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staff RAW novel - Chapter 175
아카데미 담당 일진 175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의 문이 열렸다.
잠깐 가만히 멈춰 서서 통신 마법이 끊어진 수정구슬을 지켜보던 단계홍은 이내 몸을 돌려 교수들을 불렀다.
“네, 단 교수님.”
“조별로 학생들을 줄 세워 문으로 들어오게나. 문이 좁으니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당자인과 조교수들은 조별로 학생들을 모은 다음 차례로 입장시켰다.
백일진도 같은 조의 조원들인 남궁종수, 진철, 조운창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흠, 여기가 빙궁? 아무것도 없는데.’
성벽 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수북한 털을 가진 남자가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물론 초령단원들도 ‘누구지?’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으나 단계홍은 그를 아는 눈치인 듯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 오랜만일세. 전악.”
“오랜만입니다, 형님.”
오랜만에 해후한 둘은 잠시간 안부를 나눴다.
“아, 인사를 시켜줘야지. 이쪽은 우리 아카데미 교수인 당자인, 독희라는 별호는 들어봤지? 그리고 저기 조교수들.”
당자인과 조교수들은 고개를 숙여 전악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쪽은 선풍권협 윤창 단장. 연맹 초령단의 단장이지. 알고 있지?”
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빙궁에서 초령단에 들어간 아이들이 몇 명인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악 대협.”
“대협은 무슨, 그냥 추운 곳에 살아가는 수염 난 노인네일 뿐인데. 그나저나 자네도 잘 지냈는가? 부단장일 때 마지막으로 본 것 같은데 단장이라니 출세했군.”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악 대협은 더욱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북해의 한설도 대협을 바래게 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허, 대협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켈켈- 빙궁의 대들보인 자네가 대협이 아니면 달리 누가 대협이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
“두 사람께서 제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악은 내심 나쁘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금칠이라니, 나는 없는 말은 안 하는 사람인 거 알지 않나.”
단계홍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학생들과 초령단원들은 놀란 눈초리로 전악을 쳐다봤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교수님이랑 호형호제하는 거지?”
“그러게,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전악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아니, 나는 처음 들어봐.”
“나도 들어본 적 없어.”
학생들의 속닥거림을 들은 단계홍은 쓰게 웃었다.
‘하긴 모를 만도 하지.’
그도 그럴 것이 전악은 당금의 무림에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북풍패권(北風覇拳)이라는 별호가 있긴 했으나 활동을 워낙 짧게 한 탓에 아는 이들만 아는 이름으로 남게 된 것.
하지만 아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전악의 실력은 널리 이름을 알린 이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출신이 빙궁만 아니었어도 아카데미 교수로 딱이거늘.’
호방한 성격에 시원시원한 말투, 대쪽 같은 절개까지.
아카데미에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만한 인재였지만, 단계홍은 전악이 절대 북해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고개만 내저었다.
‘그래서 내가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고.’
인사를 마친 전악은 눈을 돌려 좌중을 훑었다.
“이쪽이 학생들이고 저쪽이 초령단원들이군.”
“그렇다네.”
“아, 일단 이것부터 꺼내야겠군요.”
전악은 아공간을 열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마스크 같은 것들을 바닥에 툭툭 꺼내놓았다.
“이것들이 다 뭔가?”
“북해 물개의 가죽으로 만든 복면입니다. 날 선 바람을 막아주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지요. 덤으로 보온도 가능하고요.”
“호오, 신기하군.”
“잠시만, 이걸 좀 주고 오겠습니다.”
마스크를 전부 꺼낸 전악은 학생들과 초령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이곳부터 빙궁까지 네 시간 정도를 달려야 하니 이것들을 쓰시오! 얼굴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다시 자리로 돌아온 전악은 품에서 방금 꺼낸 것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스크 하나를 꺼내 단계홍에게 내밀었다.
“형님도 쓰십시오.”
“응? 나는 괜찮네. 장벽 바깥도 아니고 장벽 안쪽이라서 바람이 그리 강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이 정도의 바람을 못 버티겠는가.”
단계홍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전악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형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방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전악은 다음으로 당자인과 조교수들, 윤창과 부단장인 우지준에게도 마스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달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지?”
“네, 벌써 착용하고 달리고 싶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마스크를 받아 든 당자인과 윤창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과 달리 학생들과 초령단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 나는 달리기 싫은데…….”
“뭘 달려. 이제 들어왔는데.”
“방금 못 들었냐? 네 시간을 더 달려야 된대잖아. 입 다물고 마스크나 써.”
“여기서 네, 네 시간을 더 달린다고? 아니, 어떻게 또 달리라고. 지금까지 달려왔잖아.”
북해까지 달려오면서 소모한 체력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도착했다고 생각하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는데 다시 달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힘이 쭉 빠져 버린 것.
남궁종수도 물집이 가득 잡힌 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빙궁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아, 추워 죽겠는데…… 미치겠네.”
황보철수는 투덜대고 있는 남궁종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킥킥댔다.
“존스, 내가 말했잖아. 성벽 전체가 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거라니까.”
“하, 아무리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지.”
“그래도 존스 너는 귀마개라도 챙겨왔지, 그것도 없는 다른 애들은 털모자를 내려서 쓰고 있어.”
“야, 인마. 이건 내가 챙겨온 게 아니라 어젯밤에 천사가 나한테 남겨두고 간 선물이야.”
남궁종수는 슬쩍 예자원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남궁종수와 똑같은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었다.
“어련하겠냐.”
바닥에 널브러진 마스크 하나를 주워 든 백일진은 미간을 좁혔다. 가죽 마스크인 만큼 만듦새가 조악했기 때문.
‘냄새나게 생겼군.’
-그래도 쓰는 게 나을 거다. 이 정도 추위라면 달려가는 도중 얼굴이 부르트고 말 테니.
‘알았다.’
다른 학생들도 백일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마스크를 주워 들고는 주위 눈치를 살폈다.
“빨리 착용 안 해?”
학생들은 단계홍이 눈을 부릅뜨고 나서야 스멀스멀 마스크를 착용했다.
백일진이 마스크를 착용하려는 그때, 전악이 그에게 손짓했다.
“머리 맵시가 독특한 걸 보니 저 친구가 그 백일진이라는 친구인가 보군요.”
단계홍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성룡에 대한 소문이 북해까지 퍼졌나?”
“소문이 퍼졌다기보단…….”
전악이 말끝을 흐리자 단계홍이 눈썹을 까닥였다.
“응?”
“……아닙니다, 10분 정도 저 아이와 대화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신성룡이라는 별호를 들으니 궁금한 게 있어서요.”
단계홍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저 윤창 단장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네.”
윤창은 고개를 숙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면 대화를 좀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형님.”
단계홍은 손목에 달린 시계를 보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정도는 상관없겠군. 그래도 최대한 빨리 얘기를 끝내주시게. 지금 학생들이 오래 버틸 상태가 아니거든.”
“네,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사실 전악은 신성룡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별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백일진이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어떤 성격인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백일진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던 이유는 소궁주 설하윤의 마음을 가져간 이가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따로 백일진이라는 녀석을 조사했기 때문에 대충 아카데미에서의 행적은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로 듣는 것과 직접 만나보는 것은 다른 법. 전악은 눈을 뾰족하게 뜬 채 백일진을 시야에 담았다.
‘저 녀석이 소궁주의 마음을 가져간 녀석이렷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얼마 전, 라트라제와 격돌한 충격의 여파로 지금 설하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문득문득 백일진이라는 이름을 내뱉곤 했으니.
전악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손녀와도 같은 설하윤의 풋사랑을 응원해 주고 싶은 생각.
또 하나는, 빙궁의 호법으로서 설하윤의 마음을 꺾어야겠다는 생각.
결국, 그의 생각은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손녀와도 같은 설하윤의 마음을 언제까지고 강제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설하윤이 설화신공을 대성하는 날.
빙정을 다시 만들어내는 날.
빙궁이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그러한 날이 오면 어떤 남자를 만나도 상관없었다.
동네 시정잡배를 데려와도 설하윤이 좋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전악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설하윤은 빙궁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풋사랑’ 같은 알량한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설하윤에게 직접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미 한가득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까지 하면 부담이 더욱 가중될 테니.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백일진이라는 녀석에게 주의를 주는 것.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군.’
천마검은 백일진에게 다가오는 전악을 보며 말했다.
-저 수염 많은 덩치 늙은이 표정이 곱지 않아 보이는데?
-음,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는군. 일진, 혹시 저 사람이랑 척진 거라도 있나.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인데.’
개벽환까지 이렇게 말하자 백일진은 다가오는 전악의 표정을 살폈다.
‘뭐지?’
개벽환과 천마검의 말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전악의 표정은 흉신악살을 방불케 했다.
“자네가 백일진인가?”
“네.”
백일진의 짧은 대답을 들은 전악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원래 그렇게 말이 짧나.”
“네?”
“원래부터 어른들에게도 그렇게 말이 짧으냐는 말일세.”
“…….”
천마검은 웃음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표정뿐만이 아니라 말투까지 대놓고 공격적인데?
-처음 보는 사람 맞나, 마치 딸아이를 가져가려는 사윗감을 보는 눈빛인데.
‘진짜 처음 보는 사람인데…….’
백일진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전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자네에게 왔을 것 같은가.”
“모릅니다.”
“정말 모르나?”
“모릅니다.”
“…….”
예상과 다른 백일진의 반응에 내심 당황한 전악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음, 그럼 내 다시 이렇게 물어보지.”
“네.”
전악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말투로 물었다.
“자네, 우리 소궁주와 무슨 관계지?”
그러자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