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39)
정말 일본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는 듯한 어이없는 상황극이었다.
그나저나 무도회라.
[무도회 하니까 옛날 생각 나는군. 거기서 아름다운 레이디들과 좋은 만남을 여러 차례 가졌지······.]흑태자가 묻지도 않은 본인의 여성 편력 이야기를 꺼낸다.
빙의 전에는 이런 무도회 따위랑은 아무런 연이 없던, 서민이었던 나다.
김덕성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 역시 이런 본격적인 무도회에는 안 나갔고.
그런데 이거 굳이 꼭 가야 하나?
안 가면 안 될까?
불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당신, 무도회에 입고 갈 예복은 있어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없는데, 애초에 갈······.”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을 에스코트할 의무가 있는 전속 시녀로서, 무도회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파리 시내로 당신의 예복을 직접 쇼핑하러 가는 수밖에는요.”
올리비아가 내 말허리를 자르면서 이쪽을 응시한다.
“갈 거죠? 쇼핑.”
도끼눈을 뜬 그녀의 질문.
“······어. 가야지.”
올리비아의 묘한 박력에 압도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염병.
졸지에 파리로 예복 쇼핑을 나가게 생겼다.
빌어먹을 무도회 같으니.
캣파이트(물리)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파리, 아니 프랑스를 상징하는 번화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꼽히는 이곳 풍경은 도쿄나 서울의 현대적인 풍경과는 달리 유럽 하면 흔히 생각나는 양식의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 멀리 에펠탑과 함께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투알 개선문도 보인다.
개선문이 있는 광장 이름은 원래 세상의 프랑스와 다르게 나폴레옹 광장.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 최고의 번화가인만큼, 원래는 사람으로 북적였어야 했지만 지금은 나와 올리비아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벨라를 포함한 프랑스 근위대 영웅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지켜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들어오게 감시하고 있기 때문.
“자, 여기예요. 따라와요.”
신난 올리비아가 내 손목을 잡아 이끈다.
올리비아는 깨어난 직후, 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곧바로 퇴원했다.
그리고는 내 무도회 예복을 맞춰야 한다며 끌고 온 곳이 여기, 샹젤리제 거리다.
딱 봐도 나 명품 양복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 화려한 건물 안으로 올리비아에게 끌려 들어간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김 생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장을 깔끔하게 맞춰 입은 점원이 정중한 태도로 나와 올리비아를 맞이한다.
잔뜩 긴장한 태도.
“곧 있을 황실 주최 무도회에 이 바보의 예복을 맞추러 왔어요. 일단 샘플 좀 보여주시겠어요?”
“예복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신사분, 이쪽으로 오시지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점원에게 끌려가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원단으로 만들어진 검은 정장.
탈의실 안에 비치된 전신 거울로 내 모습을 본다.
[오, 파트너. 옷맵시는 제법 괜찮은데? 몸이 좋아서 그런가? 얼굴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뭐, 이 정도면 패션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원래 옷걸이만 좋으면 다 괜찮은 법이니까.]내 얼굴의 개연성이 부족한 건 이미 자각하고 있는 상태다.
뭐, 그래도 아주 이상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평범하다는 그럭저럭 생겼다는 의미와 동의어니까.
내가 빙의한 ‘김덕성’도 딱 그 정도 수준.
양아치 같은 인상이고, 명백한 미남인 주인공 유지와 비교하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익숙해서 그런지 약간 괜찮아 보이긴 한다.
아닌가? 사실 별로인데 자꾸 보다 보니까 정든 건가?
아무튼 몸은 끝내주게 좋으니까 됐다.
“다 입었어.”
탈의실 밖을 나서자, 올리비아가 푹신한 고급 의자에 앉아 있다.
라노벨보다는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구도.
보통 재벌 남주인공이 가난한 여주인공을 고급 명품 가게에 데려가서 옷, 신발, 가방 등을 사줄 때 나오는 장면인데, 이걸 직접 체험하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그녀가 예리한 눈길로 내 여기저기를 뜯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흐음······. 마음에 안 들어요. 매니저님. 다른 의상으로 바꿔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대체 왜?
올리비아의 말 한마디에 나는 졸지에 다시 탈의실로 끌려가 입었던 옷을 벗고 올리비아가 고른 다른 옷을 입어야 했다.
똑같은 검은 정장.
디자인이 약간 달라지기는 했는데, 내 눈에는 아까 입었던 정장이랑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드네요. 다른 옷 없나요?”
또다시 퇴짜를 놓는 올리비아.
그 후로도 올리비아가 정장에 만족하는 일은 없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 비슷한 정장을 갈아입으니 살짝 지치려고 한다.
역시 여자랑 하는 쇼핑 같은 건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야, 흑태자. 네 눈으로 봐도 이상하냐?’
[······.]침묵을 지키는 흑태자.
그래. 네가 아끼는 여동생이라 이거지.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여섯 번째 정장을 입고 터덜터덜 걸어 나간다.
“흠······.”
눈을 가늘게 뜨는 올리비아.
“황녀님, 마음에 드십니까?”
그 옆에서 말하는 매니저.
내 자유의사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광경.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정도면 뭐······. 나쁘지 않네요. 아슬아슬하게 합격점 드리죠. 매니저님.”
뾰루퉁한 표정으로 말하는 올리비아.
누가 츤데레 아니랄까 봐, 마음에 든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 돌려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영광입니다. 황녀님!”
눈물을 줄줄 흘리는 매니저.
설정집의 올리비아 프로필에서 프랑스 최고의 기재에다 보나파르트 황실의 혈통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국민 아이돌, 국민 영웅 취급을 받는다는 내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프랑스가 거의 안 나오다 보니, 거의 있으나 마나한 뒷설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올리비아가 황족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저자세인 매니저의 태도를 보니, 새삼스럽게 설정집 내용이 다시 떠오른다.
[역시 내 사랑스러운 동생 올리비아야. 어딜 가도 다들 공주님처럼 모시지. 아니 진짜 공주님인가?]머릿속에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 흑태자.
프랑스만 해도 이 정도인데, 국뽕이 절정인 지금의 한국에 내가 간다면?
갑자기 몸에 오한이 든다.
역시 한국에는 졸업할 때까지 안 가는 게 좋겠다.
“이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올리비아가 우아한 태도로 말하자 허리를 구십도로 꺾는 매장 매니저.
평소에는 푼수 츤데레처럼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그녀가 프랑스의 황녀라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현대까지 제정을 유지하는 프랑스의 황녀라니.
프랑스 출신 공주기사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한 작가 놈의 얄팍한 편의주의적 설정이 기가 차기는 하지만, 아무튼.
올리비아와 내 눈이 마주친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흥.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서 볼을 부풀린다.
“뭐, 그, 그 정도면 무도회에서 거지 꼴은 면하겠네요. 저한테 감사하라구요. 아시겠나요? 당신?”
척.
그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알았으니까 이거 얼마야?”
입고 있는 명품 정장 셔츠를 손으로 당겨보면서 말한다.
예복이라고 하길래 불편할 줄 알았더니 고급 이름값은 하는 모양인지 제법 편하다.
내 말에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가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제가 이미 결제했어요.”
이미 결제했다고?
이걸?
인터넷을 켜서 이 매장의 양복 가격을 찾아본다.
제일 싼 게, 뭐야. 0이 얼마나 붙어 있는 거야?
아직 서민의 금전 감각이 남아 있는 나로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이다.
정장 한 벌에 이 정도 돈을 태운다고?
“차, 착각하지 마세요! 따, 딱히 당신이 좋아서 사준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 정도야 프랑스의 황녀인 저한테는 푼돈! 다, 당신이 불쌍해서 적선해준 것일 뿐이니까요! 제 사심 같은 건 요만큼도 없다구요! 아시겠나요?!”
올리비아가 얼굴을 붉힌 채 횡설수설 츤데레 멘트를 늘어놓는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저렇게 대사치면 안 피곤한가 모르겠다.
아무튼,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그래, 고맙다. 잘 쓸게.”
“흥. 바보. 멍청이. 당연한 거에 감사하지 말라고요. 하나도 안 기쁘니까요. 흥!”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 볼을 부풀린다.
덥석.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이끈다.
“이제 시계랑 구두도 사러 가아죠? 어서 안 따라오고 뭐 해요?!”
질질질.
정장점에서 나온 나는 다른 가게에서 시계와 구두까지 풀 세트로 사고 나서야 겨우 쇼핑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를 빠져나온 내가 올리비아와 함께 들른 곳은 마르스 광장.
파리의 랜드마크이자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에펠탑이 보이는 바로 그 장소였다.
에펠탑이 보이는 유명한 포토 스팟이기에 원래는 관광객으로 넘쳐나야 정상인 마르스 광장도 역시 샹젤리제 거리와 마찬가지로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봤을 때는 여기 사람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비정상적으로 평화로운,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트너를 위해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 노력한 결과야. 감사하게 여기라고.]머릿속에서 흑태자의 팔불출 대사가 들린다.
쟤는 저런 대사 치면 부끄럽지도 않나.
하긴 안 그러면 팔불출이 아니긴 하지.
“여기요! 여기 와서 같이 사진 찍어요. 프랑스에 왔으면 우리 나라의 자랑, 에펠탑 앞 사진 정도는 남겨야죠! 흥, 따, 딱히 당신이랑 사진 찍고 싶어서 하는 얘기는 아니니까 차, 착각하지 마시고요!!”
올리비아가 기승전츤데레급발진을 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에펠탑이 잘 보이는 포토스팟에 선다.
올리비아가 셀카봉을 꺼내 스마트폰을 끼우며 브이 포즈를 취한다.
“사진이 안 나오잖아요. 조금 더 여, 옆으로 부, 붙으라고요!!”
그녀가 볼을 부풀리면서 나를 확 잡아당긴다.
졸지에 올리비아와 착 달라붙게 된 나.
올리비아의 체온과 향기가 훅 들어온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얼굴이 뜨거워진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사진 찍는 거예요. 김치.”
치즈가 아니라 김치?
아니 프랑스인이 김치는 또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당신! 김치 안 하고 뭐 해요?”
올리비아가 나를 돌아보며 입술을 삐죽인다.
[내 동생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뭐 하냐. 파트너.]팔불출 흑태자도 머릿속에서 재촉한다.
이 분위기에서 거절하기도 뭐하고.
어쩔 수 없다.
“김치.”
어색하게 웃는다.
찰칵.
셔터음이 들리면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나와 올리비아, 둘이 붙어서 찍은 사진이 화면에 떠오른다.
“좋아요! 이제······.”
올리비아가 옅게 웃으며 뭔가 말하려던 그때.
콰광!
광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폭음이 터진다.
“뭐야?”
얼굴이 굳는다.
“무슨 일 있냐? 아니면 테러?”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묻는다.
윌리엄 건이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이미 원작 정사와는 너무 많이 달라진 상황.
리그의 추가 습격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내 표정이 굳는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허둥지둥 손을 휘젓는다.
“아, 아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다, 당신이 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젓는다.
흑태자도 침묵을 지킨다.
저러니까 더 수상한데.
대체 무슨 일이지?
콰앙!
다시 폭음이 울린다.
*
프랑스 파리 시내.
마르스 광장.
올리비아의 특명을 받은 벨라가 지휘권을 가지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지금 올리비아와 김덕성의 호위 및 주변 구역 통제를 맡은 프랑스 근위대 영웅과 슈오우 학원 요리부 생도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막으세요! 이곳만큼은 절대로 사수해야 합니다! 황녀님과 주인님의 주인님의 데이트를 망칠 수는 없습니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라.
벨라의 지시를 받은 근위대 영웅들이 전투 모드를 전개한 채 마력을 폭발시킨다.
그녀의 손에 들린 사복검이 춤춘다.
“황녀님만 주인님과 데이트하다니 그런 거 치사해! 에리링도! 에리링도 주인님이랑 데이트 할 거야!”
촤르르륵!니시자와 에리가 전투모드로 전환한 채 사슬낫을 던져 벨라의 사복검을 막아낸다.
콰앙!
사복검의 칼날과 사슬낫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폭음이 터진다.
에리의 옆으로 초록빛 바람으로 전신을 감싼 마코토가 일본도를 뽑아들며 돌진한다.
“나도! 나도 주군의 곁에 있을 거야!”
깡!
마코토의 바람이 깃든 일본도가 근위대 영웅의 롱소드를 쳐낸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마코토 옆으로 일본도를 든 린이 조용히 선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자 근처가 삽시간에 새하얗게 얼어붙는다.
한여름의 파리 한복판에 때아닌 겨울이 찾아온다.
“김덕성. 이번만큼은, 나도 결코 지지 않겠다!”
린이 결의를 다지며 일본도를 휘두르자, 칼날에서 일어난 삭풍이 주변을 전부 얼린다.
“끄아아아아악!”
삭풍에 난도질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근위대 영웅들 사이로 마녀 복장을 한 보라머리 미소녀가 허공에 떠오른다.
“기사공주만 편애하는 후배 군은······. 나쁜 남자야.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 없으니까······.”
별빛의 마녀, 호시노 카스미가 영창을 읊자 보랏빛 마력탄이 허공에서 유성우처럼 빗발친다.
“스타폴!”
쾅! 쾅! 쾅! 쾅!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력탄의 유성우가 주변을 초토화하고, 마침내 근위대가 형성한 포위망이 뚫린 그때.
츠팟!
한 줄기 은빛 번개가 지휘관인 벨라 앞에 내려꽂힌다.
그 광경을 본 벨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실버 퀸······. 당신까지 대체 왜······.”
벨라의 앞에 번개와 함께 강림한 실버 퀸.
사이온지 아리스가 장창을 든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불순 이성 교제는······.”
파츠츠츠츠츠!
그녀의 전신에 은빛 번개가 감돈다.
아리스의 눈에 은색 안광이 번쩍이고, 그녀의 머리칼이 정전기를 받아 사방팔방 비산하며 떠오른다.
아리스의 손에 들린 창날 끝에 막대한 양의 번개가 응집된 구체가 생성된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콰앙!
은빛 섬광이 벨라를 직격한다.
지축이 흔들리고, 충격파와 후폭풍이 주변을 휩쓸며 모든 걸 파괴한다.
털썩.
아리스의 공격을 받은 벨라가 바닥에 쓰러진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임무는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올리비아.
연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그녀가 이중삼중으로 설치한 바리케이트가 전부 뚫리는 순간이었다.
진짜 싸움이 아닌 제압할 의도로 벌어진 전투였기에 사상자는 0명이었지만, 다섯 미소녀의 합공으로 인해 포위망을 이루는 전력은 이미 전부 무력화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