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21)
국회의사당역 내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인파를 헤치고 지상으로 올라가자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여름 축제 그 자체.
역 내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일본 만화에서나 보던 간식거리를 파는 포장마차들과 줄줄이 매달려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제등이 보인다.
“우와······.”
“이것이 산노마츠리······!”
옆에 있던 두 남정네가 탄성을 터뜨린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나도 살짝 놀랐다.
진짜 똑같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거랑.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파트너, 저기 소녀들이 오고 있어. 저쪽이야. 저쪽.]흑태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유카타를 입은 린, 마코토, 에리, 카스미.
그리고 올리비아가 있었다.
그런데 올리비아 쟤는 대체 왜 옷차림이 저렇지?
이런 걸 리얼충이라고 하던가?
“주인님? 주인님이다! 주인님! 에리링이야!”
저쪽에서도 날 발견한 모양인지 에리가 손을 흔든다.
올리비아에게 향해 있던 내 시선이 에리에게 향한다.
여우 가면을 비스듬하게 머리 위에 올려 쓴 채로, 머리색과 어울리는 주황색 유카타를 입은 에리가 내 앞에 쪼르르 달려온다.
그녀가 빙그르르 몸을 돌린다.
“에리링 유카타 어때? 역시 에리링이 최고지? 주인님? 그치?”
눈을 반짝이는 에리.
목에 찬 개목걸이는 여전히 그대로다.
벌써 정신이 사납다.
옆을 돌아본다.
“이시하라. 우린 축제 구경이나 할까?”
“아, 응. 그래. 쿠로사와.”
어색한 표정과 웃음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떠나는 쿠로사와와 이시하라.
이 인간들이?
저쯤 되면 진짜 고의가 아닐까?
“네 태평양처럼 평평한 가슴은 여전하군. 빨래판. 그래서야 아무리 인물이 뛰어난들 상대를 유혹할 수 있겠나?”
착.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파란 유카타를 입고, 남색 올림머리를 한 린이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말한다.
“김덕성. 이 나를 봐라. 유카타로도 가릴 수 없는 이 풍만한 가슴이 보이지 않느냐? 내 몸과 처녀는 오직 너만의 것이다. 그러니 나를 선택해라.”
스윽.
린이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오늘 속옷은 안 입었다. 유카타에는 속옷을 입지 않는 게 ‘상식’ 아닌가?”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대체 왜 하는 건데?
[휘유. 파트너. 인기 절정인데? 일본에서는 이런 걸 리얼충이라고 하던가?]‘인싸라고 해라. 한국에서는 10년 전에나 유행하던 단어 쓰지 말고.’
리얼충이라니.
방금 중고등학생 시절 흑역사가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안 궁금하니까 좀 떨어져라. 린.”
그녀를 떨쳐내려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린이 내 곁에 달라붙는다.
향수를 뿌린 모양인지 코 끝에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돈다.
린이 내 팔에 본인의 가슴을 부비부비하며 말한다.
유카타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팔뚝에서 마구 뭉개진다.
“왜 그러지? 혹시 부끄러워서 그런 건가? 김덕성.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건 내 처녀를 마음껏 취해도 괜찮으니까.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오직 너만이 보유한 특권······.”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린이 요염하게 웃는다.
뭐야 얘? 언제 이렇게 대담해졌지?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하면서 황급히 팔을 빼내려던 그때.
“우리 후배 군한테서 떨어지렴. 시노자키 양.”
상냥하지만 어딘가 날이 선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초점이 살짝 흐려진 보랏빛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카스미 선배가 보인다.
보라색 유카타를 입은 그녀 역시 린과 마찬가지로 올림머리를 한 상태.
“후배 군이 곤란해하잖니.”
카스미 선배가 조심스럽게 린과 나를 떼어놓는다.
“큿······.”
린이 입술을 깨물면서 물러난다.
“후후. 후배 군.”
스윽.
이번에 다가오는 건 카스미 선배.
“날 선택해줄 거지? 오늘 너무 설레서 밤잠도 설쳤어. 후배 군은 물론 나쁜 남자지만, 그래도 가련한 소녀의 순정을 짓밟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후배 군이 기사공주를 편애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만큼은 나도 선택받고 싶은걸?”
카스미 선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반짝인다.
“주군, 나도, 나도······! 나도 선택받을래!”
1인칭이 와타시가 아니라 보쿠로 다시 돌아온 마코토가 손을 번쩍 든다.
원래 머리가 짧아서 그런지 유일하게 숏컷인 마코토의 머리핀은 꽃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초록색 유카타로도 가릴 수 없는 풍만한 가슴이 흔들린다.
돌겠네, 진짜.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은 그때.
“다들 물러나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저벅, 저벅.
올리비아가 입을 가리는 아가씨 포즈를 하며 다가온다.
새하얀 한복 저고리에 하늘색 한복 치마를 입은 그녀가 웃는다.
당연하지만 원작에서도 나온 적 없던 모습.
“이 승부는 당연히 이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승리예요!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은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김덕성 씨는 한국인. 일본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의 미를 뽐내는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요! 안 그런가요, 당신?”
촤르륵.
어디서 구한 건지, 수묵화가 그려진 전통 쥘부채까지 펼친 올리비아가 특유의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아니 누가 일본 전통 축제에 한복을 입고 오냐.
황당하네.
이것도 벨라의 짓이 틀림없다.
아무튼, 올리비아가 워낙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어울리기는 하다.
“후배 군!”
“주군!”
“주인님!”
“김덕성!”
“당신!”
제각각 다른 복장을 입은 다섯 미소녀가 나를 바라본다.
저렇게 보니까 평소랑 복장이 달라서 그런지 쓸데없이 전부 예뻐 보인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돈다.
“““““누굴 선택할 건가요?!”””””
다섯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서 귓가에 윙윙 울린다.
돌겠네, 진짜.
대체 그놈의 유카타가 뭐라고 이 난리를 치는 거지?
[파트너. 당연히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선택할 거지?]흑태자가 은근한 압박을 준다.
“에휴.”
내가 한숨을 쉬자 찌릿하는 다섯 소녀의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
아무 말 없이 걸어서 올리비아의 손목을 잡는다.
“오늘은 올리비아가 제일 낫네.”
솔직히 한복이랑 수상할 정도로 잘 어울려서 놀랐다.
유카타나 기모노 같은 거야 원작에서도 일러스트로 무조건 나오는 복장이지만, 한복은 처음 봐서 신선하기도 했고.
역시 이번에는 올리비아를 선택하는 걸로.
“······.”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뱅글뱅글 돈다.
“으, 으우우우우우······.”
올리비아의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파트너. 너 이 자식.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구나?]그런 말은 무슨 그런 말.
그나저나 올리비아는 뭔가 격렬한 츤데레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다.
[역시 내 동생이야. 사랑스럽구만.]머릿속에서 팔불출 흑태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후배 군······. 나는 조금이라도 기대했는데······. 기대한 소녀의 순정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후배 군은 역시 검은 귀축이야······.”
카스미 선배가 고개를 숙이면서 유카타 옷자락을 잡고는 웅얼댄다.
“에리링······. 주인님한테 유카타 보여주려고 열심히 꽃단장했는데, 귀여운 여우 가면도 샀는데······. 힝······. 역시 가슴 때문이야? 그런 거야? 에리링, 우유 더 많이 마실게······.”
뒤이어 에리가 머리 위로 비스듬히 쓴 여우 가면을 만지면서 칭얼댄다.
우유를 마신다고 가슴이 커진다는 건 대체 무슨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큿······. 나는 이렇게 또 패배하고야 마는 것인가······. 뭐 상관없다. 승패는 병가지상사. 지금은 이렇게 패배하지만, 김덕성. 나는 반드시 내 여자력으로 너를 쓰러뜨리고 말겠다!”
척.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입술을 깨물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노자키 린.
여자력으로 뭘 어째?
머리가 어지럽다.
“주군, 나 좀 더 노력할게. 노력해서 주군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게.”
마코토의 소심한 목소리가 끝난 순간.
“후후후후후. 역시 당신이라면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할 줄 알았어요!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제 승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에요!”
한복 저고리를 입은 올리비아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그래. 뭐, 올리비아만 좋다면야.
“그럼. 오늘 밤 불꽃놀이 시간에는 제가 그를 독점하겠어요! 이 승부에서 제가 이겼으니까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웃는다.
불꽃놀이라.
애니메이션으로나 보던 여름 축제 불꽃놀이를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패배를 인정하지. 보나파르트. 하지만 다음번에도 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우우우우! 에리링도 더 분발할 테니까!”
“주군. 나, 더 열심히 노력해서 주군에게 인정받는 여자가 될게.”
“후배 군. 역시 후배 군은 기사공주만 편애하는 나쁜 남자야······.”
린, 에리, 마코토, 카스미가 올리비아를 보며 말한다.
“훗. 그렇게 말해봤자 승자는 변하지 않는다구요! 자, 가죠. 당신!”
올리비아가 내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다.
팔뚝에서 말랑한 감촉이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오늘따라 그녀가 예뻐 보인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진다.
“잠깐. 아직 불꽃놀이 시간은 아니니까! 에리링도 주인님이랑 같이 있을 거야!”
“이번만큼은 나도 빨래판의 말에 동의하지. 보나파르트. 새채기는 반칙이다!”
“나도, 나도 주군 곁에 있을 거니까!”
“후배 군. 같이 가!”
뒤에서 네 여자가 쫓아온다.
결국 부원들을 전부 혹처럼 달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내 팔자야.
[파트너. 여난의 상이구만.]여난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흑태자의 헛소리를 무시하면서 축제가 열리는 도쿄의 밤거리를 걷는다.
어느새 어슴푸레한 밤이 찾아온 시간.
반짝이는 제등과 화려한 포장마차, 왁자지껄한 인파가 시야에 보인다.
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떨어졌는데도 날씨는 꽤 덥지만, 분위기는 떠들썩해서 좋다.
그때.
“주인님! 주인님! 가면 가게 들르자!”
에리가 내 손목을 잡아끈다.
“가면 가게는 왜?”
“주인님한테 가면 사주고 싶어서. 안 될까······?”
에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저렇게 말하면 그때, 비 오던 밤이 생각나서 뭐라할 수가 없다.
“맘대로 해라.”
“주인님 최고!”
그녀를 따라 못이기는 척 가게에 도착한다.
텐구, 오니, 여우 등등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일본 전통 가면이 잔뜩 있다.
“어서 오십쇼! 손님. 와, 이런 미인 분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오는 건 처음입니다! 아하하하하하!”
유카타를 입은 노점 주인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는다.
에리가 코가 커다란 빨간 텐구 가면을 집어들어 계산한다.
“자, 이 가면. 주인님한테 잘 어울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에리가 발꿈치를 들고는 내 머리에 텐구 가면을 비스듬하게 씌운다.
“됐다. 히히. 주인님이랑 에리링의 커플 가면이야!”
통통.
에리가 본인의 여우 가면을 두드리면서 배시시 웃는다.
“하여간, 유치한 건 여전하군. 빨래판.”
“누, 누누누구 마음대로 커, 커커커커커커플 가면이죠?!”
“지이이이이이이.”
“니시자와 양은 새치기가 특기구나. 그렇구나. 나쁜 버릇을 들였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린, 올리비아, 마코토, 카스미 선배가 한마디씩 던진다.
“흥. 에리링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라구. 누가 뭐래도 주인님의 텐구 가면은 에리링의 여우 가면이랑 커플이니까!”
에리가 양팔을 허리에 얹으면서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걸 불꽃놀이까지 견뎌야 한다고?
벌써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올리비아 혼자만 감당하는 게 낫다.
한숨을 쉬면서 개판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빠져나온 그때.
“아-쨩 언니. 세-라땅은 사과 사탕 더 먹고 싶어! 더 사줘! 사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사과 사탕을 파는 노점 앞에 서 있는 여자 두 명이 보인다.
한 명은 눈부신 은발 올림머리에 하얀 유카타를 입은 미녀.
“회장 선배?”
사이온지 아리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리스의 유카타를 당기고 있는, 열다섯 살로 보이는 백발적안의 검은 유카타 미소녀가 있었다.
저거, 설마······.
“세-라땅 배고파.”
“이사장님?”
내 혼잣말이 내뱉어진 순간.
툭.
세-라땅.
아니 요시자키 세이라가 들고 있던 일본 전통 둥근 부채, 우치와를 떨궜다.
그런 취미가 있었구나
“세, 세-라땅은 그런 사람 몰라.”
후다닥.
이사장이 손에 사과 사탕을 쥔 채 빠르게 아리스 뒤로 숨는다.
한숨만 나온다.
“맞지 않습니까. 이사장님.”
이사장의 은밀한 취미 중에 가끔 어린아이인 척하면서 나들이를 다닌다는 설정이 있긴 하다.
설정집에서만 나오고, 원작 본편에서는 개그로 소모되는 장면인데.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우욱.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진다.
“저기, 이사장님. 이미 전부 들킨 것 같습니다만.”
사과 사탕을 들고 있는 아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크흠, 흠.”
세이라가 헛기침을 하면서 아리스의 등 뒤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나온다.
“방금 전 이 몸을 본 사람. 꼬마밖에 없지?”
살짝 위축된 표정의 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