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4)
65. 수전노
#65
나비로제는 세상 감질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음을 흘리던 그녀가 언짢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사람 한 명을 알려줄 테니 찾아가 봐라. 평소에는 영 글러먹은 놈이지만, 마나를 다루는데 만큼은 어느 정도 조예가 있으니까.”
“못 써먹을 놈이라니, 누군데 그래요?”
“필레온에 들어오기 전부터 면식이 있던 주문쟁이지. 가능한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나비로제는 두통을 참듯 눈을 감았다. 뭔가 일이 커질 것을 예감한 로난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기, 교관님. 이거 저주랑 연관된 거 같은데 그냥 바로 가 보면 안 될까요?”
“가다니. 어디를 말이냐.”
“여명 마탑이요. 어찌어찌 단서를 얻었거든요.”
“운도 없군. 여명 마탑이라면 지금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예?”
“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못 들었나?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씨발, 뭐라고요?”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비로제는 그랑시아 가처럼 다섯 마탑에서도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여명 마탑에서는 세 명의 조직원이 검거되었다. 도주에 실패한 그들은 마나 역류를 활용한 폭발을 일으키며 자폭했다고 했다.
“꽤 큰 폭발이었다고 들었다. 정원의 삼 할 정도가 날아갈 정도였다고 했으니.”
“많이 죽었어요?”
“아니. 자폭한 네뷸라 클라지에의 조직원을 제외하고 사망자는 없었다. 조기에 발견한 덕에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 하지만 뒷수습에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씹새끼들···.”
로난이 이마를 짚으며 뒷걸음질쳤다. 폭발이 건물이 아닌 정원에서 일어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곤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령 사란테의 반지가 신분증 역할을 해 주어 출입이 가능하다 해도 혼란통에는 조사에 애로가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보아하니 일이 틀어진 것 같은데, 일단 내가 소개해 주는 놈을 찾아가 봐라. 혹시 도움이 될 줄 누가 알겠나.”
“그래야겠네요···.”
“아데샨, 세 달 전에 마나가 엉킨 수강생들을 데려갔던 곳을 기억하고 있나?”
“아, 넵! 자로딘 님의 집무실 말씀이시죠?”
자로딘이라는 이름을 들은 나비로제가 재차 미간을 좁혔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 앞에서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래···자로딘. 지금은 지쳤을 테니 휴식을 취한 뒤 찾아가 봐라. 아데샨이 안내를 해 줄 거다.”
“그렇게 할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고생했다.”
로난은 아데샨과 함께 1 투기장을 나섰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본 나비로제가 거슬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키는 사내놈 쪽이 큰 게 보기 좋은데 말이지···.”
늦은 오후의 햇살이 교정을 비추고 있었다. 거지꼴인 그들과 달리 멀끔한 차림새의 학생들이 거리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아데샨이 서서히 익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긴 꿈을 꾼 것 같아. 아직도 해가 안 졌다니.”
“그러게요.”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 구해줘서 고맙고, 재미없는 얘기 들어줘서 고맙고, 또···”
“됐어요. 그나저나 잘 된 일이네요.”
“응? 뭐가?”
“그 자로딘이라는 작자가 마나의 전문가라면서요. 선배가 품고 있는 그림자의 마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모르죠. 영 감이 안 잡혔는데, 다행이다.”
아데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던 하루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제야 아데샨은 이름 모를 섬의 언덕 위에서 로난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맞아, 그거 이야기 좀 해줘. 그림자의 마나라니?”
“저도 진짜 잘 모른다니까요.”
사실이었다. 로난은 아데샨이 그러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것과 그 무시무시한 능력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아데샨이 토라진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치사해.”
“모르는 걸 어떡해요. 그런데 각오는 되어 있어요?”
“무슨 각오···?”
“대장군이 될 각오지 뭐겠어요. 제가 돕겠다고 한 이상 선배는 무조건 대장군이 돼야 해요.”
“그야···.”
“그 아래 단계의 장교도, 금군장도 안 돼요. 오직 대장군. 제국군의 정점에 군림하는 그 직책만이 의미가 있어요.”
그리 말하는 로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노을빛 눈동자가 매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괜스레 심호흡한 아데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
“좋아요.”
로난이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더 바빠질 것 같았다. 그들은 각 기숙사 건물로 뻗어 있는 세 갈래 길에서 헤어졌다. 아데샨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 전까지 세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담뱃대를 빼 문 로난이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옛 상관에 대한 사과였다. 그녀의 유언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한배를 탄 아데샨의 인생에는 앞으로도 바람이 잘 날이 없을 터였다.
로난은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구름이 붉게 젖을 무렵이 되어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기숙사로 가기 전에 동아리 건물에나 들러볼 심산이었다. 문득 혈마법을 연구하겠다며 떠난 오필리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연락이 안 온 지도 한참 됐네.’
편지는 바이디안 산맥으로 떠나기 직전에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불길함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쑥 치켜들었다.
‘이 모기 같은 계집애가 설마 먹고 튄 건가?’
한번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막 동아리 건물에 들어서는 차였다. 뒷짐을 진 채 지도를 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늦었군. 로난.”
“···이제 할 말도 없다.”
슐리펜은 어느새 깔끔한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단정하게 빗어진 머리를 본 로난이 고깝다는 듯 혀를 찼다. 더는 옷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넝마를 걸치고 있는 자신과 완벽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여전히 지저분하군. 너와 네 동료들은 청소라는 행위의 개념을 모르는 건가.”
“그딴 말을 지껄일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몸은 멀쩡하신가 봐?”
“네가 일어나고 정확히 오 분 뒤에 내 치료가 끝났다. 이곳 치유술사들의 수준도 나쁘지 않더군.”
“잘나셨어. 그래서 무슨 일이냐? 청결 상태를 지적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받아라.”
다가온 슐리펜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무슨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라도 들어 있을 것처럼 고급스러운 봉투에는 그랑시아 가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로난은 무성의하게 봉투를 뜯었다. 예상과는 달리 평범한 종이 한 장만 달랑 들어 있었다. 종이를 꺼내 펼친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참여 빈도를 조정 가능하다는 조건은 기억하고 있겠지.”
동아리 입부 신청서에는 슐리펜의 인적사항이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로난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려왔다. 대륙 최고의 재능이 자신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당연하지. 입부를 환영한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로난이 손을 내밀었다. 슐리펜은 악수에 응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뭔데?”
“나와 매일 대련해라. 동아리 활동과 무관하게.”
“그건 니가 안 말해도 할 거였어.”
로난이 코웃음 쳤다. 슐리펜은 그제야 로난의 손을 맞잡았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 새끼···.’
꼭 발뒤꿈치를 만지는 것 같은 촉감이었다. 아직 덜 여문 손바닥은 딱딱한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노력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층이었다.
‘재능으로만 일구어진 천재가 아니었나.’
로난이 피식 웃었다. 악수를 마친 슐리펜이 별안간 사일런트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그의 입에서 어떠한 사명감마저 느껴지는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이릴 양의 이사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지. 이제 나도 부원이니까 자격이 생겼을 터.”
“나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오면 안 되냐?”
슐리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난은 달이 뜰 때까지 그 미치광이의 계획을 경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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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흐리기는 했지만 비가 내릴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인상을 주는 회백색 구름이 하늘에 고르게 발라져 있었다.
로난과 아데샨은 곧장 자로딘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무실은 필레온 외곽의 41번탑에 자리해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아데샨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우으음···자로딘 교수님을 찾아뵙는 건 오랜만이네···.”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난 적이 있댔죠.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이예요?”
“마법과에서 마나 운용 과목을 담당하는 교수님으로 알고 있어. 나비로제 교관님과는 친구 사이고.”
“우리 교관님이 친구도 있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가끔 말하는 걸 보면 맞는 거 같아.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인정하는 걸 보면···.”
아데샨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업을 하다 보면 가끔씩 마나가 엉키거나 코어가 굳어서 마비 상태에 빠지는 학생들이 나온다고 했다.
어지간한 경우는 나비로제가 해결이 가능하지만, 모든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을 때는 결국 자로딘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했다.
저번에 아데샨이 찾아갔을 때도 그런 경우였는데, 나비로제가 안간힘을 다해도 풀리지 않던 마나를 자로딘은 손짓 한 번으로 풀어 버렸다고 했다.
“실력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요.”
“응. 무예과도 아니고 마법과에서 마나 운용을 담당하시는 분이니까.”
두 사람은 머지않아 41번탑에 도착했다. 바렌이 있는 으리으리한 13탑과는 달리 굉장히 소박한, 나쁘게 말하면 볼품없는 외형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음산한 기운마저 풍기는 거무튀튀한 탑 위로는 갈가마귀들이 선회하며 울어대고 있었다. 로난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대로 찾아온 거 맞죠?”
“으응···저번에도 이러기는 했는데 어째 더 심해졌네···.”
갑자기 탑이 무너지면서 인간의 뼈가 쏟아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선계단을 타고 올라간 그들은 곧 자로딘이라는 명패가 걸린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짝 역시 닳아빠진 것이 썩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데샨이 노크하기 위해 손을 듣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꺄악!”
눈과 뺨이 음푹 들어가서 해골을 연상케 하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아데샨이 튕겨나듯 뒷걸음질쳤다.
“자, 자로딘 교수님!”
“너는 기억에 있는 학생이군. 아직도 그 괴물의 밑에서 조교 노릇을 하고 있나?”
사내는 사슬로 된 걸쇠 뒤편에서 말을 이었다. 자로딘 교수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교수? 저게?’
틀림없이 실험체 중 하나가 탈출한 줄 알았다. 자로딘의 피부는 나비로제와 비슷한 연갈색을 띠었다. 다만 그녀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구릿빛이 아닌, 임종을 앞둔 조랑말의 피부처럼 칙칙하고 핏기없는 갈색이었다.
“네에…그렇습니다.”
“참 대단한 학생이군. 나였다면 진작에 그 쓸데없이 긴 칼을 훔쳐서 도망쳤을 텐데.”
“아하하하···엄격하시긴 해도 좋은 분이세요.”
“아직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만사에 당해 본 적이 없나 보군. 그나저나 나비로제 그 망나니가 또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거지?”
갈라지고 쉬어서 영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침을 삼킨 아데샨이 말을 이었다.
“그, 검기 발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이 있어서요. 한번 교수님을 찾아가 보라 하셔서···.”
“위급상황도 아닌데 나를 찾아오게 하다니, 어지간히 유망한 학생인가 보군. 그래, 너인가?”
그제야 자로딘은 로난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난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눈구멍 안쪽에 쑤셔박히다시피 한 눈동자는 은은한 푸른빛을 띠었다.
“네. 로난이에요.”
“반갑다 로난. 그래, 검기가 잘 안 나온다고?”
“네. 궤가 좀 다른 상황이기는 한데···일단은 그러네요.”
“막 소드 익스퍼트 단계로 진입하는 검사들이 종종 겪는 문제지. 우선 들어오겠나?
그러고 보니 지금껏 대화를 문간에서 나누고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자로딘이 문틈새로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1골드.”
“예?”
“참고로 시간당이다. 나는 바쁜 사람이거든.”
순간 로난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아데샨의 표정이 굳었다. 로난이 벙찐 채 가만히 있자, 자로딘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뭘 그리 표정을 구기나. 필레온 재학생이면 돈도 많을 텐데. 업무 외의 일을 하는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설마 한 사람당 금화 한 닢인가요?”
“과연 유망주다운 분석력이군.”
로난이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당황 어린 표정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가며 뭐라뭐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썩어넘칠 정도로 많던 돈은 불과 며칠 전에 주택 매입으로 전부 써버리고 말았다. 비상금이 있기야 했지만 머나먼 기숙사 건물까지 다녀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돈이 없는데···어떻게 안 될까요?”
“방법이야 있지. 그대로 등을 돌려 돌아가면 된다. 나비로제에게 넉넉잡아 금화 열 닢씩만 받아서 돌아오면 더 좋고.”
로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비로제가 왜 이 작자를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마음만 같으면 같잖은 걸쇠 따위는 당장 라만차로 썰어 버리고 집무실로 돌입해 저 산송장을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었지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니 그럴 수는 없었다.
로난이 턱을 매만지며 신음하던 차였다. 그를 위아래로 훑던 자로딘이 당혹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너 주머니에 그게 뭐지?”
“주머니요?”
“그래. 오른쪽 바지 주머니.”
로난이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사란테의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반지를 본 자로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쾅! 갑자기 문이 닫히더니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걸쇠를 몇 개나 걸어둔 거야?’
소리로 미루어 보아 최소 여섯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쾅! 머지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자로딘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한 푼도 안 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