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85)
85. 계절은 봄을 넘어 여름으로(2)
#85
“검을 이리 줘 봐라.”
어째 묘하게 신이 난 목소리였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로난이 라만차를 건넸다. 나비로제가 칼자루를 가볍게 쥐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피처럼 붉은 마나가 칼날을 타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발. 이게 뭔···!”
로난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꼭 검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막 뿜어져 나온 선혈처럼 선홍빛을 띠는 마나는 액체로 착각될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발자크 때와는 비교도 안 정도로 규모가 컸다. 붉은 마나는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금세 투기장 바닥을 뒤덮은 마나가 학생들의 발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으헉! 이, 이게 뭐야?”
“피···?”
“기, 기분 나빠···!”
학생들이 동요에 빠졌다. 라만차의 검신은 원래 저 색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섬뜩한 적색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괴현상을 감상하던 나비로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납지만 유연하군. 주인을 꼭 닮았어.”
“젠장, 제 칼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칼자루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투기장 전역에서 넘실거리던 마나가 다시 라만차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깔끔한 바닥이 드러났다. 검신에서 시선을 뗀 나비로제가 로난을 돌아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이 검의 본모습이다.”
“그 시뻘건 꼬락서니가요?”
“그래. 내가 마나를 부여하면서 잠재되어 있던 힘이 발현된 거지.”
나비로제의 눈이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꼭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 같았다. 라만차를 한 바퀴 돌려 잡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주 잘 만든 무기들은 사용자의 공격에 가진 색을 더해 준다. 내 우루사나 그랑시아 공작의 페일 로드처럼. 네 검 또한 마찬가지다.”
“주먹밥 영감님이 힘을 좀 쓰긴 했나 보네요.”
“그렇지. 명검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어. 네가 이 검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알려 주지.”
별안간 허수아비를 겨냥한 그녀가 튕기듯이 검을 휘둘렀다. 좁은 궤적을 따라 액체 형태의 검기가 쏘아졌다.
다만 발자크가 보여준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검기가 양동이로 넓게 뿌린 물보라였다면 나비로제의 검기는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급류에 가까웠다. 콰광! 검기의 급류에 휩쓸린 허수아비가 바닥에서 뿌리째 뽑혀 나갔다. 하지만 검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
“음?”
로난과 나비로제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대로 뻗어 나간 검기의 급류가 저 뒤쪽의 벽면에 직격했다. 콰과과광! 느닷없이 울려 퍼진 폭음에 모든 학생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꺄아아악! 또 뭐야?!”
“교, 교관님!”
곧 먼지가 가라앉았다. 처참하게 파괴된 벽면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께가 1m는 족히 넘을 석벽이 수백 년 동안 파도를 맞은 절벽처럼 마모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구멍과 거미집같은 균열이 상흔 안쪽을 뒤덮고 있었다.
“염병···.”
가공할 위력이었다. 여태껏 미개하게 싸워 온 나날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언젠가 저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벽이 위태로워 보였다.
바람만 불어도 무너지겠는데요. 로난이 막 그런 종류의 농담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쿠르릉! 갑자기 손상이 심각했던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아.”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산뜻한 바람이 앞머리를 젖혔다. 붕괴된 벽 너머로 아름다운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로난과 나비로제는 한참이나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생각보다 힘조절이 어렵군.”
“이제 어쩌죠.”
“나중에 고쳐야지. 별 수 있나.”
아데샨이 없어서 다행이군.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비로제는 로난에게 라만차를 돌려주었다. 그가 칼자루를 받아드는 순간 붉었던 검신은 다시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와 버렸다.
“시발.”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진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놈팡이하고는 화끈하게 놀다가 막상 자신에게는 차게 식어 버리는 애인을 보는 것 같았다. 나비로제는 전대 검성이니 그렇다 쳐도, 발자크같은 모기보다 칼의 힘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얼른 시작하죠. 아니꼬워서 더는 못 참겠어요.”
“좋다. 검에 마나를 먹이는 것부터 시작하지. 정자세를 취하고 몸에서 힘을 빼라.”
“그냥 검기부터 배우면 안 돼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너는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만 해도 검의 제전에 무리없이 참가할 수 있는 검사가 될 거다.”
검의 제전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물어보기로 마음먹어 놓고 또 잊고 있었다.
“맞아. 검의 제전이 도대체 뭐죠? 자이파도 그게 어쩌고 하던데.”
“음? 모르고 있었나.”
“여기 입학하기 전에는 촌구석에서 구르다 와서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모이는 장소다.”
나비로제의 설명이 이어졌다. 검의 제전이란 온 대륙의 검사들이 모여서 벌이는 일종의 의식이자 회의였다. 실력을 입증한 강자들만 참가할 수 있으며, 의식에 통과한 이들은 성검의 탐색에 도전할 권리를 얻는다고 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검이요?”
“그래. 여지껏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전설의 무기지.”
성검은 검의 제전이 열리는 성지 파르잔 어딘가에 감춰져 있다는 전설의 무기였다. 성검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가칭일 뿐이며, 아무도 실체를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무기인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오랜 세월만큼이나 다채로워진 전설 탓에 칼잡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강한 검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성검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 같은, 야망 있는 사내여인들을 미치게 만드는 종류의. 로난 역시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꼴리기는 하네요.”
“성검이 아니더라도 가볼만 한 자리다. 각국에서 제일가는 검사와 초야를 떠돌던 강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까. 대부분은 대련을 신청하면 받아 주거든.”
“···솔직히 말해봐요. 몇 명 죽였어요?”
“다 합쳐서 스무 명 정도였나. 죽인 건 얼마 안 된다.”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듯 그리움에 젖은 말투였다. 로난은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자로딘의 말에 따르면 새끼손가락으로 코코넛 껍질을 뚫어서 마셨다 했던가.
‘역시 당분간은 개기면 안 되겠어.’
궁금증이 모두 해소된 로난이 칼자루를 쥐었다. 나비로제는 앞전에 말했던 것처럼 검에 마나를 먹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요점은 체내의 마나를 검으로 이동시키고 붙들어 두는 것이었다. 정신을 집중한 지 머지않아 미약한 빛무리가 칼날을 타고 올라왔다. 나비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로 오 분을 대기한다. 오 분을 기다린 뒤에 검을 휘두르는 거다.”
“5분? 너무 짧은 거 아니예요?”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그럼 시간을 재겠다.”
“다른 이들에게는?”
무슨 뜻이지? 나비로제는 대답하는 대신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로난이 코웃음쳤다.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검기도 쏘는데 오 분 정도 버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검신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엥?”
“47초.”
“아니, 잠시만요. 이게 왜 이래?”
“검기를 먼저 깨달았다고 쉽게 여기지 마라.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해 보도록.”
나비로제는 예상했다는 듯이 회중시계를 초기화했다. 자존심이 상한 로난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칼자루를 움켜쥠과 동시에 빛무리가 다시금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
“1분 23초.”
“씨발!”
빛무리가 사그라들었다. 어느덧 건물 밖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무너진 벽면 너머에서 스며든 석양이 투기장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염병···! 허억, 이게 왜 자꾸 꺼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투기장에 다른 학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검을 내렸다. 이걸로 몇 번째 시도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지. 네 몸이 남들과 다른 건 알고 있지 않나.”
”헉···그럴 수는 없죠···.”
“그럼 언제까지 할 셈이지?”
“그야 당연히···될 때까지.”
“쯧, 미련하기는.”
나비로제가 등을 돌렸다. 쾅!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그녀가 문을 닫았다.
하긴 지겨우실 만도 하지. 가만히 서서 낄낄거리던 로난이 철푸덕 주저앉았다.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게 느껴졌다.
“좆같은 저주.”
현재까지 최장 기록은 3분 41초였다. 로난은 나비로제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뒤늦게 알아챘다.
저주에 얽매여 있는 그의 마나량은 남들보다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래서 소드 유저의 경지에만 이르러도 간단하게 버틸 시간을 힘들다고 말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몸이 얼마나 병신 같은 상태인지 실감이 났다. 궁시렁거리던 로난은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드높은 천장과 석양 속을 떠다니는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의 이마에 뭔가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로난이 상체를 일으켰다.
“에이 썅, 깜짝이야. 어떤···”
“받아라.”
“···교관님?”
나비로제가 큼직한 수통을 들고 서 있었다. 얼음물이라도 담았는지 양철로 된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로난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앉은 채로 수통을 비운 로난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푸하···뭘 잘했다고 이런 걸 줘요?”
“네가 머리를 식히고 포기해야 나도 퇴근할 거 아니냐.”
나비로제가 쌀쌀맞게 말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다. 피식 웃은 로난이 칼집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회중시계를 꺼내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로난. 너는 마나를 잘 못 다루는 것뿐이지. 이미 전교에서도 손꼽히게 강하다.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알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냐. 아직 신입생이라 시간도 충분할 터인데.”
로난이 씁쓸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원래대로라면 족히 몇 달은 잡고 해야 하는 훈련이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소모한 뒤에는 연공을 통해 마나량을 늘리는 걸 반복하는 형식으로.
하지만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남들처럼 마나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혈관에서 긁어내야 했다. 로난이 칼집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별로 안 충분해서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허수아비 앞으로 향했다. 오 분을 기다리고 베어야 하는 허수아비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체내의 마나를 검으로 옮기는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잡아 놓는 것이 문제였다. 미약한 마나통으로는 검에서 지속해서 소모되는 마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냉수를 마시니까 머리가 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식힌다고?’
별안간 섬광 같은 발상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냉수에서 시작된 발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뜨거운 것을 식힌다. 차가운 것을 덥힌다. 넘치는 것을 덜어낸다. 부족한 것을 채운다. 마침내 결과를 도출한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 쳤다.
‘쓰면서 채우면 되는 거잖아···!’
마나 연공은 무조건 정자세로 해야 한다는 선입견에 얽매여 있었다. 검기를 소모함과 동시에 연공을 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붉은 빛무리가 라만차의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나비로제가 회중시계를 들어올렸다.
“그럼, 시간을 재겠다.”
로난이 끄덕였다. 그는 곧장 자로딘에게 배웠던 마나 연공법을 시도했다. 숙달되기 전에 자세를 바꿔서 시도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몇 번 숨을 들이 내쉰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할만해.’
생소했다. 하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아아아- 머지않아 기묘한 숨소리가 로난의 입술 사이로 새나오기 시작했다. 마나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음?”
시간은 2분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라만차는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로난이 마나 소모와 연공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병행하는 법을 깨달은 건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마나가 검과 육체를 순환하는 감각만이 잔류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로난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교관님?”
“···시간이 다 됐다.”
“뭐야, 벌써요?”
체감상으로는 3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비로제는 말없이 회중시계를 뒤집어서 그의 면전에 내밀었다. 정각에서 시작된 시계는 12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13분···!”
“이제 그 느낌을 유지한 채 검을 휘둘러라. 그건 잘할 수 있겠지.”
로난은 묵묵히 주억거렸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검과 손이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앙! 검격이 그어진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나비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파사삭! 허수아비 위에 수십 가닥의 선이 생겼다. 로난이 라만차를 칼집에 꽂음과 동시에 수십 토막이 난 몸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
로난이 픽 웃었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마나의 흐름에 따라 베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이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못 벨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결국 해냈군. 실전에서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나?”
“···몇 분 정도는.”
“그럼 됐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침묵이 감돌았다. 둘 중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비로제가 막 퇴근을 위해 등을 돌리는 참이었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로난이 별안간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씨발! 봤어요 나비로제?! 봤냐고요! 내가 해냈어요!”
“그래. 잘 했다.”
“전부 누님 덕이에요! 이리 와요 제기랄, 내가 업고 필레온 한바퀴 뛸 테니까!”
“네가 이루어낸 결과다. 그리고 교관님이라 불러라.”
하지만 나비로제의 제재에도 로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뒤늦게 폭발한 성취감에 완벽히 지배당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비로제를 업으려고 달려들다가 양쪽 귀를 붙잡힌 뒤에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허.”
그 꼴이 하도 우스운 나머지 나비로제의 입가에도 옅은 실소가 떠올랐다. 마지못해 한 번 업혀줄까 고민하던 차였다. 우르릉! 갑자기 무너진 벽 근처의 지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이변에 두 사람이 동시에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뭐야?”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들썩이던 지면이 일어나며 무너진 구멍을 틀어막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처할 틈이 없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메워진 벽면에는 원래 새겨져 있던 부조까지 복원되어 있었다. 나비로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마법은···.”
“오랜만이군. 나비로제.”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과 나비로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비쩍 마른 사내가 석양을 받으며 서 있었다. 악우의 모습을 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로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