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8)
68. 자로딘(3)
#68
로난은 조심스레 책을 집어들었다. 반쯤 떨어져 나간 표지에는 제목으로 추정되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부활에…관하여…?”
문득 발치를 굴러다니는 잉크병 수십 개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손때로 얼룩덜룩한 깃털 펜 서너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설마 자기가 쓴 건가?’
아무래도 자로딘이 직접 집필한 책 같았다. 로난이 천천히 낱장을 넘겼다.
매 장마다 날짜와 그날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기록은 제국력 1031년. 무려 17년 전에 쓰인 것이었다.
[···다행히 부패가 진행되기 전에 보존 처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육신은 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다르밧 수도승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릇만 온전하게 유지된다면 수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수냐? 저 여자 이름인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아데샨은 유리관에 손을 올린 채 여인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여인의 나이는 기껏해야 이릴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군.’
그를 반증하듯 책 중간 중간에는 죽음과 부활을 다룬 이야기가 난잡하게 메모 되어 있었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속설이나 종교에서 다루는 사후 세계, 심지어는 흑마법의 일종인 강령술에 관한 정보까지.
바로 옆의 침대에 자로딘을 눕힌 로난이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그는 갓난아이를 다루는 듯한 섬세한 동작으로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오늘도 수냐는 아름답고, 22차 소생 시도는 실패했다. 훈장을 팔아 마련한 돈도 슬슬 떨어져 간다. 간만에 나비로제가 찾아왔다. 아내를 보고 가라 권유했더니 내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북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모든 직위를 반납하고 만월 마탑에서 나왔다. 명예 따위는 눈 밑에서 썩어가는 낙엽보다 가치가 없다. 돈이 더 필요하다.] [크라티르의 도움을 받아 수냐를 옮길 수 있었다. 오늘부터 나는 필레온의 교수다. 현재로서는 가장 많은 급료를 챙길 수 있는 직장이다.]낱장을 넘길수록 로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필로 적힌 일기에서 유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77차 소생 시도: 금강석 2kg + 오우거의 심장 432g (실패)]읽다 보니 그렇게 돈에 집착하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책에는 수백 차례에 걸쳐 시도된 소생법의 내역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주로 촉매가 필요한 마법이나 연금술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문제였다. 102번째에서 시도한 마법에는 어지간한 집보다 비싼 골드 리저드의 외피가 다섯 장이나 촉매로 사용되었다.
‘제기랄, 시간당 열 닢씩 받아먹어도 부족하겠구만.’
로난은 중간 내용을 넘기고 바로 가장 뒷장으로 넘어왔다. 날짜를 보아하니 어제 적힌 것이었다.
[수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144차 소생 시도를 해야 하는데 순도 높은 장수 종족의 마나와 선혈의 정수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 역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기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책 사이에는 웬 새하얀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제안?’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또 재수 없는 흰색이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시 앞 장을 넘기려는 차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아데샨의 외침이 들려왔다.
“교, 교수님!”
“썅, 깜짝이야.”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쪽지를 챙겼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상체를 일으킨 채 앉아 있는 자로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던 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추태를 보였군.”
“어···정신이 좀 들어요?”
“그래.”
자로딘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비밀 연구실과 동상처럼 굳어버린 두 사람이 보였다.
로난의 손에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집필하고 있는 보고서 겸 일기가 들려 있었다. 자로딘이 말했다.
“아주 잘 드는군.”
슈아아아악! 불현듯 주위의 마나가 자로딘을 향해 모여들었다.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항변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랑 선배는 당신이 내려오라 해서 내려온 거예요.”
“자, 자로딘 교수님. 진정하세요···!”
자로딘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순간이었다. 딱! 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알몸이던 여인의 몸에 하얀 원피스가 입혀졌다.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어?”
자로딘이 몸을 일으켰다. 모였던 마나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유리관 앞으로 걸어간 그가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수냐. 손님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소.”
“자로딘?”
“잊어라.”
“네?”
“내 아내의 벗은 모습을 잊으란 말이다.”
문득 몸을 돌린 자로딘이 로난을 노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안와 속에서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마나를 본 로난이 침을 삼켰다.
‘장난 아닌데.’
지금껏 보아온 마법사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한 마법사였다. 승패를 짐작할 수 없었거니와 싸울 이유도 없었다. 로난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주억거렸다.
“알았어요. 잊을게요.”
“정말이겠지.”
“네. 그러니까 좀 진정해요. 우릴 마법으로 찢어 죽일 생각은 아니죠?”
“···왜 그런 짓을 하겠나. 내 부주의로 벌어진 일인데.”
살기가 가라앉았다. 말하는 걸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했던 짓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로딘이 턱끝으로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헌데 그건 왜 들고 있는 거냐.”
“아, 그러니까···.”
“됐다. 혹시 내용도 읽었나?”
“아뇨. 방금 막 집어들었어요.”
“다행이군.”
비틀거리며 다가온 자로딘이 책을 빼앗았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것이 아직 저주의 여파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에 들어온 학생은 너희가 처음이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알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눈치챘겠지.”
서로를 마주본 로난과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로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탁하마. 비밀로 해다오.”
“당연하죠. 애초에 이런 걸 누구한테 말해요?”
“하기사 그것도 그렇지···로난, 혹시 지금 반지를 가지고 있나?”
“예?”
“기왕 이렇게 된거 지금 추출해 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괜찮겠나?”
로난이 헛웃음 쳤다. 정신을 차리고도 집착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보석이 박힌 반지에서는 사란테의 마력이 은은하게 새나오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요. 안 그래도 몸에서 오래 떼어놓기 좀 그랬는데 잘 됐네요.”
“고맙다. 최대한 빨리해 보지.”
반지를 받은 자로딘이 책상에 앉았다. 그는 정밀한 도구를 활용하여 마력 추출 작업을 개시했다.
로난과 아데샨은 나란히 유리관 앞에 섰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수냐를 올려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엄청 아름다우시다. 그치.”
“네, 뭐.”
“아직 젊으신데···무슨 일이 있던 걸까?”
“글쎄요···.”
시신이 깨끗한 걸로 봐서 병사나 독살로 유추되었다. 로난이 작게 혀를 찼다. 연인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던 터라 완벽하게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로딘의 비밀 공간을 산책하듯 거닐었다. 아데샨은 걷는 내내 이 장소를 머릿속에 통째로 옮겨 버릴 기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가진 통찰력의 기반이 되는 습관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해.’
반면 로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닥만 보고 걷고 있었다. 영문 모를 불안감. 소위 말하는 직감이라는 더듬이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사랑은 안 해봤어도…사랑 때문에 인생을 조지는 놈은 참 많이 봤지.’
징벌병 동기 중에서도 바람난 연인을 죽이거나, 연인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서 붙들려 온 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로난은 아예 사랑을 독의 일종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랑은 드래곤을 자살시키고, 제국의 샛별을 치매 환자로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도 악행을 서슴치 않는 무뢰배로 전락시킨다.
자로딘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 인물이었다. 일기에 쓰인 내용과 행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뭐든지’ 할 위인이었다.
‘혹시라도 그 개새끼들이 유혹해 온다면···.’
그것이 로난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만약 네뷸라 클라지에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며 그에게 접근한다면, 대신 해줬으면 하는 일을 제안한다면, 자로딘은 그것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행할 터였다.
‘그 꼴은 막아야 해.’
로난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얼떨결에 챙겼던 쪽지가 만져졌다. 그때 자로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다···됐다.”
“벌써요?”
두 사람은 자로딘에게 돌아갔다. 그는 끼고 있던 외눈 안경을 빼내며 추출이 끝난 반지를 돌려주었다. 과연 자로딘의 말처럼 배어 나오는 마나에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제대로 추출한 거 맞아요? 뭐 달라진 게 없는데.”
“나도 놀랐다···겉으로 스며 나오는 것보다···훨씬 많은 마력이 내포되어 있더군···.”
자로딘이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다리는 갓 태어난 영양처럼 후들거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지쳐 보이는 것이 마력을 추출하는 일로 상당한 기력을 쏟은 모양이었다. 그는 로난의 어깨를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고맙다···이걸 이렇게 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뭘요. 저도 덕분에 마나 감응에 성공했는데요.”
“너는···내가 이걸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다녔는지 모를 거다···네가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약속의 나머지 부분을 이행하겠다···어려움을 겪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고마워요.”
“그럼···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겠나···? 미안하지만···도저히 눈이 안 떠지는군···.”
“그러죠. 돌아가요, 아데샨.”
로난이 등을 돌렸다. 안 그래도 쪽지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그가 막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잠깐···.”
“예?”
자로딘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로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순간 유령이 등을 핥는 듯한 오싹함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시발, 들켰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로딘이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마나 연공은···매일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재능에 도취되어 노력을 게을리 했다가는 20년으로도 부족할 수도 있다···.”
“···아,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실력 있는 강자들은 싸우는 도중에도 연공을 할 수 있다. 너도 그 목표로 정진해라···.”
로난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자로딘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데샨에게 향했다.
“그리고 너···나비로제의 조교···.”
“네, 교수님?”
“이름이 아데샨이라고 했던가? 너는···한번 날을 잡고 봐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분명 저번에 봤을 때는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심상치가 않아···네게서는 로난과는 또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말을 마친 자로딘이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나지막이 번지기 시작했다.
로난은 아데샨과 함께 41번 탑을 빠져나왔다. 그는 탑이 보이지 않는 대로변에 이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들키는 줄 알았네.”
“괜찮아? 안색이 창백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만요···.”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다. 구름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교정을 뒤덮고 있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로난이 아까 슬쩍했던 쪽지를 꺼내들었다.
“그게 뭐야?”
“저도 몰라요. 그냥 저녁에 뭐 먹을지 메모해 놓은 거면 좋겠는데···.”
과대망상일수도 있지만 로난은 최악의 미래를 상정하고 있었다. 일기에 적혀 있던 ‘그들’의 정체가 네뷸라 클라지에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심호흡을 한 로난이 쪽지를 펼쳤다. 예상과는 달리 꼬깃꼬깃한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엥?”
다만 텅 빈 공간 한복판에 붉은 얼룩이 찍혀 있었다. 색깔이 미묘한 것이 잉크나 물감은 아닌 것 같았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뭔데 그래?”
쪽지를 살피던 아데샨이 눈썹을 으쓱였다.
“으응···? 핏자국 아니야?”
“피? 아,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의문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물건이 중요한 책 한가운데 고이 끼워져 있던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정확히 종이의 정중앙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도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인 느낌을 주었다.
“틀림없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로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핏자국을 관찰했다. 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언가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진 물건 같은데,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르제베트에게라도 가져가 봐야 하나. 로난이 다시 쪽지를 접으려는 순간이었다.
-슈아아악!
“씨발, 뭐야?!”
“악!”
하마터면 쪽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핏자국이 폭발하듯 넓게 번지기 시작했다.
종이 위를 퍼져 나가던 붉은 흔적은 특정한 형태를 만들고 나서야 멈춰 섰다. 아데샨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지, 지도···?”
“뭐라고요?”
지도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쪽지를 살폈다. 아데샨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어딘가의 지도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만이네 로난. 옆의 아가씨도.”
“음?”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 쓴 소녀가 서 있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로난의 입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필리아?”
“응. 오래 기다렸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시타의 깃털을 들고 혈마법을 연구하러 떠났던 오필리아였다. 후드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