양념을 골고루 스며들게 하기 위해 칼집을 낸 고기 같았다. 미리 구역질을 해 둔 로난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폭풍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저 위력이라니.’
원래 오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빨리 오러를 개화하고 싶었다. 폭풍검이나 만사 같은 게 거인들에게 통한다면 정말로 싸워 볼 만 할지도 모른다.
‘그럴려면 좆같은 저주부터 풀어야 하는데.’
우선 마나를 느끼고 다룰 줄 알아야 뭐가 될 터였다. 자연스레 해주에 생각이 미쳤다. 그때 돌란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기침을 토했다.
“커헉!”
“이, 이봐!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돼!”
당황한 수위 몇 명이 포션을 가지러 달려갔다. 중갑을 입고 있어서 뛰는 속도가 느렸다. 로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기랄, 시타. 딱 뒈지지 않을 만큼만 고쳐 놔.”
“뺘빠.”
시타의 눈앞에 치유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돌란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연행되었다. 사태가 일단락되고, 잠옷 차림의 나비로제가 팔짱을 낀 채 두 소년 앞에 섰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옷 죽이네요.”
“닥쳐라.”
나비로제가 도끼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로난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잠옷에는 작고 귀여운 뱀 그림이 패턴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4년간 그랑시아에서 근무하던 호위 기사가 배신했습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슐리펜이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호위 기사 돌란의 배신, 야밤의 기숙사 습격···네뷸라 클라지에라는 단어를 들은 나비로제의 얼굴이 굳었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군.”
“네. 저 자가 끝이 아닐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당장 그랑시아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도록. 교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슐리펜은 곧장 자신의 말을 타고 그랑시아 영지로 떠났다.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로난은 멀어지는 슐리펜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싸가지 없는 놈.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가네.”
“그만큼 긴급한 상황이니까. 그나저나 용케도 슐리펜을 끌어들일 생각을 했군. 잘 했다.”
“수상쩍은 놈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거든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슐리펜의 한 마디는 자신의 천 마디보다 그랑시아 공작에게 큰 영향을 미칠 터였다. 문득 전생의 사건을 떠올린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그나저나 그렇게 강한 아저씨가 왜 죽었을까.’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공작은 몇 년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혹한의 검 페일 로드는 그때 자취를 감추고, 거인들이 내려오기 직전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아니, 누구한테.’
아마도 네뷸라 클라지에일 가능성이 크겠지. 물론 돌란 따위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지만, 무서운 것은 그런 작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 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랑시아 공작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를 첩자로 심을 정도라면 틀림없이 다른 곳에도 수많은 끄나풀이 심어져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 여기 필레온에도.
장기전을 예측한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답답한 나머지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기숙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닿았다.
“···그런데 저는 이제 어디서 자죠?”
불현듯 떠올랐다. 망할 놈의 돌란 때문에 방이 완파되었다. 야영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나비로제가 무신경하게 말했다.
“그 문제가 있었군. 일단 내 숙소라도 올 테냐?”
“···예?”
로난의 몸이 굳었다. 한순간 만사가 발현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뱀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교관님 방이요? 진짜로?”
“그래. 공간은 충분하다. 오히려 쓸데없이 넓지.”
알고 있다.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본능적으로 나비로제를 훑은 로난이 침을 삼켰다.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과연 남부 출신. 펑퍼짐한 잠옷 위로도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이 제안, 나쁘지 않을지도.
“그렇다면···염치 없지만···.”
로난이 참으로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따라가려는 차였다. 우웅!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뒤집히며 로브를 입은 노신사가 나타났다.
“늦은 시간에 고생 많았네.”
“에이 씨팔, 깜짝이야···교장님?”
“간만이네, 로난 군.”
뒤집힌 공간에서 등장한 것은 필레온의 교장 크라바 크라티르였다. 그가 나비로제에게 말했다.
“방금 막 지하 감옥에 수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아무래도 보안을 훨씬 더 강화해야 할 것 같군. 학생들이 사는 기숙사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조금 전에 슐리펜이 그랑시아 가로 출발했습니다.”
“그래. 방금 확인했다네. 말과 함께 영지 근처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일세.”
크라티르의 얼굴에서 평소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만 봐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크라티르는 마법과 본관에서 발현된 마나 실드가 부지 전체를 뒤덮는 장면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로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마음을 놓았군. 자네와 슐리펜 군 덕이야.”
“뭘요, 갑자기 쳐들어 왔길래 조졌을 뿐이에요.”
“후후, 자네는 언제나 대수로운 일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군. 그러고 보니 우연찮게 들었지. 당장 잘 곳이 없다면 오늘은 나랑 같이 가세.”
“예? 아뇨, 저는 이미···”
“사양할 것 없네. 자, 가세나.”
“자, 잠깐!”
크라티르가 로난의 손목을 잡았다. 로난이 미처 뭐라 할 새도 없이 다시 공간이 뒤집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멍하니 서 있던 나비로제가 발걸음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정신 사나운 밤이군.”
****
“교장님이 다 망쳤어요.”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로난이 텅 빈 눈으로 뇌까렸다. 구릿빛 피부 미녀와의 동침은 백 년 묵은 노친네와의 독대로 바뀌었다. 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빌어먹을···아무것도 아니예요.”
이 늙은이가 8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수염에 불을 붙였을 터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죠?”
로난의 눈앞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어느 높은 바위산의 정상처럼 보였는데, 확실히 제도 근처는 아닌 것 같았다. 크라티르가 수염을 만지며 미소지었다.
“바람을 쐬고 싶을 때 종종 오는 곳이지. 경치가 참 좋지 않은가?”
“좋긴 하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경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는 찬란한 별의 바다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는 새하얀 구름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포효하며 불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잠을 잘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미안하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저랑요?”
“그래. 먼저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 그란 카파도키아 사태도, 오늘 벌어진 습격 사건에서도 자네가 결정적인 활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네.”
크라티르는 구름의 바다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는 지하의 장인들을 구한 것,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조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점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막 오늘 벌어졌던 기숙사 습격 사건에 대해서도.
“정말 고맙네.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으로서도, 인간 크라바 크라티르로서도 감사하는 바일세. 자네의 활약 덕에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걸세.”
“그냥 할 수 있어서 한 일이에요. 아, 나중에 아셀이랑 마르야한테도 고생했다 해 주세요. 그 밥맛 없는 놈한테도.”
“후후, 물론이지 내 제대로 전달하겠네.”
크라티르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전대미문의 신입생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운명이 만남을 주관했다는 느낌. 코흘리개 시절, 대마법사 로르혼에게 제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을 때나 느껴졌던 감정이 다시금 피어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크라티르가 말을 이었다.
“헌데 그것과는 별개로 요즘들어 자네의 얼굴에 근심이 깊어 보여서 말일세.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나?”
“고민거리요? 음···있긴 하죠.”
“괜찮다면 털어놔 보게. 이 늙은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도와줄 테니.”
“으으음···.”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이걸 벌써 말해도 되나 고민이 되었다. 크라티르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벌어졌던 좆같은 돌란 사태가 경각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매사에 이런 식으로 굴다가는 달라지는 것이 없을 터였다. 머지않아 결심한 로난이 크라티르를 바라보았다.
‘마나는 깨끗해.’
아까도 확인했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에서 네뷸라 클라지에의 불쾌한 반짝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로난이 크라티르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교장님. 제 말을 한 번씩만 똑같이 따라해 주실래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으음? 알겠네.”
“별의 도래는 별빛을 맞이하는 날.”
“별의 도래는 별빛을 맞이하는 날?”
“아하유테 개새끼.”
“아하유테···개새···끼···?”
크라티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따라했다. 머리가 부풀거나 폭발할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좋아요 교장님. 저는 저주에 걸려 있어요.”
“저주?”
크라티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세크리트에게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난은 담담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아홉 개의 저주를 품고 있다는 말을 들은 크라티르의 눈이 커졌다.
“허어···그런 일이. 마나를 못 다루던 것은 그 때문이었군.”
“네. 중대한 문제에요. 저는 제가 마나를 쓸 줄 알게 되면 슐리펜도 발가락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발가락은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제국의 샛별에 근접하는 재능은 자네밖에 없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말인데요 교장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 주겠네.”
로난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크라티르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잘 된 일이었다.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동아리를 만들고 싶어요.”
“동아리?”
“네. 그런데 이게 좀 특수한 동아리라 교장님의 허락이 필요해요. 참, 고문은 바렌 파나시르 교수님이 맡아주기로 했어요.”
“바렌 그 친구가···? 무슨 동아리지?”
크라티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로난은 필레온에 입학하기도 전에 세워 놨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크라티르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이거 참···상당한 논란이 일어날 것 같군···.”
“혹시 힘들까요?”
“아니, 계속해 보게. 흥미롭구먼.”
두 개의 바다는 머리 위와 발치에서 표표히 흐르고 있었다. 로난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까지 어째서 자신이 교복을 입은 채 손에 피를 묻혀야 하며, 온갖 위험한 오지를 누비고 다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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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필레온의 대광장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날 나바르도제 관을 습격한 괴인이 로돌란에 호송되는 장면을 보기 위함이었다.
-퓌요오오오!
필레온의 대광장에는 그리폰이 끄는 호송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인파가 갈라지며 수위들에게 둘러싸인 돌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팔과 왼쪽 눈,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그는 전날 입던 넝마를 그대로 입은 채 두꺼운 쇠사슬에 감겨 있었다. 인수인계를 지켜보던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로돌란에 가게 될 돌란. 어감이 좋군. 안 그래?”
“······”
“가면 즐거울 거야. 카라카라는 변태 영감쟁이가 너를 귀여워해줄 테니까. 안 그래도 시릴라의 귀가 거의 사라졌을 것 같거든.”
돌란은 로난을 노려보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새부리 가면을 쓴 간수들이 그를 차량에 태웠다. 문이 닫히기 직전, 돌란의 입이 벌어졌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엉? 뭐라고?”
쾅. 문이 닫혔다. 곧장 이륙한 호송 차량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학생들은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장난 아니네···착하게 살아야겠다···.”
“야! 그리폰 깃털이나 얼른 주워!”
로난은 눈살을 찌푸린 채 돌란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개소리였으면 좋겠는데.’
고민해 봐야 당장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뒤면 심문관 카라카가 비명 사이에서 추려낸 답변을 전해줄 터였다.
로난은 그대로 바렌의 집무실로 향했다. 연행당하는 모습을 확인해서 그런지 발걸음이 경쾌했다.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네~들어오세요.”
맨손으로 들소의 목을 뽑아버릴 수 있는 웨어라이온은 꿈새 마르페즈를 어깨 위에 얹은 채 홍차를 내리고 있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바렌 파나시르가 활짝 웃었다.
“오, 로난 학생. 잘 지내셨나요? 잘 됐군요. 막 차를 내린 참이었는데.”
“차는 됐어요. 약속을 지킬 시간이에요. 바렌.”
“약속···말인가요?”
바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시간이 제법 지나서 잊을 만도 했다.
의미심장하게 웃은 로난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바렌은 마르페즈와 함께 로난이 내민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동아리 창설 허가서···특급 모험 동아리···고문 교수는···바렌 파나시르?”
-피이?
[적극적인 외부 활동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고, 나아가 제국에 기여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부가적인 단련을 행하는 모임.]크라티르의 서명 아래 있는 ‘동아리 창설 사유’ 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일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