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20)
둘만 있던 공간에서, 이제 약혼했으니 마음대로 취해도 괜찮겠냐며 음습하게 그녀를 말로 희롱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렇게 끔찍한 욕망을 지닌 윌리엄이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철저하게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구밀복검형 인간.
‘끔찍해요!’
그래서 더 싫었다.
그녀가 양팔을 교차해 끌어안는다.
나라에서 정해준 약혼이라면 어길 수 없다 생각했었다.
황실의 혈통을 타고난 이상, 정략결혼은 운명.
스스로의 의사와 반하는 결혼 따위 각오했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다.
“정말······.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은하에서 제일 둔한 남자······.”
올리비아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댄다.
“······당신 같은 최저 최악의 귀축남 따위······.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속 시녀라서 지금까지 감당하고 있지, 다른 여자가 전속 시녀였다면 진작에 도망가고도 남았을 거라구요.”
넘겨줄 수 없다.
다른 도둑고양이들에게.
그렇지만······.
“······욕심을 부려도 괜찮은 걸까요.”
일본에 유학을 보낸 이유는 네가 자유로운 학창 생활을 보내기를 바라서지, 족보도 없는 소국의 서민과 어울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민의 전속 시녀 노릇에, 심지어 그 서민과 스캔들까지 나다니, 약혼자가 있는 숙녀의 행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본국으로 귀국해 소명해라.
벨라를 통해 그녀에게 온 보나파르트 황실의 전언이었다.
“축제는······. 그 바보랑 같이 보낼 수 있겠네요. 그나마 다행인 걸까요.”
축제에서 사용할 비장의 수단은 이미 준비해뒀다.
문득 빨래하러 가기 전, 벨라가 남긴 조언이 그녀의 귓가에 맴돈다.
[일본에서는 축제 날 불꽃놀이를 보면서 상대한테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벨라의 말을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 그런 건 미신이라고요! 전부 미신이에요!”
불꽃놀이, 고백, 사랑.
세 글자가 올리비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돈다.
화악.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어쩌면.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불꽃놀이 때 그에게 고백······.
“아니에요!”
올리비아가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녀가 불꽃놀이 사진이 박힌 포스터를 구긴다.
“미신 따위, 저, 절대로 믿지 않으니까요!”
올리비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힐끗, 구겨진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불꽃놀이 사진이 선명하게 비친다.
라노벨 아니라니까
서늘한 창날이 목젖에 닿는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리스의 은빛 시선이 내게 향한다.
휙.
아리스가 창을 거두면서 말한다.
“오늘 특훈은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긴장이 빠지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주저앉는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상태다.
[수고했어. 파트너. 요즘 단련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은데?]흑태자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한다.
[솔직히 파트너의 썩어빠진 근성이라면 무조건 작심삼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 예상이 틀렸어. 기분 좋은 빗나감이야.]뭐? 작심삼일?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이 인간이 사람을 뭘로 보고.’
[솔직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선의를 의심하는 쿨찐에 죽을 뻔했는데도 단련하기 싫어하는 세계 최강 게으름뱅이 정도?]말도 안 되는 음해가 돌아온다.
에휴.
대답할 기운도 없다.
대자로 바닥에 자빠져 숨을 고른다.
허파까지 숨이 차오른 덕분에 뭘 할 수도 없다.
탁.
아리스가 내 옆 바닥에 스포츠음료와 땀수건을 내려놓는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김덕성 군. 날마다 점점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개미 눈물만큼 조금씩 나아진다는 부분이 문제긴 하지만요.”
입에서 나오는 독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가 옅게 웃는다.
그녀의 캐릭터 설정을 떠올린다.
완벽 아가씨 연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아리스.
그녀가 가장 진심으로 대하는 건 훈련이라는 설정.
학원 최강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아리스는 학생회 업무를 제외한 일과 대부분을 훈련으로 보낸다.
노력하는 천재라는 클리셰다.
몸을 반쯤 일으킨다.
아리스가 건넨 수건을 집어 땀을 닦으면서 스포츠음료를 마신다.
차가운 스포츠음료의 청량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그래도 당신의 각오가 작심삼일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칭찬해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아리스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작게 손뼉을 친다.
흑태자도, 아리스도 칭찬하는 건 좋은데 왠지 우쭈쭈해주는 느낌이라 기분이 영 별로다.
“훈련도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이온지 선배.”
땀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은 여름 축제에 가기로 약속한 날.
지금 씻고 준비해서 나가면 시간이 딱 맞다.
“······김덕성 군.”
아리스가 나를 부른다.
“혹시 오늘 훈련 끝나고 약속, 있습니까?”
“부원들이랑 여름 축제에 가기로 했습니다. 산노마츠리요.”
대답을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그녀가 말한다.
“알겠습니다. 부원들과의 약속이라면 어쩔 수 없군요. 통금시간은 반드시 준수하시고, 품행 방정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밖에서는 생도 한명 한명이 슈오우 학원의 얼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리스가 잔소리를 덧붙인다.
어디 나갈 때 잔소리를 하는 걸 들으니 엄마 생각이 난다.
항상 어디 놀러 나갈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연락 잘 하고,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었는데.
그때는 그걸 왜 귀찮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올리비아 일도 있는데 고향 생각까지 같이 떠오르니 기분이 겉잡을 수없이 가라앉는다.
“······알겠습니다. 사이온지 선배. 걱정하실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축제 조심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김덕성 군.”
아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연습실을 나선다.
이제 외출 준비를 할 시간이다.
*
탁.
김덕성이 나가며 연습실 문이 닫힌다.
혼자 남은 아리스가 입술을 깨문다.
“큭······.”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특훈이 끝나고 같이 축제에 가자고 말하려고 했었다.
이왕이면 단둘이서.
그 간단한 한마디를 기숙사에서 혼자 거울을 보며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완벽한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답게 말하기 위해.
절대 그때 이케부쿠로에서 만난 후배가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개인 교습 상대로서 좀 더 효율적인 특훈을 위해 친밀감을 다지기 위해서 그런 거다.
“김덕서이······. 이 나쁜 머스마······. 내가 일부러 유카타까지 준비했는데······.”
아리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칸사이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그날 이후 특훈 시간이 늘어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도 덤으로 늘기는 했지만, 아직 뭔가 모자라다.
게다가 그가 특훈 시간을 늘린 이유가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사실을, 아리스는 무의식중에 이미 깨닫고 있었다.
라노벨에서 흔히 나오는 여자의 직감이다.
“크으으으으······.”
선배가 되어서 후배가 부원들과 함께 축제를 보낸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의연하게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리스는 슈오우의 학생회장이니까.
“내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리스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시골에 살던 시절, 따돌림을 당하던 아리스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즐거움이 동네 신사에서 1년에 한 번 여는 축제였다.
부모님의 손을 꼬옥 잡고, 유카타를 입고 축제 노점에서 오징어 꼬치를 사먹으며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추억이 아리스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몇 없는 어린 시절의 즐거운 추억.
도쿄로 상경한 이후 지금까지 아리스는 축제에 가본 적이 없었다.
완벽한 학생회장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개인 단련도, 학생회 업무도, 이론 공부도 전부 게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축제는 어떤 모습일까?
여름 냄새나던 고향의 축제 같은 느낌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처럼.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축제를 즐기고 불꽃놀이를 보고 싶······.
“아니데이! 그, 그런 불건전한 상상 같은 건 저, 절대로 안 했데이!”
아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크으으으으······. 후우. 날씨가 와 이래 덥노······.”
펄럭펄럭.
에어컨 풀 가동 상태인 연습실 안에서 괜한 날씨 탓을 하면서 아리스가 손부채를 부치던 그때.
우웅.
아리스의 핸드폰이 울린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울린다.
혹시 그가?
기대감을 품은 아리스가 핸드폰을 확인한 그 순간.
[아-쨩.]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냐?]그녀의 시야에 이사장, 요시자키 세이라가 보낸 메시지가 들어온다.
“아.”
약한 실망감이 아리스의 얼굴에 떠오른 그때.
말줄임표와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괜찮으면 이 언니와 함께 산노마츠리에 다녀오지 않겠느냐?]산노마츠리.
그 단어를 본 아리스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래.
이건 외유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사장의 권유를 승낙했을 뿐이다.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스크린 키패드를 두드린다.
[알겠습니다. 언니.]그녀의 답장이 세이라의 휴대폰으로 전송된다.
*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끝낸 뒤, 뽀송뽀송한 몸에 사복을 걸친 이후 학원을 나섰다.
“여, 김. 왔구나.”
“오쓰! 형님! 오셨음까?”
기숙사 현관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시하라와 유지가 보인다.
“빨리 가자.”
축제가 열리는 장소는 히에 신사.
얘네와 함께 전철을 타고 도착하면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을 거다.
올리비아, 린, 마코토, 에리, 카스미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남자들과 따로 떨어져 자기들끼리 모이기로 해서 이 자리에 없다.
“알았어.”
“형님 뒤만 따라가겠슴다.”
내 뒤를 따라오는 유지와 이시하라.
한국인에게 길 안내를 맡기는 일본인이라니.
여기 일본 맞나?
[축제라. 파트너. 나도 모처럼 기대되는데?]애처럼 들뜬 흑태자를 데리고 슈오우 학원 교문 앞 전철역에서 전철을 탄다.
덜컹덜컹.
축제날이라 그런지 전철은 만원.
유카타 복장의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오, 형님. 자리 났슴다. 앉으십쇼.”
이시하라의 안내를 받아 간신히 자리에 착석한다.
목적지인 국회의사당역까지 남은 시간은 꽤 된다.
할 일도 없으니, 웹소설이나 봐야겠다.
당연하지만 이 세상에 라노벨이 존재하는 것처럼, 웹소설도 존재한다. 헌터물 비슷한 작품도 있고.
라노벨은 빙의 이후 끊은 지 오래지만, 웹소설만큼은 못 끊겠다.
역시 고구마 농장 라노벨보다는 사이다 공장 웹소설이지.
드르륵.
웹소설 사이트에 접속해 스크롤을 내린다.
[노빠꾸맨] [끝판왕이 돌아왔다]‘이걸 아직도 선작하고 있었네.’
무료분 찍먹하다가 노잼이라 뱉은 겜판소인데, 정리를 안 한 모양이다.
망설임 없이 선작 삭제를 누르던 그때.
[‘사람살려. – 아카데미 플레이어를 죽였다’ 최신화가 업로드됐습니다.]요즘 제일 재밌게 보고 있는 아카데미물 웹소설, 의 최신화 업로드 알람이 뜬다.
지체없이 100원을 결제하고 읽는다.
‘역시 아카게이살 정실은 아리샤지.’
커뮤에서 매일 같이 패배 히로인으로 조롱당하던 아리샤를 불륜 순애 컨셉으로 달리게 만든 작가의 역량에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오늘의 게이살도 만족스러웠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든든한 국밥처럼 오늘 연재분을 완독한다.
장르가 같은 빙의물이라 그런지 가슴에 더 와닿는 기분.
프롤로그에서 플레이어를 죽이는 장면도 그렇고, 초반에 주인공이 『나는 선한 이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구한다.』고 독백하며 계율을 새기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다.
게이살을 보는 다른 독자들과 감상을 나누기 위해 웹소설 커뮤니티에 접속한다.
[아카게이살 이거 누가 추천했냐?] [캐빨 갓작이라길래 봤는데 초반 개유치하고 라노벨같은데??]눈살이 찌푸려지는 글이 보인다.
뭐? 라노벨?
곧바로 키패드를 두드린다.
[라노벨은무슨ㅋㅋㅋ 게이살이 무슨 라노벨임ㅋㅋㅋ 그리고 유료화 이후 폼 떡상하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고 먹어라] [참고 먹으라는 사료중에 재밌는 거 없던데 ㅋ 요즘 웹소판 씹덕다됐다더니 심각하네 ㅋㅋ 라노벨 거름 ㅅㄱ]라노벨 거른다고?
급격한 분노가 온몸을 지배한다.
감히 웹소설을 라노벨 따위와 비교해?
화가 난다.
[라노벨 아니라니까 왜 라노벨이랑 비교하고 지랄이냐 씨발 너 분충이냐?] [갑자기 왜 급발진함 라노벨 씹덕새끼 무섭네] [씨발 라노벨아닌데라노벨이라고하니까빡치지] [ㄴㄷㅆ 이제 보니 IP도 일본이네 ㅋㅋ 라노벨 어그로 차단함]이 새끼가 어디서 지금······.
빡친 내가 빙의 전 최약영웅을 실드치며 갈고닦은 분노의 키보드워리어 실력을 오랜만에 발휘하려던 그때.
“김. 도착했어. 국회의사당역이야.”
유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광판을 보니 목적지다.
염병.
쓰린 속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중에 한서진에게 IP추적 부탁해야겠다.
넌 오늘은 내가 바빠서 봐준 줄 알아.
“갑시다. 형님.”
자리에서 일어선다.
전철 문이 열리자 유카타를 입은 인파가 우르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