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18)
오글거리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도 없고.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려던 그때.
“주군!”
마코토가 나를 부르며 와락 안긴다.
그녀가 내 허리를 꽈악 끌어안는다.
“마코삐, 오늘 하루만······. 어리광 부릴래. 내일부터는 다시 착실한 주군의 검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도 괜찮지?”
그 빌어먹을 호칭은 대체 왜 하는지.
에휴.
“맘대로 해라.”
“응.”
마코토가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낸다.
하여간.
쟤 일부러 저런 건 아니지?
[역시 이래야 내 파트너답지.]이제는 익숙해진 흑태자의 목소리와 함께 그날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뭔가 수상쩍기는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같은 시각.
슈오우 영웅 학원 기숙사.
올리비아의 방.
“흥, 흐흥.”
화장대 의자에 앉은 올리비아가 콧노래를 부른다.
화장대 위에는 여름 축제와 불꽃놀이 포스터가 놓여 있다.
일본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산노마츠리의 포스터다.
“따, 딱히 이, 이런 축제 따위에 큰 관심은 없지만······.”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린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관심이 없다는 혼잣말과는 다르게, 올리비아는 이미 축제에 대해서 철저히 공부해둔 상태였다.
왜냐하면 축제에 함께 가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전통적인 데이트 코스 중 하나였으니까.
“으으으으으으······.”
김덕성의 얼굴을 떠올린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올리비아는 알고 있었다.
최근 그가 에리, 린, 마코토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지만, 역시 신경 쓰인다.
“정말이지 바보 멍청이 같으니······! 저, 전속 시녀인 제가 있는데도 가, 감히 도둑고양이들이랑······!! 으으으으으으으!! 믿을 수 없어요! 파렴치한!”
올리비아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친다.
스윽.
그녀가 포스터 위에 손을 올린다.
“이번 축제에는 바, 반드시 제가······. 그와 함께······. 어, 어디까지나 전속 시녀로서 에스코트를 하겠어요!! 전속 시녀니까요!!”
올리비아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소리친 그때.
“황녀님.”
그녀의 귓가에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벨라의 목소리다.
드르륵.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서랍에 여름 축제 포스터를 집어넣는다.
“무, 무슨 일이죠. 벨라?”
올리비아의 시선이 벨라를 향한다.
갈색 보브컷 미녀 메이드, 벨라가 공손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본국에서의 호출입니다.”
“갑자기 왠 호출이죠?”
올리비아의 시선이 벨라를 향한다.
벨라가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약혼 관련 건입니다.”
벨라의 대답을 들은 순간.
올리비아의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마코토와 만남이 끝난 뒤.
월요일, 등굣길.
평소처럼 한서진이 챙겨주는 토스트와 콜라를 먹은 뒤, 책가방을 챙겨 기숙사를 나선다.
“좋은 아침이군. 김덕성!”
기숙사 현관에 내려오자 손을 흔드는 남색 포니테일 미소녀, 린이 있다.
“간밤에는 잘 잤어. 주군?”
“주인님. 에리링은 주인님이 보고 싶었어!”
그 옆으로 이제는 같은 반이 돼서 등교를 함께 하는 마코토와 에리가 보인다.
“쿠로사와는? 오늘도 이시하라 놈이랑 같이 갔냐?”
“그렇다.”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들어 묘하게 주인공 놈이 나에게 이 짐덩이들을 떠맡기는 기분이 든다.
[그 쿠로사와 유지라는 친구. 눈치가 빠르구만.]흑태자가 헛소리를 지껄인다.
눈치가 빠르다고? 그 쿠로사와 유지가?
2010년대 초반 라노벨 주인공답게 응? 뭐라고?를 남발하는 걔가 눈치가 빠르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말을 말지.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시선을 돌린다.
“······.”
거기에는 굳은 표정으로 바닥을 보고 있는 올리비아가 있었다.
그녀와 내 눈이 마주친다.
“아······.”
올리비아가 낮은 탄식을 터뜨린다.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가방은 제가 들게요. 저는······. 당신의 전속 시녀니까요.”
평소처럼 아가씨 웃음을 지어 보이는 올리비아.
그런데 어색한 느낌이 든다.
[파트너. 우리 올리비아.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야.’
오늘의 올리비아는 뭔가 이상하다.
묘하게 부자연스럽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느낌이야.’
[나도 방금 그렇다고 생각했어. 역시 파트너. 안 그런 척해도 내 동생을 제일 먼저 생각해줬구나? 짜식. 역시 그럴 줄 알았어.]내가 이 미친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 제일 오래 있었던 인물이 올리비아다.
라노벨 캐릭터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올리비아고.
그러니까 이 정도 어색한 기류를 읽어내는 건 껌이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새삼스럽게 쓸데없이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벨라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나도 걱정되는데.]흑태자가 말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본인에게 물어보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그 자존심 높은 츤데레 올리비아.
내가 말해봤자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는 어려울 터.
이럴 때는 차라리 그녀의 전속 메이드인 벨라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
역시 흑태자.
올리비아 전문가다운 결론이다.
‘그러지 뭐.’
별일 아니어야 할텐데.
“이봐요 당신. 가방 안 주고 뭐해요?”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린다.
그녀의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든다.
“알았어. 가방. 자.”
덥석.
내 가방을 받아든 올리비아가 웃는다.
아까 잠깐 보였던 그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좋아요! 오늘도 당신의 전속 시녀로서, 성실히 당신을 수행하겠어요!”
후후후.
여전한 아가씨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서는 올리비아.
“역시 황녀님, 범접할 수 없어. 그래도 에리링도 주인님을 위해서 힘낼 테니까!”
“큿······. 나는 아직 멀었군······. 좀 더 수행이 필요해.”
“주군······.”
에리, 린, 마코토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등굣길에 나서면서 휴대폰을 꺼내 벨라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벨라] [갑자기 개인 연락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의 주인님] [설마 저에게 정말로 관심이 생기신 건?]읽음 표시와 함께 곧바로 날아오는 답장.
전에도 그렇고 이 메시지 장난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벨라의 장난기도 여전하군. 추억이야. 그나저나 파트너. 벨라랑 꽤 친해진 모양이야. 장난도 주고받을 정도면.]흑태자의 말을 무시하면서 답장을 보낸다.
[아니]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부활동 끝나고 시간 괜찮아?] [숙녀의 시간을 함부로 빼앗으려 하시다니, 역시 ‘검은 귀축’ 그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군요.]뒤이어 돌아오는 벨라의 답장.
오랜만에 저런 메시지를 받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기 이전에 어이가 없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농담 아니고 진짜 중요한 일이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주인님.] [부활동 끝난 뒤, 기숙사 세탁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벨라의 답장을 확인한 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올리비아, 진짜 별일 아니겠지?
*
방과 후. 부활동 시간.
요리부실.
책장에 부활동 예산으로 사둔 요리책이 잔뜩 꽂힌 모습이 인상적인 부실 안에서,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안녕. 김.”
“형님, 오랜만임다!”
오늘은 웬일로 매일 같이 연습을 핑계로 부활동에서 자주 빠지던 이시하라와 유지까지 온 상황.
탁.
부실 문이 닫힌다.
“다들 전부 모였구나?”
창가 바로 앞자리에 앉은 카스미 선배가 읽던 책을 내려놓는다.
참고로 내가 앉은 자리는 부실 문 바로 앞자리.
카스미 선배와 나, 둘 다 길쭉한 직사각형 테이블 끄트머리에 혼자만 앉는 자리다.
카스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평소 읽던 문고판 소설책이 아닌, 요리부의 컨셉에 걸맞는 요리책이다.
“호시노 선배. 왜 갑자기 부원 전원 소집령을 내린 겁니까?”
린이 묻는다.
“후후. 다들 왜 모인지 궁금했구나?”
카스미 선배가 요리책을 펼쳐 얼굴을 가린다.
저 모습을 보니 살짝 불안하다.
착.
그녀가 포스터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린다.
“열흘 뒤에 산노마츠리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후후. 요리부 단합도 할 겸 후배들이랑 축제에 같이 가고 싶어서 불러 모았어.”
일본어로 요란하게 축제와 불꽃놀이 어쩌고가 쓰여 있는 포스터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름 축제라.
일본 서브컬쳐 하면 빠질 수 없는 이벤트고, 당연히 최약영웅 원작에도 등장한다.
카스미 선배가 팔랑팔랑 손에서 흔드는 산노마츠리가 원작에 등장하는 시점은 5권 1챕터.
올리비아, 린, 에리와 주인공이 같이 축제를 즐기는 일상 이벤트 장면이다.
1챕터를 전부 차지한만큼 꽤 분량은 되지만, 스토리적으로 딱히 의미는 없던 이벤트.
축제 끝난 다음 날부터 펼쳐지는 2챕터가 바로 사오리의 생도 파견 임무 지목과 듀랜달 쟁탈전 시작이라 더 그렇다.
물론 듀랜달을 이미 선점한 지금 시점에서 5권 이벤트는 큰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무슨 시간?]흑태자가 반문한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느낀 거지만, 흑태자는 내 생각 전부를 읽어낼 수 없다.
내가 그와 대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보낸 사념만 읽어낼 수 있다.
덕분에 나는 흑태자에게 아직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상황이다.
굳이 말해줄 이유도 없고.
돌아가야 하니까.
‘그냥, 벌써 1학기도 다 끝나가나 싶어서.’
[곧 여름 방학이네. 파트너. 방학 때는 뭐 할 거냐?]방학이라.
외전인 원작 6.5권이 주인공의 여름방학 일상 이벤트를 다루는 에피소드기는 하다.
TVA에서는 안 나왔고, OVA 에피소드로 나왔던 건데, 라노벨 일상물 외전이 다 그렇듯 크게 의미 있는 스토리는 아니다.
그냥 히로인들과 주인공의 꽁냥꽁냥 이벤트 정도.
그걸 내가 따라할 필요는 없으니, 굳이 방학 때 해야 할 일이라면.
‘쉬어야지.’
얼마 만의 방학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방학은 노는 시간이다.
그때.
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모국에는 안 돌아가냐? 한국 말이야. 방학이면 당연히 돌아가야 하지 않냐?]귀국이라고?
생각도 못 한 부분이다.
기사로 접한 한국의 모습을 떠올린다.
온통 치사량 국뽕 투성이의 국민들,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서울 거리, 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절하는 대통령.
라노벨과는 다른 방향으로 벌써 소름이 끼치기 시작한다.
현해탄. 진심으로 건너도 괜찮은 건가?
그렇다고 바로 옆동네인데 이걸 안 갈 수도 없고.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
그렇게 내가 결론을 내린 그때.
“오오오오오! 축제! 에리링도 갈래! 에리링. 주인님도 한 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카타를 입고 올 테니까! 다들 각오하라고!”
“유카타의 미학은 풍요로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곡선이 핵심. 니시자와. 너 같은 빨래판은 유카타의 진정한 멋을 재현할 수 없다.”
척.
린이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김덕성. 기대해라. 축제 날. 내가 진정한 일본의 미(美)를 보여줄 테니.”
일본의 미는 무슨.
또다시 시작된 유치한 싸움.
린의 시선이 에리의 가슴으로 향한다.
린의 입가에 약한 비웃음이 떠오른다.
“훗. 역시 절벽답게 빈약한 가슴이군. 빨래판.”
그녀의 눈길을 받은 에리의 얼굴이 빨개진다.
에리가 양팔을 교차해서 본인의 가슴을 가리면서 소리친다.
“뭐? 지금 말 다 했어? 젖소? 자고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야. 그러니까 은하 랭크 미소녀 에리링이야말로 유카타가 제일 잘 어울리는 미녀야. 그런 음탕한 지방 덩어리 따위, 에리링은 없어도 상관없어.”
에리가 볼을 부풀리며 말한다.
본인이 본인 보고 은하 랭크 미소녀?
아무리 예쁘다지만 진짜 한숨만 나온다.
“길고 짧은 건, 아니 크고 작은 건 대 보면 알겠지. 빨래판. 물론 당연히 승리하는 건 이 시노자키 린이겠지만 말이다.”
“좋아. 도내 최고 미소녀로서 네 도전, 확실히 접수했어. 젖소. 누가 더 유카타가 잘 어울리는지, 승부야. 주인님. 심판은 맡길게!”
뭐?
지금 뭘 맡겨?
“나도! 나도 승부 참여할래! 주군에게 내 유카타 차림, 인정받을 거야.”
번쩍.
가만히 있던 마코토가 손을 들고 소리친다.
“후배 군. 당연히 후배 군은 내 유카타를 최고로 평가해줄 거지? 믿고 있어. 후배 군. 후배 군은 검은 귀축이지만, 상냥한 남자니까······.”
마지막으로 요리책을 펼쳐 얼굴을 가리는 카스미 선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