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26)
VIP
VIP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한서진이 언급하는 VIP가 백화점 우수 고객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대통령님이? 직접 날?”
“그렇습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갑자기 너무 국제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 같은데.
이게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질 일이었나?
슬쩍 벨라 쪽을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한 무표정.
생각을 읽어낼 수는 없다.
“자세한 사항은 내일 방일하시는 VIP께 직접 들으시길 바랍니다.”
“알겠어.”
일단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쓸데없이 국뽕을 불태우기는 해도, 어쨌건 막대한 국가예산으로 나를 지원하고 있는 든든한 후원자 중 하나니까.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그래서 밉보일 필요는 없다.
“벨라 씨.”
한서진이 벨라를 부른다.
벨라의 시선이 한서진을 향한다.
“여기, 추적과 해킹이 불가능한 보안 휴대전화입니다. 앞으로 협력 요청은 이 휴대폰으로 할 테니 갖고 계시길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벨라가 휴대폰을 받아든다.
“아시겠지만, 이번 일은 절대 외부에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것이 프랑스 황실이라고 해도.”
“알고 있습니다.”
한서진의 당부에 벨라의 갈색 눈동자가 빛난다.
“저 역시 한때 음지에 종사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괴도 벨라.
본인의 기프트인 쉐도우 마스터 능력을 십분 활용해 유럽 전역에서 활약하던 의적.
있는 자들의 재물을 훔쳐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던 그녀의 과거는 6권에서 유지와 협력하면서 밝혀진다.
“그럼 이번 작전 내부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한서진이 벨라에게 손을 내민다.
벨라가 망설임없이 그녀의 손을 맞잡는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그날의 회의가 끝났다.
*
슈오우 영웅 학원.
기숙사, 사용인 숙소.
온통 김덕성 굿즈와 포스터로 도배된 방.
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실내에 모니터 불빛만이 아스라이 비치고 있다.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번뜩인다.
타닥타닥.
그녀가 키보드를 현란하게 두드린다.
[김덕성 하렘 계획 중간 보고서] [파혼 작전]문서 제목이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운이 걸린 작전의 서막이다.
마코토와 에리의 데이트 지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스케일인 파혼 작전.
그 수행에 앞서, 보고서 작성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작전 최종 목표는 하렘 계획의 강력한 장애물인 윌리엄 제거, 그리고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완전 함락.’
이번 작전이 끝나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완전히 김덕성에게 넘어올 터.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니 연출은 최대한 화려하게 해야 한다.
‘마치 드라마처럼.’
한서진의 머릿속에 수많은 한국의 막장 드라마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악역의 결혼식 파행은 막장 드라마의 유구한 클리셰 중 하나.
욕을 먹지만, 그만큼 극적이고 자극적인 전개라 인기도 많다.
‘이 약혼은 무효다, 라고 선언하며 공주님 안기로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를 안고 가는 김덕성님······.’
장면을 눈앞에 떠올린 한서진의 뺨에 홍조가 떠오른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공주님 안기로······.
한서진이 고개를 젓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녀 자신은 하렘이 낄 자격이 없는 인물.
엔조이 상대, 하룻밤 불장난, 욕구풀이용 정부라면 모를까 그분의 정식 부인이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다.
그러니까.
지금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족한다.
한서진이 애써 망상을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한다.
타닥타닥, 타다다다다닥.
그녀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작전 계획서를 작성한다.
마침내 작성 완료한 계획서를 그대로 국정원으로 보낸다.
‘오늘 할 일도 여기서 마무리군.’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거다.
진짜 작전이 시작될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체력을 보충해둬야 한다.
나는 그분의 그림자.
언제, 어느 때건 그분이 원하는 모든 명령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동침 요구라도,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아, 너튜브 영상 업로드를 깜빡했군.’
나답지 않아.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속하게 영상을 편집해 13개의 국뽕 너튜브 채널에 업로드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K-한복! 프랑스 황녀가 일본 전통 축제에서 홀로 한복을 입은 이유는?! “한복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복장입니다.” 세계는 지금 K-컬쳐 열풍 중! 그 중심에는 K-영웅 김덕성이?!]업로드하자마자 빠르게 올라가는 조회수를 보는 한서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돈다.
*
다음 날 아침.
대통령을 만나기에 앞서, 나는 이사장과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어쨌거나 내 신분은 슈오우 영웅 학원의 생도.
장기 출타를 위해서는 학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학생회장 아리스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절차가 살짝 복잡해진다.
이사장을 통해 직권으로 출타를 승인받는 편이 일단은 더 낫다.
이사장실의 육중한 나무문 앞.
평소 종종 드나들던 공간이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낯설어 보인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노크한다.
“이사장님. 김덕성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꼬마야.”
세이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슈오우 학원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앞, 커다랗고 푹신하게 생긴 검은 중역 의자에 검은 고스로리 드레스를 입은 15세 외양의 미소녀, 요시자키 세이라가 앉아 있다.
항상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수행하는 리츠코는 무슨 일인지 옆에 없다.
“리츠코는 어디 갔습니까?”
“그건······.”
단순한 질문에 살짝 동요하는 세이라.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다.
“아, 아사쿠사의 토라야에 양갱 심부름을 보냈느니라.”
세이라의 말에 피식 올라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눌러담는다.
하여간, 누가 할머니 아니랄까 봐 양갱이랑 말차 조합에 사족을 못 쓰는 모습 봐라.
[세이라, 입맛은 여전하구만.]‘젊은 시절부터 저랬다고?’
[몰랐냐? 내가 일본에 양갱 종류가 그렇게 많이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는데.]젊은 시절부터 노인네 입맛이었던 건가.
“앉거라.”
세이라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권한다.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는다.
이 소파, 언제 앉아도 푹신한 느낌이 좋다.
스윽.
세이라가 내 옆에 다가오며 치명적인 척 웃는다.
솔직히 이 미친 세상에 웬만한 건 전부 적응된 나지만, 세이라의 주책은 아직 제대로 적응이 안 된다.
“그래, 꼬마야. 오늘은 이 몸한테 무슨 일로 독대를 청하였는고?”
세이라가 요염한 척 눈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특별히 기분이 좋다. 이 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 말해보거라.”
척.
세이라가 평평한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이고. 세이라 누님. 나이가 몇 살이신데 지금······.]흑태자마저 탄식을 터뜨릴 정도의 주책.
아침 메뉴가 식도를 타고 역류할 것 같은 느낌을 억누르면서 말한다.
“장기 출타 허락을 맡고 싶습니다. 기한은 넉넉잡아 이주일 정도로요.”
“그, 그건······.”
내 말을 들은 세이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세이라가 내 시선을 피한다.
“그건······.”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숙이는 세이라.
이 할매가 대체 왜 이래.
‘내 요구가 그렇게 들어주기 힘든 요구였냐?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주책이지. 주책.]흑태자가 답한다.
세이라 주책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긴 한데, 지금 왜 저렇게 렉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대는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지.
최선책이 안 되면 차선책이다.
차선책도 안 되면, 그냥 무단 출타고.
어차피 내가 그동안 쌓은 상점도 상당하니, 무단 출타를 해도 퇴학당할 염려는 없다.
국내 여론이야,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번 작전을 지지하고 있는 판국이니 악화 걱정 자체가 무의미한 판국이고.
굳이 이사장의 주책까지 받아줄 이유가 없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안 되는 겁니까? 그럼 사이온지 선배를 통해서······.”
“되, 된다! 물론, 되고말고. 안 될 리가 없지 않느냐?”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이라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는다.
“알겠습니다.”
“출타 이유······. 아니 됐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구나. 그냥, 알고 싶지 않구나.”
세이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분간하기 어렵다.
짝.
그녀가 손뼉을 친다.
고개를 든 세이라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주책맞은 할망구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좋다. 그 건은 이 몸이 책임지고 처리할 터이니, 너무 염려치 말거라.”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내 인사를 받은 세이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돈다.
“감사 인사는 넣어두도록 하여라. 꼬마야. 이제 나가야 하지 않느냐?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들었다.”
세이라가 웃는다.
중요한 일정이라.
대통령 접견 및 공개 오찬이 중요한 일정이긴 하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꼬마야.”
세이라가 나를 부른다.
발걸음이 절로 멈춘다.
“너는······. 절대 죽지 말거라.”
“안 죽을 겁니다.”
나는 라노벨 주인공처럼 앞뒤 안 가리고 기합 하나만 믿고 사지로 무모하게 돌격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아니 부숴서라도 안전한지 확인한 뒤에 건너야 한다.
뭐든지 안전빵이 제일이니까.
“그렇다면 되었다.”
세이라가 눈을 감으며 조용히 웃는다.
[누님······.]흑태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린다.
탁.
이사장실 문을 닫고 나온 뒤, 빠른 걸음으로 학원 주차장으로 향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덕성님.”
태극기가 세워진 검은 롤스로이스 옆에 서 있는 한서진이 공손하게 뒷좌석 문을 열어준다.
그렇게 학원을 출발한 내가 도착한 장소는 도쿄 제국 호텔.
각국 정상들이 일본을 국빈 방문할 때 묵는 초일류 호텔답게 거대하고 화려하게 우뚝 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접견 및 공개 오찬회가 열리는 장소는 호텔의 그레이트 홀.
한서진의 안내를 받아 태극기가 걸려 있고 선글라스와 검은 양복, 태극기 뱃지를 착용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는 그레이트 홀 문앞에 선다.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기, 김덕성님?! 토, 통과입니다!”
슈오우 학원 생도 수첩을 보자마자 포커 페이스가 곧바로 깨지는 경호원들.
“마,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어, 어서 드십시오! VIP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겉보기에는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처럼 듬직하게 생긴 경호원들이 아이돌을 만난 소녀 팬처럼 국뽕에 젖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더듬는 광경이란.
다시는 하기 싫은 경험이었다.
덜커덕.
그레이트 홀의 문이 열린 순간.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나를 뒤덮는다.
[대한민국의 자랑! 김덕성 생도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울음기까지 묻어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요란하게 울린다.
그와 함께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하나같이 방금 만난 경호원과 같은, 광기에 가까운 국뽕에 젖은 초롱초롱한 눈빛.
군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국뽕’이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심리적 압박감이 내 전신을 짓누른다.
‘부담스러워 죽겠군.’
오랜만에 속이 쓰리다.
라노벨 리액션과는 다른 방향으로 좀 견디기 힘들다.
얼른 한서진에게 물어서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아야지, 하고 생각하던 그때.
저 멀리, 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양복 차림의 중년인 얼굴이 보인다.
뉴스와 국뽕 너튜브에서 자주 보던 익숙한 얼굴.
[파트너 저 사람이······. 엥?]대한민국 대통령.
강명현이다.
앉은 자리에서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강 대통령의 모습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아니 왜 울고 난리야, 라고 생각하던 그때.
눈물을 흘리던 강 대통령의 고개가 스르르 떨어진다.
“대통령님께서 혼절하셨다!”
“의료진! 의료진을 투입해라!”
아니.
또 왜 기절하는데?
얼굴에 금칠도 적당히 해야지
탁.
이사장실 문이 닫힌다.
썰렁할 정도로 넓은 집무실 내부에는 세이라만이 홀로 남겨져 있다.
마지막까지 애써 웃던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세이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진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가버렸구나.”
올리비아의 약혼식 소식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을 뿐이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전부 알고 있는 상황.
파이브 크라운즈의 유일한 생존자인 요시자키 세이라도 그 정도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꼬마가 장기출타를 한 이유는,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겠지.”
그의 주변에는 소녀가 많다.
그런데도 올리비아는 그에게 조금은 더 특별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