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9)
69. 피의 갈고리(1)
#69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 쓴 소녀가 서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안쪽에서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필리아?”
“응. 오래 기다렸지.”
시타의 깃털을 들고 혈마법을 연구하러 떠났던 오필리아였다.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혹시 면접 때 오셨던···?”
“응. 너는···키가 더 자랐네.”
“와아, 어떻게 알았어요? 마법과 3학년 오필리아 선배님, 맞죠?”
아데샨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실제로 그녀는 저번 달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더 자라서 176cm가 되었다. 굳어 있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연구는 다 끝난 거예요?”
“응. 완벽하지는 않지만···어느 정도는.”
“그거 다행이네요. 솔직히 나는 댁이 깃털만 홀랑 챙겨서 도망간 줄 알았어요.”
“미안해···일이 조금 있었어.”
오필리아의 목소리에서는 적잖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격조했던 동안 나름대로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로난이 지도가 된 쪽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참, 당신이 뭔가 한 거예요?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데.”
“응. 봉투를 뜯지 못하고 끙끙대길래···.”
“봉투?”
“아···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오필리아가 주억거렸다. 별안간 로난의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혈마법으로 만든 편지야.]“깜짝이야. 갑자기 왜 전음을···”
오필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아데샨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아직 오필리아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모를 터였다. 말꼬리를 끌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고마워. 그건 피 한 방울에 정보를 담아서 압축하는 거야···봉투를 뜯었다는 건 마나를 주입해서 피가 담고 있던 정보를 풀어냈다는 뜻이고.]오필리아는 전음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피를 이용한 편지는 뱀파이어들이 밀담을 주고받을 때 애용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으으음···?”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에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모르는 어떤 비밀스러운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아데샨은 말이 없어진 로난과 오필리아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오필리아의 얼굴은 그림자 아래에서도 빛이 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짝! 잠시 침묵하던 아데샨이 별안간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교관님이 서류 정리를 시킨 걸 깜빡했네.”
“아데샨?”
“미안해. 나중에 이야기하자.”
“혹시 화났어요? 표정이 왜···”
“화 안 났어. 오필리아 선배, 저는 먼저 돌아가 볼게요.”
묘하게 쌀쌀맞은 말투였다. 아데샨은 그 말을 남긴 채 등을 돌렸다. 평소보다 여실히 빨라진 걸음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중얼거렸다.
“타이밍이 좋네···.”
“잘 됐네요. 계속 세워 놓기도 뭐했는데.”
“그런데 왜 화가 난 걸까···?”
“글쎄요. 여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나저나 오필리아,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해요.”
주위를 둘러본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방이 트여 있는 것이 수상쩍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아리 건물로 이동했다. 끼이익- 나무문이 열리자 어두침침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부원들은 수업을 받고 있는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오필리아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후드를 벗어젖혔다. 억눌려 있던 은색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쥐어짜내듯 기지개를 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으으음···이제 좀 살 것 같아.”
“햇빛 때문에 그래요?”
“응. 흐린 날이라 조금 낫기는 한데···아, 그 아이는?”
“시타를 말하는 거면 금방 올 거예요. 요즘 들어 산책하러 자주 나가서.”
“그렇구나···얼른 보고 싶다.”
오필리아는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전부 꺼진 실내에서는 버려진 오두막처럼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삼단 촛대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멋진 곳이네···여기가 너희 동아리야?”
“너희가 아니라 우리죠.”
“맞다. 그랬지···그럼 나 여기서 자도 돼?”
“그럼요. 이제 우리 부원인데. 참, 우리 동아리는 전원 반말 사용이 규칙이에요. 괜찮아요?”
“응···나도 그게 더 편해.”
오필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동아리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로난은 오필리아의 부재 도중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랄 맞았던 바이디안 산맥과 중간 평가. 슐리펜의 입부까지. 오필리아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생각해 보니 다른 애들과는 인사를 아예 못 했네. 날 싫어하면 어쩌지···?”
“다들 괜찮은 놈들이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나저나 마지막 몇 주 동안은 편지가 안 오던데 무슨 일 있었어?”
“아. 부모님과 마찰이 좀 있었거든···갑자기 연구는 그만두고 성이나 다스리라고 해서···잘 해결하고 나왔으니까 괜찮을 거야. ”
“성···?”
오필리아는 부모님을 비롯한 혈족과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듯 했다. 상당한 고위층의 일원으로 보였으나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렸다.
로난 역시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쪽지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오필리아, 이게 혈마법으로 만든 쪽지라고?”
“응. 맞아.”
“혹시 누가 보냈는지도 알 수 있냐?”
“알아봐 줄까···?”
“엉.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서.”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쪽지를 집어들자 지도 형상을 한 핏자국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꾸물럭거리던 핏자국은 이윽고 붉은 갈고리 형상으로 변모했다. 오필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왜 그래?”
“먼저 대답해 줘. 네가 직접 받은 거야?”
눈빛이 진지했다. 로난은 적당히 아는 사람이 흘린 것을 주웠다고 둘러댔다. 오필리아는 쪽지를 접어서 로난에게 돌려주었다.
“그 사람···혹시 선혈의 정수를 구하려고 하고 있어?”
“어떻게 알았어?”
“여기 적혀 있어. 이 쪽지를 보낸 건···피의 갈고리라는 단체야.”
“척 듣기에도 착해 보이지는 않는 이름이네. 나쁜 놈들이지?”
“응. 그다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떠오르는 신성이라 해야 할까.”
피의 갈고리. 기껏해야 이백 살을 넘기지 않는 어린 뱀파이어들이 주가 되어 구성된 단체라고 했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오필리아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철없는 악동들이지.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의 영광에 심취해 있는···.”
“···오필리아, 너 몇 살이야?”
“세상에는···무지에서 도출되는 기쁨도 있는 법이야.”
피의 갈고리는 뱀파이어가 밤의 악몽으로 군림하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제국령에 속하지 않은 객지를 떠돌며 행인과 민가를 습격하고, 노예를 만들어 사고 파는 것이 그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최근에는 대가만 지불하면 무슨 물건이든 구해다 주는 보물 사냥꾼 역할도 겸한다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은 쪽지를 받은 것이 마법과의 자로딘 교수라고 밝혔다. 도자기 같은 오필리아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자로딘···? 설마 만월 마탑의 탑 메이지였던 사람을 말하는 거야···?”
“엉. 맞아.”
“그래서 41번탑 앞에 있던 거구나···꼬마들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무슨 뜻이야?”
“이 쪽지는···선혈의 정수를 가지고 있으니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초대장이야. 지도에 표시된 건 접선 장소고.”
오필리아는 그들이 대가로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금전을 요구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액수를 요구할 것이고, 물건이라면 사전에 등재된 보물 정도는 되어야 바꿔줄 것이라고 했다.
“상대가 많이 절박해 보이면···권속이 되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
“설마. 자로딘이 병신도 아니고.”
“절박한 사람에게 ‘지금 당장’을 제외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권속이 될 것을 요구한 뒤 피의 맹약을 맺을 수도 있어.”
피의 맹약은 어기는 순간 목숨이 끊어지는, 결코 어길 수 없는 약속이었다. 로난이 헛웃음 쳤다.
“이해가 안 되네. 그냥 다 죽이고 물건만 챙기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등신 같은 거래에 응할 이유가 없잖아.”
“물론 자로딘 정도의 실력이면 거기 있는 꼬마들 따위는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 수 있어···문제는 구하는 물건이 선혈의 정수라는 점이야.”
“그게 왜?”
“혈마법이 아니면 다룰 수가 없는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거든···꼬마들은 아마 선혈의 정수를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가지고 있을 거야. 댓가를 받은 뒤에야 가공을 마치고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주겠지···.”
“허, 약아빠진 새끼들일세.”
로난은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십 년 뒤의 전장에서 자로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피의 갈고리처럼 저질스러운 뱀파이어들의 노예로 전락해 버려서라고는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선혈의 정수 역시 많고 많은 소생 시도 중 한 번을 위한 재료에 불과했다. 아내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는데 그따위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제정신이라면 말이지.’
다만 자로딘은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다. 분야가 뭐든 간에 희박한 가능성을 확신으로 착각하는 것은 중독자들의 전유물과 같은 발상이었다. 로난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인데.’
로난은 자로딘이 싫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들었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좆나게 괜찮은 작자라고 생각했다.
설령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을 도운 것은 분명히 감사할 일이었다. 침음을 흘리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나 좀 도와주라. ”
“응? 도와달라니···?”
“답장 좀 써 줘. 제안을 승낙하겠다고.”
오필리아의 눈이 커졌다. 로난은 방금 세운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늘 그렇듯이 명료하면서도 제정신이 아닌 작전이었다.
“진심이야···?”
“엉. 대신 접선지는 꼭 바꿔 주고.”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동행하지 못해. 혈족의 문제가···”
오필리아가 말꼬리를 끌었다. 아무래도 가정사와 관련된 문제인 듯 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로난이 손사래를 쳤다.
“흐아아암···너는 안 따라와도 돼 인마. 혼자 갈 거니까 신경쓰지 마.”
“···꼬마들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뱀파이어 기준이지 필멸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야. 오히려 아는 게 없는 만큼 더 사납고 난폭하지.”
오필리아는 피의 갈고리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했다. 강함 자체는 고위 뱀파이어들과 비할 바가 못 됐지만, 인간들에게는 더욱 위험한 존재라고 했다. 수백 년 단위로 축적된 악의와 영악함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모래성처럼 허물어트린다고 했다. 로난이 낄낄거렸다.
“알았어. 그런데 위험하다고만 하고 말리지는 않는 걸 보면 너도 내 계획이 싫지만은 않나 보다.”
“그건···.”
오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을 내포한 침묵이었다. 결국 그녀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좋아···그런데 내가 안 가면 선혈의 정수는 어떻게 하려고···?”
“아, 그거 말이지.”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톡톡. 별안간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왔네.”
“응?”
창가로 다가간 로난이 커튼을 젖혔다. 쉬익! 창문을 열기 무섭게 쇄도해온 그림자가 로난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검고 푹신한 깃털이 코를 간지럽혀서 하마터면 재채기가 나올 뻔 했다.
“왔냐.”
“뺘!”
“이번에는 어디까지 싸돌아다니다 온 거야?”
로난이 양손으로 시타를 안아들었다. 짠내가 나는 것을 보니 저 멀리 여명해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내가 인마, 너 때문에 루시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이번에는 가오리 같은 거 안 잡아왔지?”
“빠야~”
능청스레 갸웃거리던 시타가 로난의 뺨에 얼굴을 부볐다. 오필리아는 양손을 맞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에 비해 커진 덩치가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시타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이리 올래?”
“뺘아?”
오필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던 시타는 그녀 바로 앞의 바 테이블로 이동했다. 오필리아는 만지면 부서질 보석이라도 다루듯이 시타를 쓰다듬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시타의 눈동자가 짧게 점멸했다.
“뺫.”
그와 동시에 시타의 눈앞에 피로 이루어진 장미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일전에 오필리아와 만났을 때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시타는 장미를 물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오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널 기억하나 보네.”
오필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피의 장미를 집어들었다. 폴짝 뛰어오른 시타가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로난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말했다.
“걔랑 같이 갈게. 그 선혈 어쩌고 하는 걸 다루는 법을 알려주면 되잖아. 그럼 괜찮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응···될 거 같아.”
“자로딘이 헛짓거리를 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가르쳐 줘. 돌아오는 주말에는 출발할 거야.”
“응. 지금 바로 하자. 내가 못 가는 만큼 열심히 가르쳐 줄게. 알려주고 싶은게···아주 많아.”
“먼저 가서 하고 있어. 금방 갈테니까.”
오필리아는 시타의 스승이 되기를 자처했었다. 그녀는 시타를 안아든 채 건물 밖으로 나섰다. 텅 비어버린 실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가만히 칼자루를 매만지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그런 인재를 잃을 수는 없지.”
로난은 골골거리던 자로딘이 내뿜던 마나를 떠올렸다.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면 미리 죽여버리는 편이 합리적인 강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합리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봐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난이 계획을 재차 다듬던 차였다. 슈아아아악! 불현듯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벽을 뚫고 전해져 왔다.
“윽···!”
전신의 털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타나 오필리아의 것과 같은 붉은 마나가 문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씨발,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로난은 문을 걷어차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바깥의 꼴을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