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77)
77. 이사 대작전(1)
#77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로난이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차였다. 벽에서 몸을 뗀 아데샨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
“엉? 왜 그래요?”
“이거 가져가.”
아데샨이 들고 있던 외투를 내밀었다. 가지런히 개어진 옷은 한 번도 안 입은 것처럼 깔끔했다. 외투를 받아든 로난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아하, 내 거구나 이거.”
“고마워. 그때는 덕분에 살았어.”
“뭘요. 잘 입었다니 다행이네요.”
중간 평가 당시 아데샨에게 빌려줬던 것이었다. 로난은 곧바로 외투를 걸쳤다. 아예 새 옷을 입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데샨이 말했다.
“어때?”
“어떠냐니요?”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아?”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듣고 보니 착용감이 살짝 변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머지않아 안감이 조금 더 도톰해진 것을 눈치챘다.
“안에 뭔가 넣었어요?”
“응. 재료가 남아서 날붙이에 강한 가죽을 덧대봤어. 가벼운 자상이나 창상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야.”
“우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명색이 재단사의 딸인데 당연하지. 안주머니도 한번 봐봐.”
로난은 앞섶을 들췄다. 안주머니 앞에는 자신의 이름이 유려한 필기체로 자수 되어 있었다. 아데샨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한번 새겨 봤어. 너는 옷을 자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
로난이 싱글벙글 웃었다. 개조된 교복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무슨 처리를 거쳤는지 몰라도 무게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마음에 든다니까 좋네.”
아데샨은 뿌듯한 눈빛으로 로난을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당연하죠. 지금이라면 제 엉덩이에 난 점 개수도 말해줄 수 있어요.”
“그,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고···왜, 어제 있잖아. 엄청 예쁜 마법과 선배.”
“오필리아? 걔는 왜요?”
“···예쁘다고 하니까 바로 알아듣는구나. 말까지 놓은 거야···?”
“네?”
“아, 아니···이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응. 무슨 사인지 궁금해서.”
묘하게 다급해진 아데샨의 말투에서는 평소의 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사이? 어···친구죠?”
“그치, 친구. 그러니까 음. 너와 나 같은 그런 사이를···말하는 거지?”
한순간 로난의 말문이 막혔다.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까부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불안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요. 오필리아는···음, 굳이 따지자면 선배랑은 다르죠.”
“어?”
그 순간 아데샨은 메두사라도 마주친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숲처럼 짙은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말을 이었다.
“선배가 훨씬 특별하니까요.”
“특···별해?”
“그야 당연하죠.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갈 사이잖아요.”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름의 자격지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딱 봐도 강해 보이는 오필리아가 동료처럼 나타났으니 불안감을 느끼는 거겠지.
대장군까지 갈 길이 먼데 벌써 흔들리면 곤란하다. 이럴 때는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될 때까지 계속.”
“그, 그럼···오필리아 선배보다 내가 중요하다는 말이야?”
“적어도 저한테는요.”
로난이 아데샨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고장난 인형처럼 삐걱이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귀가 불에 달군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안쪽에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응? 뭐라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 응. 교관님이 시키신 일도 있고.”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따, 따로 부탁하신 게 있으시거든.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별안간 아데샨이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걸음이 엄청나게 빨랐다. 로난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교관님도 참 너무하군.”
주말은 좀 쉬게 해줘도 될 텐데. 로난은 그리 중얼거리며 동아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룻밤 새 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찬란한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나 왔다.”
동아리 건물의 문이 열렸다. 특이한 조합이 눈에 띄었다.
슐리펜은 불안장애를 앓는 콘도르처럼 실내를 빙글빙글 돌며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머나먼 구석자리 테이블에서는 아셀이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히, 히이이익···.”
큼직한 책으로 얼굴을 가린 아셀은 눈만 빼꼼 내민 채 슐리펜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광경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거기서 뭐 하냐?”
“로, 로난···!”
로난과 눈이 마주친 아셀이 쪼르르 달려왔다. 아무래도 여기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슐리펜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 저 사람이 여기 왜 있는 거야···?”
“아, 쟤도 이제 우리 부원이야. 안 말했구나 내가.”
“뭐라고···?”
아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때 배회하던 슐리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로난. 뭘 하다 이제야 온 거냐.”
“네놈 따위가 상상도 못 할 모험을 하고 오셨다. 뭔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시간이 급하니 용건만 말하지. 이릴 양의 이사를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당장 오늘로.”
“···뒤지게 맞고 싶지 않으면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할 거야.”
기가 막혔다. 기나긴 합의 끝에 월말로 이사 일정을 잡은 것이 엊그제였다. 로난은 여태껏 누적된 피로가 서서히 분노로 치환되는 것을 느꼈다.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새벽에 첩보가 들어왔다. 또 마을 하나가 파괴되었다고 하더군. 로마이라 서부에 자리한 카카푸라는 산촌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마을이 파괴돼?”
“그래. 광분한 몬스터들이 습격을 가했다. 경비병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라 제국군이 출동해서야 사태를 일단락시킬 수 있었지.”
“···자세히 말해 봐.”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누이가 살고 있는 님버튼 또한 로마이라 산맥의 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사건은 그가 부재중이었던 어제저녁부터 벌어졌다고 한다.
평소 같으면 온순하거나 다른 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넓은 범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대처가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님버튼에는 어젯밤에 바로 용병단을 보내 놨다. 급파된 이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니가 웬일이냐. 존나게 대견하네.”
“물론 서둘러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아침에는 마르바스 상공에서 와이번이 관측되었다 했으니까.”
“염병, 와이번?”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와이번은 몬스터 중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편에 속했다. 브레스를 뿜거나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맹독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무엇보다 하늘을 날아다녔다.
슐리펜은 코르크 보드에 걸린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칼끝으로 로마이라 산맥 인근의 마을을 하나씩 가리키기 시작했다.
“현재 대도시인 마르바스를 제외하고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응할만한 방어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 사태가 벌어진 장소는 모두 님버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 따라서 조속히 호위 병력을 보내 이릴 양을 제도로 데려오는 게 올바른 판단이다.”
지도에는 이사를 위한 동선이나 주의할 구간 등이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로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합리적이면서도 딱히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로난이 아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셀. 짐 챙겨.”
“으, 응?”
“긴급 동아리 활동이야.”
아무래도 쉴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황급히 종이와 펜을 꺼내든 로난이 쪽지 두 장을 작성했다. 그리고 한 장을 창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타의 입에 물려 주었다.
“···뺘잇?!”
“바렌에게 전해줘. 어딘지 알지?”
임시로 작성한 동아리 활동 계획서였다. 도리질로 잠을 떨쳐낸 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한 장은 문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다른 부원을 모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곧장 채비를 마친 세 사람이 필레온을 떠났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고, 유령마 두 마리가 제도의 서부 대문 너머로 발사되었다.
****
세 사람은 해가 저물기도 전에 로마이라 산맥을 넘었다. 과거 아셀과 나흘에 걸쳐 지나온 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확실히 포석이 깔린 길 위에서 유령마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대여 가격도 상상을 초월했지만 그건 필레온 아카데미 측에서 내 줄 것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르바스에 당도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멈춰섰다. 슐리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로난. 유령마를 빌릴 생각을 하다니.”
“전에 타봤는데 좆나게 빠르더라고.”
“우웁···우으으···.”
아셀은 로난의 허리를 붙든 채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로난이 땀에 젖은 고글을 벗어던지며 말했다.
“어쨌든 너는 먼저 님버튼으로 가서 호위대를 이끌어. 우리는 일반 말로 갈아탈 테니까.”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누나한테 개수작 부리면 죽여버릴 테니까 그리 알고.”
“개수작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설마 내가 이릴 양에게 사심이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는군. 잘 들어라 로난. 나는 어디까지나 그랑시아의 고결한 정신을 기반으로···”
“알았으니까 얼른 가 인마. 시간 없다.”
로난이 말허리를 잘랐다. 원래대로라면 한참을 더 떠들다 사라졌겠지만, 사태가 사태인지라 슐리펜 역시 순순히 고삐를 돌렸다.
저런 게 대가문 그랑시아의 소공작이라니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로난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저 멍청이는 정말로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 글쎄···.”
“저건 이미 개수작을 부리는 거지. 누나가 눈치채도록 일부러 티를 내는 거야.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아셀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로난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몹시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마르바스의 장터에서 날랜 준마 한 마리를 빌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와이번이 나타나긴 했었나 보네.”
도시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것이 느껴졌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수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남아 있는 행인들은 수시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도에서 파견된 제국군이 종대를 이루어 곳곳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등에는 모두 석궁이 메어져 있었다. 와이번을 상대할 생각을 한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별로 좋은 상대는 아닌데.’
전생에 와이번 한 마리를 잡으려고 좆빠지게 뛰어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로난은 광분화된 몬스터들 중 와이번이 끼어 있지 않기를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럼 출발하자.”
준마로 갈아탄 로난과 아셀은 곧바로 마르바스를 떠났다. 로난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말을 몰며 수시로 멈춰섰다. 또한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로서 여덟 번째 멈춰선 로난이 아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셀. 띄워 줘.”
“으, 응. 인비저블 핸드.”
아셀이 주문을 영창했다. 로난의 몸이 빠르고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강과 숲, 군데군데 자리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내릴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안장에 착지했다. 아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 그런데 로난. 마음에 걸린다는 게 뭐야?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상황 파악이 잘 안 돼···.”
“아무래도 네뷸라 클라지에가 연관된 거 같아서.”
“뭐···?”
로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느닷없이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일전에 만났던 동굴 거인이나 바이디안 산맥의 오우거들도 모두 네뷸라 클라지에의 소행이었다. 아셀이 창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네뷸라 클라지에라면···신전을 부수고 사란테를 그렇게 만든···.”
“엉. 천하의 개새끼들이지.”
로난이 수시로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달라 하는 것도 그들의 특징인 반짝이는 마나를 색출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님버튼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길의 저 앞쪽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 무리의 제국군이 창과 방패를 앞세운 채 도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로난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정지! 정지하시오!”
“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내는 봉쇄한 도로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검성 자이파와 그 직속 부대가 인근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소. 끝날 때까지 대기하거나 다른 길로 돌아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