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98)
98. 두 번째 심장(1)
#98
로난의 날개뼈 아래를 문지르던 에르제베트가 손을 멈췄다. 그녀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로난 님. 원래 코어가 있으셨나요?”
“엉?”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 잘 바르다 말고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코어라니. 염병할 저주에 걸려 있지 않은 놈들도 한번 만드는 데 십수 년씩 걸리는 마나 덩어리가 아닌가. 눈썹을 으쓱인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없는데.”
“네? 그럼 이건…?”
에르제베트는 다시 손바닥을 펼쳐 같은 자리를 짚었다. 분명히 로난의 몸속에 뭔가 있었다. 심장과 다른 박자로 맥박치는 응어리에서는 마나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코어와는 달라. 뭐지···?’
다만 여지껏 보아온 코어와는 느낌이 달랐다. 마나를 운용하는 방식은 코어와 흡사했으나, 마나를 축적하는 방식은 서클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로난의 코어는 심장과 일체화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었다. 꼭 심장 두 개가 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런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던 차였다.
“뜨겁다.”
“히약! 죄송해요!”
에르제베트가 황급히 손을 뗐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약을 바르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나머지 환부에 포션을 발랐다. 근육의 굴곡이나 탄력이 손끝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감촉이었다.
‘단단해!’
머지않아 치료가 끝났다. 로난의 상처는 약을 바른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부 아물어 버렸다.
화상은 물론이요 기존에 입었던 자잘한 타박상이나 찰과상까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미친 사자 같으니.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피부를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돈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군. 나중에 마르야랑도 의논하라 해 봐야겠어.’
어지간한 거대 공방에서도 이만한 물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생산 체계가 바로잡히고 적절한 판매처만 구한다면, 틀림없이 깔려 죽을 만큼 많은 금화를 만질 수 있을 터였다. 다시 옷을 입은 로난이 에르제베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네.”
“흠흠, 별일도 아닌걸요.”
“꼼꼼하게도 바르더라. 아가씨라 이런 건 꺼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어.”
“고, 곤경에 처한 평민을 돕는 건 귀족의 의무니까요···!”
그리 말하는 에르제베트는 로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검보라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재차 헛기침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으흠, 그나저나 로난 님. 뭔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아까 말씀드린 코어 있잖아요···한번 확인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에르제베트는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해 주었다. 요컨대 심장 근처에 이도 저도 아닌 종양 같은 것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살아서 꿈틀거리는.
‘역시 그 휴지쪼가리가···!’
로난의 눈이 커졌다. 문득 바쥬라를 잡은 직후 가슴 안쪽에서 느껴지던 이물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심장 위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죽냐?”
“아, 아마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워낙 특이해서 그런 거니까 필레온에 돌아가면 한번···”
“오래 기다리셨소.”
에르제베트가 말을 잇는 도중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반쯤 타들어 간 로브를 걸친 아운 필라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레와 탑주 라르단이 그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이레의 손에는 웬 책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아, 왔어요?”
“늦어서 미안하오. 워낙에 수습할 것이 많아서.”
“뭘요, 고생한 거 빤히 아는데.”
“그대에게 비하면 편린 같은 고생이었지.”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새 대화재와 싸운 아운 필라의 몰골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했다. 하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터였다. 아운 필라가 말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 우선 내 절을 받으시오.”
별안간 아운 필라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에르제베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타, 탑 메이지님?”
“그대들 덕분에 우리는 다시 여명을 맞이할 수 있었소.”
아이레도 당황하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협의가 이뤄져 있지 않은 행동인 모양이었다. 탑주 라르단만이 수염을 매만지며 관록 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로난이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걷어찰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젠장, 얼른 안 일어나요? 마탑주 대리라는 사람이 쪽팔리게 뭐 하는 짓이에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한창 피해를 복구하던 마법사들도 벙쪄서 멈춰선 채 소년소녀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탑 메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운 필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이 지나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가 로난과 눈을 마주친 채 입을 열었다.
“여명 마탑을 구해줘서 고맙소.”
“거 고집이 세기도 하시지.”
“나도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바일세. 바다 위에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네만.”
불현듯 앞으로 걸어나온 라르단이 묵례를 보냈다. 잠시 사라졌다 돌아온 그는 마탑주의 화려한 로브가 아닌 평범한 셔츠에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못 찾을거 같아요?”
“그래. 하지만 여한은 없다네. 온 힘을 다해 부딪혔으니까.”
라르단이 허허 웃었다. 모든 마나를 잃어버린 그는 상황을 수습하는 대로 아운 필라에게 탑주 자리를 넘겨줄 예정이라 했다.
원래는 바쥬라의 봉인을 풀어버린 것에 책임을 지고 자수하려 했지만, 다른 마법사들의 극적인 만류로 잠시 유예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운 필라가 말했다.
“사건이 일단락되는 대로 성대한 연회를 벌일 예정이오. 당연히 주인공은 그대들이지. 부디 푹 쉬면서 기다리시오.”
“아, 그건 좀 힘들 거 같아요. 오늘 돌아갈 거라.”
“그런···! 어떻게 며칠만 더 머무르다 가면 안 되겠소?”
“일단은 학생이라서요. 이번에도 늦으면 말하는 사자가 나를 오븐에 넣고 쿠키랑 같이 구울 거예요.”
로난은 돌아가야만 하는 사정을 적당히 짜집어서 설명했다. 사실 성적은 이미 확보해둔 뒤라 며칠 더 늦게 가도 상관없었지만, 한창 바쁜 사람들에게 더한 부담감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에르제베트 역시 생각이 같은지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운 필라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다면···어쩔 수 없지.”
“다음에 질펀하게 놀자고요. 그때는 내가 연회가 뭔지 알려줄게요.”
“그래도 이건 받아 주셔야겠소.”
별안간 품을 뒤적이던 아운 필라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값비싼 장신구를 보관할 때 사용하는 아주 고급스러운 함이었는데, 안쪽에는 태양 형상의 뱃지가 두 개 들어 있었다.
다이아몬드를 통으로 깎아서 만든 듯한 뱃지는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했다. 비싸 보이는 것은 둘째치고 스며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에르제베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1급 마탑 훈장···!”
“좋은 거냐?”
“그, 그런 걸 논할 수준이 아녜요. 저희 가문에서도 거의 받은 사람이 없는데···!”
신분을 막론하고 마탑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었다. 에르제베트는 약간 모자란 애처럼 더듬거리며 뱃지가 가진 효력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여명 마탑 대부분의 시설에 공식적인 출입이 가능하다는 등, 고위 마법사들에게만 개방되는 거래소 ‘하이 르미엔’ 에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는 등···솔직히 알아듣지 못할 말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좋다는 거네.”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아칼루시아의 영애인 에르제베트가 저리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닌 듯했다. 아운 필라는 뱃지를 로난의 셔츠 카라에 달아주며 말했다.
“물론 이런 물건이 없어도 여명 마탑과 그대들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소. 하지만 살다 보면 느낄 것이오. 추억 대부분은 물질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그건 저도 공감해요.”
“내가 마법도 몇 개 각인해 놨으니 요긴하게 쓰셨으면 좋겠소. 부디 받아주시오.”
연이어 에르제베트에게도 뱃지를 달아준 아운 필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참, 아운 필라.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리겠소.”
“이 책. 나 줘요.”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바쥬라를 꺼내들었다. 로난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건 설마···!”
“네. 바쥬라에요. 원래는 그냥 들고 가려고 했는데 영 양심에 찔려서.”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건 곤란하오. 그게 보통 책이 아니라는 건 그대도 잘 알고 있잖소.”
“이제 그냥 평범한 책이에요. 봐봐요.”
불현듯 로난이 바쥬라의 표지를 집어서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힘없이 나부끼는 검은 책에서 과거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기척이 사라진 것을 감지한 아운 필라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걸 어디에 쓰려고 그러시오?”
“그냥 좀···찾고 있는게 있어서요.”
로난은 굳이 책을 쓴 악마를 뒤쫒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파격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지친 사람들이었으니까. 아운 필라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가져가시오.”
“역시 차기 탑주 다운 배포네요.”
“다만 사용을 마친 뒤에는 꼭 마탑에 반납해 주길 바라오. 아무리 자아가 소멸했다고 해도 충분히 위험한 책이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나만 믿어요.”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린 로난이 다시 바쥬라를 말아서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들이 막 비공정을 타러 이동하려는 차였다. 가만히 서 있던 아이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잠깐, 저도 드릴 게 있어요!”
아이레가 들고 있던 보따리를 내밀었다. 어른 몸통만큼이나 큼직한 보따리에는 족히 수백 년은 묵었을 법한 고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부 사란테가 쓴 책이에요. 좋은 책도 많으니까 가져가서 읽어 보세요.”
“사란테가?”
이건 또 의외의 선물이었다. 사란테의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들이라면 틀림없이 유용한 것도 많을 터였다.
“고마워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자유의 몸이 됐잖아요.”
“계속 생각해 봤는데, 사서 일은 계속 하려고요. 사란테의 부탁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리고?”
“역시 저는 책이 좋더라구요.”
아이레가 배시시 웃었다. 사란테가 들었다면 썩 좋아할 소리였다. 실소한 로난이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잘 됐네요.”
“또 와요. 그때는 재밌는 책들을 많이 소개시켜 드릴게요.”
“가급적이면 저주랑은 관련 없는 걸로 부탁해요.”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로난은 필레온으로 돌아갔다. 아직 답사 일정이 남아 있는 에르제베트는 여명 마탑에 남았다. 그녀는 시온 데 그랑시아와 함께 나란히 손을 흔들며 로난을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리고 코어는 꼭 확인해 보세요!”
“저 분이 언니 약혼자예요?”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아데샨 언니뿐이라고요···!”
에르제베트가 시온의 양쪽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헤햔?”
거의 자매를 연상케 하는 모습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앙숙 관계인 아칼루시아와 그랑시아의 영애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이번 기회로 좀 친하게 지내면 좋겠군.’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는 우연히도 마탑에 올 때 탔던 것과 같은 비공정 서부날개 호를 타게 되었다.
로난을 알아본 선장은 황족이나 앉을 법한 특등석에 그를 앉혀 놓았다. 뱃삯을 지불하겠다고 하니 자기가 뛰어내리는 꼴을 보고 싶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화염구가 날아오지 않았다. 불새로 변한 아운 필라가 그들이 영공을 벗어날 때까지 비공정을 호위해 주었다.
****
로난이 필레온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에 별로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동아리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할 수 있었다. 로난은 쓰면 쓸수록 자신의 작문 실력이 늘어간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피이이~
꿈새 마르페즈도 배가 불러 행복하기에, 지금 바렌 파나시르의 집무실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바렌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대화를 나누던 탁자 앞에서 마주보고 앉은 채, 이번 동아리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면밀하게 보고서를 검토한 바렌이 로난을 마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로난. 그러니까···여명 마탑에서 벌어진 사건의 중심에 있으셨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뭐, 그렇죠.”
“우연히 금서 구역에 진입했고, 삼대 금서 중 하나인 파괴의 바쥬라에게 잡아먹힐 뻔했고, 헬 프로미넌스를 비롯한 최상위 화염 마법들에 휘말렸음에도 극적으로 탈출했다라···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정확해요.”
로난이 당당하게 끄덕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바렌이 심호흡을 했다. 그는 털이 복실복실한 손가락을 뻗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검은 책을 가리켰다.
“그 책이···파괴의 바쥬라구요.”
“그렇죠. 실물은 생각보다 평범하지 않아요? 내가 이거 잡으려고 개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정말이지···.”
로난은 바쥬라를 잡을 당시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당히 실감나고 흥미진진한 묘사가 이어졌지만 바렌의 귀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쨍그랑! 그의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바렌의 거구가 앞으로 기울었다.
“아아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요?”
바렌은 간신히 탁자를 짚으며 섰다. 로난이 염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바쥬라를 본 바렌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허어억! 저리 치우십시오!”
“에잇,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사람 놀래게.”
“그, 그,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자료 조사를 하러 갔다가 그런 걸 들고 오시는 겁니까? 저는···! 저는···!”
“참, 포션 잘 썼어요 바렌. 효과 죽이더라고요.”
“말 돌리지 마세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바렌은 거의 울먹이며 말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었다. 학생의 안전과 학교 측의 안전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그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웅크렸다.
“커흥, 꺼흐흐···진짜 잘못 되셨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젠장.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되겠어요?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바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기 아래로 나지막한 흐느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로난은 이 상태가 최소 한 시간 정도는 지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로난은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꺼내놓은 뒤 방을 나섰다. 바렌이 마음을 추스리고 고개를 든 것은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로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책 한 권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으음?”
아주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책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약초학 기본’ 이라는 명료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저자로 추측되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란테···레마티온?”
성씨로 미루어 보아 엘프의 이름이었다. 눈가를 한번 닦아낸 바렌이 책을 펼쳤다.
“이, 이건···!”
낱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누런 양피지에는 자신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약초의 사용법과 생육법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
‘잘 쓰면 좋겠군. 좋은 책이던데. ’
바렌의 집무실을 떠난 로난은 곧장 동아리 건물로 향했다. 한때 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파괴의 바쥬라는 화장실마다 놓여 있는 신문지 꼴이 된 채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그 똑똑이들이라면 뭐라도 알아내겠지.’
로난은 바쥬라를 아셀이나 오필리아에게 던져줄 생각이었다. 비공정을 타고 오는 내내 읽어 봤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이 종양도 물어봐야 하는데.’
에르제베트가 했던 말을 떠올린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나비로제나 자로딘이면 뭔가를 알고 있을 터였다.
사실 그는 아직도 이 응어리가 단순히 몹쓸 병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탄생의 기원이 된 것이 워낙에 꺼림칙한 존재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잠깐만. 이게 코어라면 마나를 끌어낼 수 있는 거 아냐?’
문득 호기심을 느낀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나의 발현 여부에 따라 환희와 좌절이 엇갈리겠지만, 뭐가 됐든 매는 먼저 맞는 편이 나았다.
그냥 지금 빨리 확인해 버려야지. 라만차를 뽑아든 로난이 자세를 잡고 섰다.
스아아아-그의 입에서 기묘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나 연공을 시도해 보니 확실히 가슴 속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리를 잡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그는 기존의 심장이 아닌, 가슴 속에 느껴지는 덩어리에서 기운을 뽑아오는 것을 시도했다. 감각이 트여서 그런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라만차의 검신을 타고 희끄무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미간을 좁힌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백색을 띠는 마나가 칼날을 휘감고 있었다. 하얀 안개를 연상케 하는 흐름 속에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반짝거림이 새나오고 있었다.
반짝반짝. 네뷸라 클라지에의 마나와 완전히 동일한 그 모습에, 로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