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57)
내가 테이블을 치면서 말한다.
[오해였냐?]놀라는 흑태자.
아니 당신이 놀라면 어떡해?
“읏······.”
“하와와와와······.”
입술을 깨무는 아리스와 입에 손을 가져다대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에반젤린.
“소, 소녀가 실수해버렸군요. 죄송하옵니다. 김덕성 님······.”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에반젤린.
지금 보니까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다.
누가 라노벨 캐릭터 아니랄까 봐, 뭐만 하면 오버 액션이다.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워.
“뭐 저도 오랜만에 매운 거 먹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러니 미안할 건 없고 다음부터 그러지 마십쇼.”
“그래도 괜찮으셨다니 다행이옵니다. 알겠사옵니다! 소녀, 좀 더 한국에 대해 정확하게 공부하겠사옵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주먹을 불끈 쥐는 에반젤린.
더 공부할 필요 없는데.
저러니까 괜히 더 불안해진다.
다음에는 너튜브에서 김치 담그기 하는 거 아닌가?
“흠흠. 저도 이번 기회에 한국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헛기침하며 이쪽을 힐끗힐끗 보는 아리스.
아니 더 알아볼 필요 없는데.
내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사이온지 양!”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민망할 정도로 출렁대는 분홍색 비키니를 착용한 미녀, 마유즈미 마유가 거기 있었다.
선캡을 착용한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여기 있었군요! 아 스튜어트 양도 있었네요!”
착.
웃으면서 손뼉을 친 마유즈미 선생이 허리춤에 찬 확성기를 꺼내서 입에 대고 말한다.
“이제 곧 조 편성 시간이에요! 사이온지 양, 스튜어트 양, 김 군, 여기 있는 생도들 모두 임시 교사 앞 운동장에 집합하세요!”
자유 시간은 끝났다.
이제 조 편성의 시간이었다.
*
여름 학교.
임시 교사 앞 운동장.
해변 근처,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설치된 임시 교사 앞 운동장에는 수영복 차림의 생도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슈오우 학원은 물론, 영국 세인트 조지 학원 생도들까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룬 운동장.
그 가운데 나는 있었다.
우리반인 A반 생도들과 함께 줄을 선 상황.
“그럼, 조편성 결과 발표할게요!”
단상 위에 올라선 마유즈미 선생이 확성기를 통해 소리친다.
“드디어 조 편성이야! 에리링이랑 주인님은 당연히 같은 조겠지?”
“무슨 소리인가요? 니시자와 양. 그의 옆자리는 당연히 전속 시녀인 이 고귀한 프랑스의 공주,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차지가 아니겠어요?”
“나야말로, 이번에는 반드시······. 김덕성의 옆에 있겠다.”
“나도······. 이번에는 지지않을 거야. 무조건 주군과 같은 조가 될 거야.”
같은 반인 에리, 올리비아, 린, 마코토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슈오우 학원에서 두 명, 세인트 조지 학원에서 두 명.
총 4인 1조로 편성되는 여름 학교 실습조는 중요하다.
앞으로 남은 여름 학교 동안 걔네랑 같이 계속 붙어 다니면서 침식지 탐사를 포함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트릭시, 아니 베아트리체가 유지 쪽에 붙으면 좋을 텐데.
솔직히 지금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내가 하고 유지 놈이 꿀만 빨았잖아?
한 번 쯤은 내 짐을 대신 져줄 때가 됐다.
왜냐하면 놈은 주인공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4조, 에반젤린 스튜어트, 트릭시 스미스, 시노자키 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베아트리체의 가명이 호명됐다.
에반젤린에 베아트리체라니.
딱 봐도 앞길이 불꽃길 같은 조다.
나는 절대 저기 편성 안 되어야지.
제발 유지, 네가 가라. 네가 주인공이잖아.
이번에는 나도 꽃길 한번 걸어 보자. 불꽃길 말고.
내가 그렇게 속으로 기도메타를 돌리고 있던 그때.
“······김덕성.”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뭐?
내가? 이번에도 또?
에반젤린이랑 베아트리체를 맡아야 한다고?
속이 쓰려온다.
위장약 드립이 왜 나온지 이제야 알겠다.
검은 하렘왕(삽화 有)
조 편성이 발표된 순간.
내 앞에 선 린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든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군.”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린.
“쳇······. 젖소한테 지다니······.”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전속 시녀인 제가······.”
“히잉······.”
그와 대조적으로 혀를 차는 에리와 입술을 삐죽이는 올리비아, 울상을 짓는 마코토까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속은 이미 뒤집어진 상태이다.
에반젤린은 원래 유지랑 같은 조였는데, 대체 왜 나랑 같은 조가 됐단 말인가?
거기에 성녀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다녀오려고 했던 침식지 탐사가 순식간에 대학교 조별과제 뺨치는 헬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게 윌리엄을 프랑스에서 미리 처치한 나비효과인가?
염병할 나비효과 같으니.
하긴, 내 운이 좋을 리 없지.
사이다패스 기연독식 가능한 웹소설이 아니라 엿 같은 고구마 농장에 상냥한 라노벨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나는 쭉 운이 없었다.
게다가 원작은 이미 비틀렸다.
침식지 탐사 동안 뉴 월드 리그가 습격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쩌면 성녀를 노리고 다른 빌런이 난입할 수도 있다.
성녀 베아트리체는 원작의 엔딩과 깊게 얽혀있는 핵심 캐릭터이니만큼, 트리 위키였다면 스포일러 주의가 몇 번이나 붙어도 모자랄 정도로 중요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만반의 준비를 해가야겠어.’
[언제 어디서나 최악을 대비하는 모습, 아주 훌륭해. 파트너.]흑태자의 칭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고 있던 그때.
“조 편성 끝났어요! 그럼 지금부터 각자 조별 활동 시간을 가지도록 할게요!”
조별 활동을 선언하는 마유즈미 선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지시를 따라 웅성대며 각자 조원을 찾아가는 생도들.
운동장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진다.
“우리도 가자. 김덕성.”
덥석.
린이 내 손목을 잡고 이끈다.
“훗훗훗.”
린이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얘는 갑자기 왜 또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거야?
어쨌건 이미 엎질러진 물.
조별 편성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원작과는 다른 최대 변수인 성녀가 어쨌건 우리 조에 들어왔으니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는 셈이다.
변수를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여기이옵니다. 김덕성 님!”
저 멀리 에반젤린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 옆에는 안대를 낀 짙은 금발 미소녀, 성녀 베아트리체가 있다.
노출도 낮은 레이스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성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상태.
하긴 원작에서도 인간이니 뭐니 헛소리하는 중2병 여왕님 계열 히로인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그런 그녀가 ‘하등한 인간들의 유희’에 어울린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후후. 처음 뵙겠사와요. 시노자키 양, 저는 세인트 조지 학원의 학생회장을 맡은 3학년, 에반젤린 스튜어트라고 하여요.”
손을 흔들면서 아가씨 웃음을 흘리는 에반젤린.
그녀의 인사를 받은 린의 시선이 베아트리체 쪽으로 향한다.
“만나서 반갑군. 스튜어트 양. 이쪽은······?”
“스미스 양, 자기소개는 기본 에티켓이어요.”
툭툭.
에반젤린이 웃는 얼굴로 성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다.
그녀의 스킨십에 성녀가 얼굴을 찌푸린다.
“······열등종인 인간 따위, 여의 진명을 발음할 자격조차 없느니라. 원래라면 감히 여를 쳐다볼 자격조차 없는 하등종이거늘, 원래대로라면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과도 같은 여의 존안을 아무 대가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거라.”
팔짱을 낀 채 볼을 부풀리는 성녀.
그녀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해진다.
“그, 그렇군······.”
당황하는 린의 표정.
[파트너, 쟤 어디 아픈 거 아냐?]흑태자까지 어이없어할 정도.
웬만한 것들은 전부 다 받아주는 상냥한 세상에서 이 정도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아, 아하하하하하하하······. 시노자키 양, 김덕성 님. 이해해주셔요. 스미스 양은 아직 전학 온지 얼마 안 돼서, 일본의 예절에 익숙하지 못하답니다.”
옆에 있던 에반젤린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베아트리체를 커버친다.
“흥. 인간종의 예절 따위, 성녀인 여가 지켜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음이라. 인간계의 법도는 여한테 무의미하다. 열등종의 쓸모란 여의 발아래 복종해서 구두 끝을 핥는 것 정도일지니.”
“······여기 이 안대를 보시다시피 이 아이가 중2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답니다. 소녀가 파악하기로는 본인이 성녀에다 교단의 공주라는 설정 같사와요. 그러니 부디 이해를······.”
중2병.
뭐 그런 설정으로 가기로 한 건가.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중2병의 상징인 안대를 차놓고 대놓고 본인 입으로 성녀라고 정체를 밝혀도 말투가 저따위면 그걸 누가 믿냐고.
자연스러운 방심 유도라.
어쩌면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에서는 오히려 저쪽이 더 고단수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하등한 인간종이 성녀인 여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의 신하가 곤란해하니 이번만큼은 특별히 어울려주도록 하지.”
성녀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린을 향한다.
“······트릭시 스미스다. 너희한테 특별히 여의 이름 중 하나를 가르쳐주는 축복을 친히 내릴 터이니 영광으로 알도록. 본교였다면 여한테 오체투지하고도 남았을 일이니 말이다.”
시발.
이건 또 다른 방향으로 버티기가 힘드네.
내가 졌다.
이제는 올리비아뿐만 아니라 린, 에리, 마코토까지 전부 선녀로 보인다.
그동안 빌어먹을 라노벨 리액션이라고 까댔던 다른 애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잠깐, 성녀에 본교라고?]흑태자가 머릿속에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아직 아니야. 확실히 알게 되면 말해줄게. 파트너. 하지만 어쩌면 단순한 중2병 환자가 아닐지도 모르겠어.]그가 싱겁게 말을 끝낸다.
하긴 흑태자 정도 영웅이라면 교단과 리그에 대한 고급 정보도 알고 있겠지.
이게 라노벨이었다면 의미심장한 복선 역할을 하는 대사였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트릭시의 정체를 알고 있다.
‘싱겁기는.’
그렇다고 빙의자인 걸 티낼 수도 없으니.
적절히 맞장구쳐준다.
“아, 그, 그래. 반갑군. 스미스 양.”
당황하면서도 그걸 또 받아주는 린.
현실이었다면 무슨 헛소리하냐고 무수한 디스 세례가 쏟아져도 모자랄 판국에 저걸 어떻게든 이해해주고 받아주다니.
쓸데없이 상냥한 세상이다.
“인간종의 예의 중에는 악수라는 게 있다고 들었느니라. 금일 여의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너희 하등한 인간종한테 악수의 영광을 허용하겠노라.”
스륵.
자연스럽게 내미는 오른손.
딱 봐도 사이코메트리를 걸려는 수작이다.
[파트너, 잠깐······. 아니야. 내가 있으니 괜찮겠지. 악수해 봐. 어쩌면 아까 추측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흑태자가 뭐라고 말한다.
뭐 안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사이코메트리 방어 수단을 갖춰놓은 상태니.
흑태자가 알아서 다 할 거다.
“예, 뭐. 좋습니다.”
덥석.
성녀가 내민 손을 잡는다.
기프트 실컷 한번 써보라고 해라.
어차피 아무것도 못 읽어낼 테니까.
*
악수를 권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
베아트리체는 내심 긴장했다.
김덕성.
그가 자신이 던진 미끼에 안 걸려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껏 인간계까지 행차한 게 무의미하게 되어버리지 않겠느냐.’
물론 책으로만 바깥세상을 접했던 베아트리체에게 있어, 실제 바깥세상은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그녀 옆에 있는 세인트 조지 학원의 학생회장, 에반젤린 스튜어트.
그녀는 베아트리체가 트릭시라는 이름으로 위장 전학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학원 적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보조해왔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알고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사이코메트리까지 사용해봤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전학생에 대한 순수한 호의와 상냥함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아까 에반젤린의 말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도 그것 때문.
광신과 음모가 가득한 교단의 냉혹한 환경에서 평생을 보낸 그녀에게 있어서, 에반젤린의 순수한 호의는 낯설면서 좋았다.
‘인간계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베아트리체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한가하게 인간계의 일상을 즐길 때가 아니다.
김덕성.
그가 자신의 조커가 될 자질이 있는지 판단해야 할 때이다.
덥석.
베아트리체가 김덕성과 손을 맞잡은 순간.
그녀가 기프트를 사용한다.
보이지 않는 힘이 악수라는 접촉을 통해 김덕성의 몸에 주입된 순간.
베아트리체의 시야에 영상이 떠오른다.
능력이 통했다는 증거.
‘자 김덕성, 네놈이 어떤 인간인지 여한테 낱낱이 고백할 시간이도다.’
베아트리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순간.
치직, 치지직.
고장난 TV처럼, 시야 속 영상에서 아무 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굳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이코메트리는 만능이 아니다.
정신력이 강하면 떨쳐낼 수 있다.
리그의 수장인 메사이어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기프트 자체를 무시하는 판정이기 때문에 영상이 떠오르지조차 않는다.
눈앞의 영상은 기프트가 성공적으로 적용됐을 때, 대상의 기억을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타나는 환상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영상은 뜨지만, 기억이 읽히지 않는다.
‘능력은 통하는데 기억이 안 읽히는 상대라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베아트리체는 당황했다.
기프트를 파훼하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사물과 인간은 사이코메트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령 막 만들어진 공산품이라 하더라도, 생산될 때의 기록은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무저갱처럼 새카만 어둠만 나올 수는 없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 김덕성······!’
메사이어가 기프트를 무시해버린 이후 처음이다.
그것도 능력에 면역인 메사이어와는 다르게, 능력이 통했는데도 기억을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공포스럽다.
성녀가 당황하며 기프트를 거둬들이려던 그때.
치직, 치치직.
영상에 노이즈가 끼며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검은 제복을 입은 20대 후반의 미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