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97)
97. 여명을 향해 쏴라(10)
#97
“썩 살기 좋은 집은 아니지?”
로난이 바닷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검게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가 원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바쥬라의 처절한 비명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아아악! 크아아아!】
“친하게 지내 봐. 그리고 등신아, 내가 제단에 있는 너를 어떻게 찾았겠냐?”
로난이 낄낄거렸다. 바쥬라가 환각으로 개수작을 부리려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초에 눈치채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공격을 허락하는 바쥬라에게서는 반짝이는 마나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몸을 내준다는 도박수가 통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전에 자로딘이 자신의 마나 불능을 고쳐 주려다가 죽을 뻔한 사건에서 착안하여 급조한 작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저주인 건지.’
병아리 눈꼽만한 저주의 편린이 과거 탑 메이지였던 작자를 죽일 뻔했다. 몸속에는 그 원본이 되는 저주들이 들끓고 있을 테니 아무리 악마의 저서라고 해도 상대하기 버거울 터였다.
첫 대면때 시도해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때는 바쥬라의 힘이 너무 강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복기한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좆될 뻔했네.’
갖가지 행운이 겹쳐 승리할 수 있었다. 제단에 숨어 있던 본체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더라면 무조건 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전투였다.
동녘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구름이 낮게 깔린 수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로난은 라만차를 칼집에 꽂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육지에 솟아난 여명 마탑은 꼭 거대한 등대처럼 보였다.
‘불은 끈 건가.’
정원에서 치솟던 화마는 어느새 사그라져 있었다. 대화재가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불씨가 바람을 따라 복상하고 있었다. 로난이 막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잠잠하던 바쥬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크하악!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우웁!”
불현듯 극심한 구역질을 느낀 로난이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틈새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빠져나왔다 사라졌다. 바쥬라의 의식이 그의 몸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끈질긴 새끼···!”
로난이 강하게 볼살을 깨물었다.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샘솟았다. 그는 입안을 맴돌고 있는 바쥬라의 기운을 피와 함께 삼켰다.
【허억···!】
목젖까지 치밀었던 구역질이 사라졌다. 재차 비명을 내지르던 바쥬라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봐! 내 말을 들어라! 세상에 획을 남길 검사가 되고 싶지 않느냐?!】
“별로.”
【어리석은···! 나바르도제의 머리로 벽을 장식하고 싶지 않느냐? 황제가 네 발등에 입을 맞추는 꼴을 보고 싶지 않느냐? 나와 손을 잡으면 가능하다. 네게는 저 하늘조차 베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바쥬라의 기척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혓바닥을 놀려대는 걸 보니 안쪽 상황이 어지간히도 나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하늘조차 베어버릴 가능성이라. 잠시 전생을 회상하던 로난이 픽 웃었다.
“나도 알아. 그렇게 할 거고.”
【뭣이···!】
“그러니까, 니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자, 잠깐만 기다려라…! 그렇다면 이건···크아아악!!】
목소리가 끊어졌다. 단말마를 비명을 마지막으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바쥬라의 기척이 사라졌다. 로난은 그의 자아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으음?”
문득 괴이한 이질감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쪽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심장과 다른 박자로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바쥬라의 사념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건가 신경을 집중했지만, 딱히 수상한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괜스레 찝찝해진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뭐야 이거?”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봐도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질감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로난이 입에 남아있던 피를 뱉어냈다.
‘별일 없겠지 뭐.’
퉷! 해풍을 타고 날아간 핏덩이가 암초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 위에 떨어졌다.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금서 바쥬라의 본체였다.
“···이제 그냥 책인가?”
로난이 바쥬라를 집어들었다. 표지부터 속지까지 온통 시커먼 책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부를 한번 쭉 훑어 보았지만,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거나 촉수가 솟구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과 새하얀 글씨에서 스며나오는 반짝이는 마나는 여전히 로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악마가 쓴 책.’
파괴의 바쥬라를 집필한 저자는 악마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바쥬라에서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기척이 강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어딘가 쓸만한 곳이 있겠지.’
어쩐지 거대한 비밀에 접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난은 넝마가 되어 가는 바쥬라를 돌돌 말아서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쓰레기 같은 책에게 썩 어울리는 장소였다.
“으···으으윽···.”
그때 어디선가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로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탑주 라르단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맞아, 정신 차려요 영감님.”
“내, 내가 지금···자의로 말하고 있는 건가···?”
“그럼요. 안 죽어서 다행이네요. 하긴 그 생고생을 했는데 가버리시면 곤란하지.”
라르단이 눈을 떴다. 바쥬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그의 눈동자는 맑은 청색을 띠었다. 도통 몸을 가누지 못하던 라르단은 결국 로난의 부축을 받아서 상체를 일으켰다.
“···고맙네.”
“어디부터 말해줄까요. 워낙에 화려하게 해먹으셔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네. 전부 봤으니까.”
“봤다고요?”
“그래.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지.”
라르단의 시선은 암초에 부딪히는 파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바쥬라가 자신의 몸으로 저지른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라르단은 잡아먹힌 작년 겨울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선명한 정신으로 버텼다고 설명했다.
“ 그 악마가 내 몸으로 저지르는 악행을 모두 봐야 했다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 마음만 같으면 당장에라도 몸을 던지고 싶다네.”
“그런 개짓거리는 안 하리라 믿어요.”
로난이 경고하듯 일렀다. 생포하기 위해 고생한 걸 생각만 해도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더군다나 그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라르단이 말했다.
“물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비록 탑주로서는 힘들겠지만.”
“그게 무슨···아.”
로난이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몸을 되찾은 라르단에게서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약화되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가슴팍을 살펴 봐도 심장을 둘러싸고 있어야 고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한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젠장.”
“마음 쓰지 말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오히려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 썩 나쁘지 않다네.”
라르단이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바쥬라가 그에게서 빼앗은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로난이 물었다.
“분하지도 않아요? 평생을 쌓아올린 마나잖아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만족한다네. 그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원령들의 절규를 들었는지 알고 있나? 그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게 해 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대의 신발을 혓바닥으로 청소해줄 의향이 있네.”
“그건 제가 좀 싫네요.”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의연하고 유쾌한 태도였다. 라르단은 더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쥬라가 아득한 세월을 살아오며 축적해온 힘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한참을 생각하던 도중, 여명 마탑을 바라보고 있던 라르단이 입을 열었다.
“···저게 뭐지? 혹시 보이나?”
“뭐가요?”
“저기 마탑 쪽에서 오고 있는 거 말일세.”
로난은 라르단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저 멀리서 반짝이는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선명해진 윤곽을 알아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늑대?”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바다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북슬북슬한 발바닥이 수면을 박찰 때마다 물보라가 경쾌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처럼 적황색을 띠는 털은 어둠 속에서도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썅, 진짜 뭐야?”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몸의 높이만 해도 족히 4m는 되어 보였다. 촤아악! 순식간에 로난의 눈앞까지 도달한 늑대가 긴 물이랑을 일으키며 멈춰섰다. 쭉 찢어진 주둥이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난 님, 무사하셨군요!”
“···아이레?”
“네, 데리러 왔어요!”
놀랍게도 늑대는 아이레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로난은 그것이 그녀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과연 도서관에서는 보여주지 않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아이레는 진화 작업이 끝났으며, 부상자는 좀 있어도 사망자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아운 필라도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 다행이네요. 금서고에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아아, 그거요!”
아이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운 필라와 그녀는 로난과 떨어지는 순간 전혀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고 했다. 목을 한 번 가다듬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갑자기 금서 구역이 흔들리더니 눈을 떠보니까 마탑과 한참 떨어진 언덕 위에 서있던거 있죠?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저는 분명 여명 마탑을 못 벗어났는데···확인해 보니 세상에! 봉인이 풀려 있었지 뭐예요?!”
“축하해요. 그러니까 좀 천천히 말해 봐요.”
“몇백년만에 되찾은 자유인지 모르겠어요! 아, 이 공기! 이 바닷물!”
목소리가 과할 정도로 발랄해진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기쁜 듯했다. 아이레는 아직도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암초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무래도 바쥬라가 봉인을 억지로 뜯어버리거나 한 모양이었다. 불현듯 라르단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타, 타, 탑주님?!”
“···오랜만일세. 얼굴을 들 면목이 없으니 그리 빤히 쳐다보지는 마시게나.”
“괘, 괜찮으세요? 분명 바쥬라에게 당했다고···!”
“나는 괜찮네. 이 소년이 나를 구해줬어. 바쥬라는 소멸했다네.”
라르단이 로난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바쥬라가 소멸했다는 말을 들은 아이레가 온 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바, 바쥬라가 소멸했다니요? 설마 그것도 로난 님이···?”
“뭐, 그렇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일단 타세요.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요.”
아이레가 머리를 숙였다. 로난은 라르단과 함께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탔다. 푹신푹신한 목덜미를 움켜쥐기 무섭게 아이레가 물을 박차며 출발했다.
‘끝났군.’
앞머리를 뒤집는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승차감은 영 별로였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마탑을 본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수평선에 끼어 있던 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맑은 여명만이 남아서 터오르며 세상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길었어.’
로난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찌 됐건 해는 떠올랐다. 나지막한 파도성이 나흘간의 여정이 일단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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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땅 속에 남아있는 불씨가 없나 확인해 주시오!”
“아아, 로큠버 백일홍.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로난은 머지않아 여명 마탑에 도착했다. 마탑의 창설 이후 가장 길었던 밤을 이겨낸 마법사들은 한창 화재로 말미암은 피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갈퀴로 잿더미를 파헤치며 불씨를 찾아 내는 이도 있었고, 아직 뿌리가 살아 있는 식물을 추려내는 이도 있었다.
‘저기에 금서고가 있었군. 어쩐지 탑에 박혀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니.’
정원의 북서쪽에는 직경이 15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헬 프로미넌스를 비롯한 고위 불꽃 마법이 연달아 폭발한 흔적이었다.
“낸시. 이리 와!”
구멍 속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탑에서 기르던 샐러맨더 낸시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잔불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구멍 아래를 내려보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이레의 말마따나 서적이 사위어버린 잔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챙겼나 보군. 대단한 사서야.’
아이레는 봉인이 풀리자마자 마탑으로 돌아와서 불타고 있는 금서들을 구했다고 설명했다. 바쥬라와 같은 공간에 있던 3할 정도는 그 자리에서 전소되었지만, 재빠르게 조처한 덕에 미궁 속에 놓여 있던 금서들은 대부분 챙길 수 있었다고 했다.
잘 된 일이었다. 사악한 책이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마법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는 서적들이었으니까.
그녀는 로난과 라르단을 내려놓은 뒤 아운 필라를 찾아서 떠났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오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뭐, 그럴 만하지. 뒷짐을 진 채 정원을 거닐던 찰나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님!”
“에르제베트?”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교복 차림의 에르제베트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시온 데 그랑시아의 모습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시온 양, 잠시만 어른들한테 가 있어요. 어딘지 알죠?”
“응. 언니.”
시온은 고분고분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열 걸음 정도를 걷던 그녀가 재차 몸을 돌려 로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아.”
“엉? 어, 그래.”
로난이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시온은 다시 마탑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제베트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정말···예법을 다시 가르쳐야겠어요. 귀족이 저렇게 인사를 하면 어떡해요?”
“고생 많았다. 어젯밤에 고생 좀 했다며.”
“별 거 아니었어요.”
아이레는 마탑에 오는 동안 그녀의 활약상을 이야기해 주었다. 에르제베트가 새침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흘 정도 안 잤다 하더라도 믿을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특유의 콧대는 여전히 꼿꼿햇다. 자신의 업적을 부정한 그녀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어젯밤에 다 봤어요. 어떤 노인과···.”
“나도 나중에 설명해 줄게. 좀 길어서.”
“···좋아요. 그건 그렇다 쳐도 그 상처는 뭐죠? 안 아프신가요?”
“상처?”
“네. 목 뒤쪽에요. 굉장히···아파 보이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난이 목 뒤를 짚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평소와는 다른 촉감이 느껴졌다.
다시 떼어내서 바라본 손바닥에는 피와 진물이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염병···!”
불현듯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다. 뒷덜미부터 허리까지가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로난이 다짜고짜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졌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에르제베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 로난 님?!”
“쓰으으읍···젠장, 더럽게 아프네.”
“아프다고요? 무슨···꺄악!”
손가락을 살짝 벌려 로난을 본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울긋불긋한 화상이 잘 단련된 상반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 그 상처는···!”
“썅, 이래서 원소화인지 뭔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였구만.”
에르제베트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쥬라와 싸울 당시에 입은 상처였다.
대부분이 화염을 이용한 순간이동을 따라갈 때 생겼을 터였다. 하얗게 질린 에르제베트가 허둥거리며 외쳤다.
“말하지 마세요. 지, 지금 사람을 부를게요!”
“크아···기다려. 이거 먼저 써 보고.”
고개를 내저은 로난이 외투 주머니에서 포션 세 병을 꺼내들었다. 여명 마탑에 오기 전에 바렌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안 그래도 효능을 실험해보고 싶었거든. 신약이라.”
“실험이요?”
에르제베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다. 저런 중상을 입은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병의 뚜껑을 딴 로난이 자신의 환부에 포션을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스아아···봄바람이 땀을 말리는 듯한 감촉과 함께 화상이 씻은 듯이 아물기 시작했다.
“효과 죽이는데.”
“세상에···! 어, 어느 공방에서 만든 거죠?”
“말하는 사자.”
에르제베트의 눈이 커졌다. 저렇게 효능이 빠른 포션은 아칼루시아 가문의 의료원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로난이 포션 한 병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등에 좀 발라줘.”
“제, 제가요?!”
“그래, 손이 안 닿아서. 친구끼리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리 부탁하는 로난의 말투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요. 손이 안 닿으면 바를 수가 없죠.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등쪽의 환부에 포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남자의 맨살에 손을 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나 아데샨과는 확연하게 다른 돌처럼 단단한 질감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어라?”
그때 왼쪽 날개뼈 아래를 문지르던 에르제베트가 손을 멈췄다. 기존의 로난에게서는 감지되지 않던 심후한 기운이 체내에서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로난 님.”
“왜 그래?”
“…원래 코어가 있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