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staff RAW novel - Chapter 117
아카데미 담당 일진 117화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 그리고 왜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모른다.
때로는 봄날의 벚꽃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가을의 단풍처럼 나타나기도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설하윤은 자신이 왜, 그리고 언제부터 백일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잘생긴 외모?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른 잘생긴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러면 무뚝뚝한 감정?
당연히 아니다. 세상 어떤 여자가 무뚝뚝한 남자를 좋아하겠는가.
그렇다면 강한 무력?
이것도 틀렸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무공 실력에는 목숨을 매는 성격이지만 타인이 강하고 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왜 본인이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됐는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왜 이런 감정이 생긴 걸까?’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좋았는지, 언제까지 좋아할 건지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하지 않고 하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지금 감정에 충실하자.’
지금 당장 느껴지는 감정만 확신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에는 확신이 들었다.
‘첫사랑.’
자신은 지금 첫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 자신이랑은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다. 빙궁의 식구를 위해서 감정을 버리려 노력했고 또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아주 어린 날의 다짐이었다.
다짐 이후로 그녀는 어떤 멋진 남자를 봐도 설렘이 생기지 않았고, 매력 있는 이를 마주해도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다짐이 없더라도 어느새 생긴 강박 탓에 환각과 환청마저 생겨 사랑 같은 사소한 감정 따위는 집어넣을 공간이 없었다.
강박은 그녀를 매 순간 급하게 만들었고, 모든 상황에 여유를 빼앗았으며 매 순간을 두렵게 만들었으니.
그래서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빙궁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널 만나고 모든 게 바뀌었지.’
백일진을 만나고 온 날에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환각과 환청 없이 편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도 메마른 겨울이 지나 산뜻한 봄이 온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러나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한쪽의 일방적인 마음으로는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백일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백일진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응.”
“음…….”
대답을 미룬 백일진은 침음성을 내며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설하윤의 기색을 살폈다.
‘무슨 뜻으로 물어본 거지?’
-뭘 무슨 뜻으로 물어봐. 생각을 좀 해라.
소설 같은 곳에서 보면 이런 질문은 보통 마음에 있는 여자가 마음에 있는 남자에게 하는 것 아니던가.
-그렇지.
‘근데 그 말을 한 게…….’
설하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설하윤은 여태껏 받아온 고백을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서는 그녀를 무과화(無果花 열매를 맺지 않는 꽃)라고 부르곤 했다.
백일진도 그런 그녀의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한 질문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손에 들고 있던 앵두의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앵두의 꽃말은 영원한 우정이라고 했지.’
그제야 설하윤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영원한 친구이자 동료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도 그건 똑같지.’
생각을 마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좋은 친구?”
“응.”
“아…….”
설하윤은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탄산이 유난히 따끔하게 느껴졌다.
‘친구라는 말은 선을 긋는다는 거 아닌가?’
원래부터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였기에 표정이 급격히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본다면 미세하게 굳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일진은 손에 쥔 앵두 가지를 바라보느라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본 거지?”
부끄러움 탓일까, 자존심 때문일까. 도저히 솔직한 속내를 터놓지 못한 그녀는 살짝 입술을 비죽이고는 툭 내뱉었다.
“……그냥.”
백일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나쁜 놈.’
그때, 호수 주변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일진은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서는 황보철수와 황보수정이 서로 티격태격 말싸움을 주고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 일진!”
“찰스? 수정?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은 취해서 들어갔지. 근데 아까 내가 회식 장소 알려줬는데 왜 안 왔어?”
“일진, 네가 왜 여기에……?”
백일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 본 사람들이랑 술자리를 하는 게 불편해서 돌아다녔다고.
“그렇구나, 하긴, 모르는 사람이 많으면 불편하긴 하지.”
말을 하던 황보수정의 시야에 설하윤과 그 앞에 다 마신 맥주캔이 들어왔다.
“……근데 하윤이는 언제 만났어?”
호숫가의 공기보다 더욱 차가운 음성이었다.
“하윤이는 이 앞에서 만났다.”
백일진이 대답을 마친 순간, 설하윤과 황보수정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하윤이라고 부른 거지?’
‘지금 하윤이라고 불렀어?’
물론 내포한 의미는 달랐지만.
황보수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밤이라 볼 수는 없었지만, 순식간에 달가워진 눈망울은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름을…….’
황보수정도 내심 설하윤이 백일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알 수 있어, 나도 일진이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왜냐? 백일진이 항상 자신에게는 ‘수정’이라 불렀고 설하윤에게는 ‘설하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누군가는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는 정도의 사소한 일 가지고 무슨 요란이냐고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는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게 당연한 거잖아…….’
하물며 그 대상이 웬만한 일에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백일진이라면 더욱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물을 보았는지 호수에 잠긴 깊은 물은 유독 어두워 보였다.
반면, 설하윤의 반응은 황보수정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백일진의 입에서 나온 ‘좋은 친구’라는 말에 살짝 메말랐던 그녀의 표정은 성을 떼고 부른 ‘하윤이’라는 말에 생기를 되찾았다.
‘그래, 원래 남녀의 관계는 친구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하니까.’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상황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니.
가볍게 입가를 올린 그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웃음을 보았는지 깊은 물에 비친 달이 유독 밝아 보였다.
* * *
카리스의 연구실.
보통 카리스의 연구실은 사마진이나 나혁중처럼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깔끔함을 유지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청결 상태는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의 연구실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잔뜩 어질러진 상태였다.
책상 위에는 각종 책과 서류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테이블엔 커피 캔과 에너지 음료 캔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하지만 카리스는 그것들을 치울 생각이 없는지,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후우-’
얼마 전, 나혁중 교수가 요동에 있는 살루를 궤멸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발견해 낸 하해파의 광폭화 스크롤 때문에.
중소방파연합에서는 당연히 협조도 구하지 않고 무작정 요동에 쳐들어온 검제의 태도를 비판했지만, 중소방파연합에서 감히 검제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없었기에 흐지부지 끝이 났다.
‘명분이 나 학장님께 있기도 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카리스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나 학장님 일도 그렇지만, 이…….’
카리스가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낼 찰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교수님, 저희 대박 났어요!”
“뭐가.”
카리스는 해맑은 미소를 걸고 들어오는 베르만을 보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거 보세요.”
“이게 뭔데.”
“이번에 팔린 호외 부수예요. 토너먼트 내용은 아직 싣지도 않았는데 정기호만큼 팔렸다고요. 교수님 한턱 쏘…….”
말을 하던 베르만은 카리스의 표정이 좋지 않자, 하던 말을 멈췄다.
“교수님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야. 생각할 게 있어서.”
아니라고 말을 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너무 썩어 있다. 베르만은 스윽 내밀었던 태블릿을 다시 집어넣었다.
‘괜히 불똥 튀기 전에 나가야겠네.’
아무리 그가 선이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베르만은 슬쩍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가라.”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카리스가 책상 밑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다크 배지.’
텔로스의 정식 멤버들에게만 부여된다는 배지였다.
자신의 아버지인 타스칼의 유품 중에 발견한 물품이었는데 사실 그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텔로스의 간부였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문제는 배지를 감싸고 있던 텔로스의 명단이었다.
‘이 사람이 텔로스였다고?’
얼굴을 굳히고 턱을 괸 채 배지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던 카리스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확인해 봐야겠어.’
배지를 들고 있는 손을 꽉 쥔 카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 * *
아르무트는 자신의 방에 찾아온 인물을 보고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문 앞에는 카리스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죠?”
“호오, 카리스 교수님이 제 방을 찾아주시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네, 뭐.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늘 잘 있죠.”
카리스는 접객용 소파에 앉아 아르무트가 내미는 홍차를 받아 들었다.
“요즘 사마진 교수님이랑 어울리신다면서요?”
“아, 네 뭐. 생긴 거랑 다르게 깐깐하진 않길래 친해졌습니다.”
“음, 그래요? 근데 여기는 무슨…….”
“아, 참. 아르무트 교수님 제 사회봉사 기간 말씀인데요…….”
답지 않게 계속 말을 돌리려는 카리스의 모습. 그는 낯선 카리스의 모습에 뭔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입가에 웃음을 지운 아르무트는 카리스에게 들으라는 듯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그래서 묻고 싶은 말이 뭔가요? 카리스 교수님.”
아르무트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중한 목소리였다.
“흠…….”
“말씀해 보세요.”
커피잔에서 눈을 뗀 카리스가 고개를 돌려 아르무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품에서 웬 검은 색깔의 배지를 내보였다.
“아르무트 학장님, 혹시 이 배지가 뭔지 아십니까?”
카리스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배지를 꺼내 든 순간, 아주 잠시 동안 아르무트의 숨소리가 멈췄다.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