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59)
60. 중간 평가(2)
#60
기껏해야 지명제 대련으로 추측하고 있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별안간 나비로제의 옆에 서 있던 크라티르가 손뼉을 쳤다. 짝! 로난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어?”
일전에 크라티르에게 납치당했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다행히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장육부가 꿀렁이는 느낌과 함께 다시 눈앞이 밝아졌다. 낯선 풍경을 목도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제기랄.”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눅눅한 해풍에서는 소금 냄새가 났다.
로난은 고개를 처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 없이 암석만으로 이루어진 바닷가는 짙은 회색을 띠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단애절벽 아래로 검푸른 파도가 부딪치고 있었다.
‘섬···인가?’
육지 쪽에는 거대한 활엽수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원시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아데샨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손발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와아아···이게 크라티르 님의 공간 마법이구나. 직접 당해보는 건 처음이야.”
대부분의 학생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도 모르는 곳이에요?”
“응? 으응. 중간 평가를 보는 장소는 매번 바뀌거든. 맞다! 너 갑옷!”
“다들 주목.”
아데샨이 다시 경갑을 벗으려던 차였다.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바닷바람 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한 손에 웬 트렁크 가방을 든 채 학생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인원을 파악한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좋아. 빠진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중간 평가의 규칙을 설명하겠다.”
“네!!”
“다들 알다시피 내 수업은 ‘실전’을 지향한다. 마음만 같으면 너희를 모두 남부의 전쟁터에 견학이라도 보내고 싶지만···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지.”
학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로난만이 입술을 둥글게 말며 감탄했다. 전쟁터라.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군.
“그래서 대체재로 구상한 게 이번 중간 평가다. 너희는 이 좁은 섬에 무작위로 배치되어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다들 이걸 봐라.”
나비로제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방 안쪽에는 검고 가느다란 팔찌가 족히 백 개는 넘게 들어 있었다. 그녀가 설명을 이어갔다.
“시험을 위해 고안된 인식 팔찌다. 이걸 차는 순간 너희는 섬의 무작위한 장소로 전송될 거다. 탈락자를 가리는 장치기도 한데, 벗겨지거나, 죽음에 이르거나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을 것 같으면 착용자를 강제로 필레온으로 이동시킨다.”
“허.”
로난이 헛웃음 쳤다. 값비싼 공간 계열 마도구가 저렇게 대량으로 있는 것은 처음 봤다. 저런 물건들을 고작 시험을 위해 사용하다니, 필레온 아카데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나비로제의 말은 상대가 죽을까 봐 걱정하지 말고 싸우라는 의미였다.
“다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의료진과 필레온에서 제일가는 치유술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부상을 입은 채 이송되어도 즉시 치료받을 수 있다.”
또한 그녀는 별도의 반칙 규정은 없다는 말은 덧붙였다. 요컨대 기습을 하나 팀을 짜서 한 명을 공격하나 제지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래서 다들 그렇게 차려입고 온 거군.’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수업에는 쓰지도 않는 원거리 무기나, 몸통만한 배낭을 들고 온 학생도 심심찮게 보였다.
“후우···긴장된다. 우리 마주치면 같은 편 할래?”
“나쁘지 않지. 나도 솔직히 좀 무서워.”
“키키키, 이번에도 후배들 잡는 재미가 쏠쏠하겠구만.”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져갈 무렵이었다. 나비로제가 학생들을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럼, 한 명씩 나와서 인식 팔찌를 가져가도록.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묵묵히 걸어 나온 슐리펜이 팔찌를 착용했다. 한순간 그의 형체가 일그러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데샨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다음, 아데샨.”
“후···혹시 마주쳐도 절대 절대 봐주지 마. 알았지?”
“노력할게요.”
“아하하, 그게 뭐야. 그럼 나중에 보자!”
팔찌를 찬 아데샨이 사라졌다. 머지않아 근처에서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뭐야, 조수 아냐? 쟤는 무슨 생각으로 온 거래?”
“쟤랑 마주친 사람은 완전 거저네. 한 명은 먹고 들어가는 거니까.”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저런 새끼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방금 대화하던 학생을 찾아 주위를 훑는 와중이었다.
“다음, 로난.”
“예.”
나비로제가 로난을 호명했다. 로난이 발걸음을 옮기자 수강생 무리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대머리가 된 카르단과 면접 때 족친 꼴통들 덕이었다. 3학년 이상의 상급생들 사이에서 로난의 별명은 ‘선배 파괴자’ 정도로 굳혀져 가는 중이었다.
로난이 팔찌를 집어들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나비로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해라.”
“실전이 중요하다는 교관님의 말, 저도 동의해요.”
“너···”
“안녕.”
로난은 팔찌를 착용했다. 곧장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드높은 나무들이 사방에 솟아나 있었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이 아까 멀리서 봤던 숲의 한복판으로 보였다.
“유령이···털을 잡아 뽑는 것 같군.”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공간 마법은 정말이지 겪어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만. 이거 내가 베도 되는 게 맞나?’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무기에 닿은 마나를 벨 수 있었다.
실전처럼 하라 해서 신나게 칼부림을 하다가 학생의 목을 잘라 버리면 그보다 재미없는 일도 없을 터였다.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차였다.
갑자기 다섯 걸음 정도 앞의 공간이 일렁이며 남학생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남학생은 곧장 경계 태세를 취하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바짝 얼어 있는 것이 여간 긴장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친 로난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보냈다.
“안녕.”
남학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손에 든 폴암을 움켜쥐며 외쳤다.
“너, 너는!”
“진정해, 진정. 혹시 본인 운이 좋다고 생각해?”
“죽어라!”
별안간 남학생이 폴암을 앞세우며 질주해 왔다. 마나를 머금은 창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자세를 낮췄다. 후우웅!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머리 위로 푸른 호가 그려졌다.
“거 씨발 진정하라니까.”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두 번의 검격이 창대를 향해 쏘아졌다. 남학생이 폴암을 거둬들이려는 순간이었다.
쿵! 창대가 세 토막이 남과 동시에 폴암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로난은 황망한 표정을 짓는 남학생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아악!”
“생각할게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로난은 칼끝을 남학생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뭐 알아낼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차였다. 이를 악물며 부들거리던 남학생이 갑자기 상체를 거칠게 일으켰다.
“젠장! 날 모욕하지 마!”
“어?! 얌마!”
칼끝이 남학생의 목울대에 막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푹. 살이 아닌 무언가를 찌르는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슈욱! 별안간 학생의 형체가 일그러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참을 벙쪄 있던 로난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방어막 계열이 아니라 위협을 감지해서 전송시키는 형식이라 참변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머지않아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그럼 막 해도 되겠네.”
불현듯 나무 위를 겨냥한 로난이 라만차를 던졌다.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라만차가 빽빽한 이파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파삭! 칼이 이파리 반대쪽으로 튀어나옴과 동시에 가죽옷을 입은 소녀 한 명이 나무 위에서 추락했다.
“꺄아아아악!”
그녀의 손에는 기다란 활이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낙법을 펼칠 새도 없이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본래대로라면 목이 부러지며 절명해야 할 높이였다. 하지만 땅에 정수리가 닿으려는 찰나 그녀의 형체가 일그러지듯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진 자리 위로 잔가지와 화살이 우수수 떨어졌다.
“기척을 좀 더 감췄어야지.”
낄낄거리며 걸어간 로난이 라만차를 주워들었다. 싸움이 아닌 다른 종류의 죽음에도 마법이 발동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정도의 안정성은 갖춰야 이딴 정신 나간 시험을 치룰 수 있을 터였다.
경쟁자는 얼추 백 명을 조금 넘는 것 같았다. 로난은 파도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다.
“네, 네놈은!”
서걱.
“흐아아악! 나, 나는 약해···! 다른 놈들을···!”
서걱.
숲을 빠져나올 때 까지는 두 명의 학생을 더 마주쳤다. 한 명은 덤벼들려 했고, 한 명은 도망쳤는데 둘 다 보자마자 베어 버렸다. 로난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피가 안 튀니까 영 써는 맛이 없네···.”
머지않아 절벽과 장대한 지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는 난생처음 보는 심후한 암청색을 띠었다. 절벽은 작두로 썰어낸 것처럼 예리했는데, 바다와의 고저 차가 족히 삼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캉···!
캉···!
그때 웬 금속음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소리의 결이 예리한 것이 날붙이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 같았다.
“음?”
로난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학생들이 박터지게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한 명의 얼굴을 본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데샨?”
칼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생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과연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그런지 검술을 펼치는 자세가 정석에 가깝게 훌륭했다. 로난이 혀를 찼다.
‘···칼이 너무 느려.’
하지만 그럴싸한 모양새와는 달리 전투 자체는 완전한 열세였다. 신장이 머리 하나가 넘게 차이 남에도 아데샨이 밀렸다. 그녀와 검을 맞대고 있는 여학생이 깔깔거렸다.
“아하하! 조금 더 저항해 봐!”
“크윽···!”
사실은 한쪽이 가지고 놀고 있는 편에 가까웠다. 아데샨이 롱소드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여학생은 가볍게 어깨를 비틀어 공격을 피한 뒤 아데샨의 배를 걷어찼다.
“커억!”
“행운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
로난의 눈이 커졌다. 대기 장소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아데샨이 연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카챠!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해···!”
“싫어, 더 가지고 놀 거야. 키가 크고 예쁘면 뭐 해? 이렇게 약한데.”
아데샨이 입술을 짓씹었다. 카챠라는 여학생은 일부러 치명타를 피해서 검격을 날리고 있었다. 핏! 아데샨의 어깨에 옅은 자상이 생겼다.
카챠의 입가에 다시 잔망스러운 웃음이 드리우는 찰나였다. 한순간 스산함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로난의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두 번의 찌르기가 여학생을 향해 쏘아졌다.
촤아악! 어깻죽지로 파고들었던 칼날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꺄아아아아악!”
“좆밥 데리고 놀면 재밌냐? 나도 재밌다.”
쾅! 로난은 그녀의 가슴을 걷어차서 뒤로 넘어뜨렸다. 치명상이나 불구가 될 정도의 부상은 아니라 전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데샨이 당혹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로, 로난?!”
“아, 그래. 마무리는 선배가 해요.”
로난이 턱 끝으로 카챠를 가리켰다. 양 팔을 못 쓰게 된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서 아까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챠가 아데샨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아, 아데샨! 살려줘···! 우린 동기잖아!”
아데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두어 차례 한 그녀가 칼을 휘둘렀다. 깔끔한 파공음과 함께 카챠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데샨이 칼끝을 땅에 박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잘했어요. 보통은 안 죽는 걸 알아도 주저하는데.”
“···일단 고마워. 여기서 뭐 해?”
“그냥 시끄러워서 온 거예요. 지금은 선배를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고.”
로난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한순간 아데샨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일시적이지만 눈앞의 소년과는 서로 칼을 겨눠야 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로난은 이 섬에 있는 상대 중 가장 위험한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자루를 꽉 움켜쥔 아데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봐주지 마.”
“그건 내 맘이죠. 좀 걸을까요?”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멋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곧이어 나란히 선 두 사람이 해안 절벽을 따라 걸었다.
“경치 좋네요. 바다 색만 보면 남녘해 같은데 어딘지를 모르겠네.”
“왜 안 베는 거야? 이런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그러게, 계속 고민되네요. 선배는 나를 참 힘들게 해요.”
“···그게 무슨 뜻이야?”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요 근래 통틀어서 아데샨의 처우에 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돌란 사태를 겪었을 무렵보다 훨씬 더.
‘너무 위험해.’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싸움은 점차 격해질 터였다. 대륙의 구석구석에 브리기아같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제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존재했던, 유서 깊은 개자식들과의 전쟁은 사란테의 말마따나 굉장히 길고 고될 터였다.
로난은 고개를 살짝 들어 아데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잿빛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높고 날카로운 콧대가 도도하게 솟아 있었다.
전생에는 잘 몰랐는데 참 예쁜 사람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이 해풍 속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쓰게 웃은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음, 좋아. 결정했어요.”
“결정?”
“칼 뽑아요. 아데샨.”
절벽을 등지고 선 로난이 아데샨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로난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칼 안 쓸게요. 그리고 선배의 공격이 한 번이라도 나를 스치면 내가 진 걸로 할게요.”
“지금 장난해···? 너도 카챠처럼 날 가지고 노는 거야?”
“장난도, 갖고 노는 것도 아니예요. 대신 선배가 지면···”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들러붙은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헛짓거리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옷감이나 잘라요. 그 한마디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로난이 말을 이으려는 차였다.
“지면?”
“그러니까···헛짓거리···니미!”
갑자기 로난이 아데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아데샨의 허리를 감싸며 뒤로 확 끌어당겼다.
“꺄아악!”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뭐라 소리치려는 차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곧이어 큼직한 무언가 아데샨이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 기둥이 솟구쳤다. 사색이 된 아데샨이 뒷걸음질쳤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허, 이걸 살리네.”
흙먼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느끼한 중저음이었다. 이윽고 흙먼지 속에서 웬 중갑 차림의 대머리 하나가 걸어나왔다. 그의 어깨에는 무식하리만치 큰 전투망치가 비스듬이 걸쳐져 있었다.
“반갑다. 로난. 소문 많이 들었어.”
“너는 뭐냐?”
“에이운 달란이다. 잠깐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로난에게 붙은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사, 삼학년 수석이야···!”
에이운은 나비로제의 수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전투망치의 달인이었다. 그를 반증하듯 방금 망치가 떨어졌던 자리가 운석이 떨어진 듯 파여 있었다.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에이운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용건이나 말해. 한창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씨팔놈이···.”
“역시 소문대로 거치네. 뭐, 용건은 별 거 없고···여러가지로 우리 학년의 여론이 안 좋아서 말이야. 수석으로서 응징 비슷한 걸 하러 왔어.”
에이운이 망치 머리를 바닥에 내렸다. 쿵! 단순히 내려놨을 뿐인데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3학년이 되면 입으로 똥 싸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냐?”
“뭐, 겸사겸사 유망한 후배를 계도하려는 것도 있어. 실력에 취하면 오만해지기 마련이거든. 너처럼. 시험 초창에 탈락해 버리면 그 콧대도 조금 꺾이겠지.”
“에이운. 다 잡고 왔어.”
쾅! 쾅! 그때 또 다른 덩치 두 명이 에이운의 양옆에 착지했다. 둘 다 에이운과 비슷하게 생겨먹은 대머리였다. 빡빡이 삼인조를 본 로난이 코웃음 쳤다.
“끼리끼리 몰려 다니는구만. 쪽팔리지도 않냐?”
“실전에서는 체면을 차리면 안 되지.”
“뭔 개소리야. 민둥산 셋이 몰려다니면 안 쪽팔리냐 물어본 건데. 인간적으로 잔디라도 뽑아서 머리에 심어 인마.”
“······넌 정말 안 되겠다.”
별안간 에이운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후우웅! 전투망치가 무식한 호를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로난은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피했다. 콰아아앙! 망치가 로난이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쩌저적. 균열이 퍼져 나감과 동시에 로난이 서 있던 절벽 귀퉁이가 통째로 분리되었다. 로난이 피식 웃었다.
“같잖은 짓거리를 하네.”
로난이 가볍게 도약하며 올라오려는 차였다. 에이운의 뒤에 있던 덩치 두 명이 로난에게 몸을 날렸다. 함께 절벽으로 떨어질 심산이 아니고서야 나오지 못하는 동작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서걱! 튕기듯이 쏘아진 검격이 두 사람의 머리와 옆구리를 찢어 놓았다. 머리가 찢긴 학생이 일렁이며 사라졌다.
다른 한 명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부상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로난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대머리와 로난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로난이 절벽 위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아데샨.”
콰아앙!
그때 위쪽에서 다시금 흙먼지가 폭발했다. 에이운의 망치가 한 번 더 내리꽂힌 모양이었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라만차를 역수로 틀어쥔 그가 대머리 2호의 등에 칼을 꽂았다. 머지않아 대머리의 형체가 사라지며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지상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