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59)
아버지의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기대를 어쩔 수 없이 배반해야 한다는 사실에 린의 가슴이 살짝 아파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저는 시노자키 린이 아닌, 김 린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린은 각오를 다지면서, 이치로가 건넨 지도책을 풍만한 가슴으로 꼬옥 안았다.
쪼르르르······.
딱!
미팅 룸 바깥 일본식 정원에 설치된 시시오도시의 맑은 소리가 부녀의 귓전을 울린다.
고마워요 행보관
여름 학교 기간 동안 생도들이 머무르는 임시 숙소는 해변 호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파도치는 해변이 숙소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낭만적인 호텔이었다.
물론 내일이면 침식지 탐사를 떠나야 하지만, 어쨌건 원래 세상이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호화로운 호텔은 맞았다.
‘역시 바캉스는 호캉스가 최고지.’
빙의 전에는 그림의 떡이었던 호캉스를 이쪽 세상에서 하게 되다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파트너. 자꾸 이런 데만 쳐박혀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좀 활동적으로 사는 건 어때?]활동적은 무슨.
나는 빙의 전부터 집돌이었다.
집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흑태자의 말에 딱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모처럼 해변 호텔에 왔는데 그냥 방에만 있을 수는 없다.
드르륵.
호텔 문을 나선다.
[오, 파트너. 이 흑태자 님의 조언을 드디어 듣는구만. 그래.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거야.]자다가 떡이 생긴다고?
‘한국 속담을 네가 왜 알고 있냐? 그것도 설마 인터넷에서 봤냐?’
[물론이지. 파트너. 프랑스에 가기 전, 한서진이라는 아가씨랑 한국 대통령이랑 마주한 이후 파트너의 조국에 대해서 알 필요성을 느껴서 말이야.]한서진 때문인가.
하긴, 요즘 국뽕이 좀 미쳐 날뛰고 있긴 하다.
국뽕 너튜브와 메이저 언론 기사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
기사만 보면 여기가 북한인지 남한인지 모르겠다.
흑태자 입장에서는 관심 가질 만한 일인 건 맞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면 나비 효과일 터.
대답 없이 묵묵히 호텔 복도를 걷는다.
[그런데 파트너, 어디 가는 거야?]흑태자가 내게 묻는다.
목적지 정도야 못 알려줄 것도 없다.
‘호텔 야외 수영장. 지금 시간이면 사람도 별로 없겠지.’
한밤 중, 해변이 보이는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즐기는 수영.
라노벨이 아닌, 한국 드라마에서 사치를 즐길 때 자주 나오는 클리셰.
모처럼 휴양지 해변 호텔에 왔으니 한 번쯤 들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바다보다는 계곡이, 계곡보다는 수영장이 나는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텔 야외 수영장에 도착한 나는, 미리 챙겨온 수영복과 비치 후드 집업으로 환복한 뒤에 수영장으로 나왔다.
별이 반짝이는 검푸른 밤하늘.
푸른 수영장에 찰랑이는 투명한 물.
저 멀리 파도치는 밤바다가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역시 이거지.’
[파트너는 이상한 데 로망이 있는 것 같아. 밤에 이렇게 수영할 거면 아까 낮에 해수욕은 왜 한 거냐?]‘시끄러워. 해수욕이랑 수영장이랑 엄연히 다르거든?’
흑태자의 말에 반발하면서 휘파람을 불며 수영장에 뛰어들려던 그때.
“히이이이익!”
저 멀리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또, 또 너냐! 또!”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안대 미녀, 베아트리체가 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일대일이라는 소리.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좋은 기회다.
운이 좋군.
“뭘 그렇게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그래?”
한 발짝.
성녀를 향해 다가간다.
“오지마! 오, 오지 말란 말이다!”
두려워하며 손을 내젓는 그녀.
“트릭시 스미스, 아니 베아트리체.”
“히끅!”
다시 한 발짝.
성녀가 딸꾹질한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별로 많지 않아. 공통의 적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협력하자는 거지. 네가 나한테 접근한 것도 그런 목적 아니야?”
다시 한 발짝.
그녀가 또 뒤로 물러난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조금 더 물러나면 수영장인데.
“아니면 그 성녀 하등한 인간 어쩌고저쩌고하는거 다 패션 중2병이었냐? 기세 좋게 말하더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성녀의 중2병 말투는 사실 본인의 여린 속내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진짜 그 나이대 학생들처럼, 교단에서 고립된 자신의 처지에서 애써 도피하기 위해 그럴싸한 설정을 덧붙이다 그만 심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패션 중2병이 맞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낀 지금, 내 앞에서 저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거다.
원작에서도 메사이어와 주인공에게 보여줬던 모습.
내가 정확히 노리던 순간이다.
“마, 말하지 마라······. 마, 말라고 했지 않느냐? 서, 성녀의 명을 뭘로 듣는 것이냐! 하, 하등한 인간 주제에······?”
“뭐? 하등? 인간?”
한 발짝.
이렇게 약간만 자극해도.
“히익! 죄송해요오오오오! 죄송해요오오오오!!”
겉으로는 고금제일 중2병이지만 사실 안쪽은 삼류에 불과한 그녀의 본성이 드러난다.
“잘모탰······. 꺄아아아아아악!”
그녀가 뒷걸음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수영장으로 떨어진다.
풍덩!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물에 빠진 성녀.
첨벙! 첨벙!
그녀가 물속에서 허우적댄다.
“끄아아아악! 꼬르르르르륵! 사, 살려줘요오오오오!!”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성녀.
왜 수영을 안 하지?
쟤 맥주병이었나?
설정집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는 안 적혀 있어서 모르겠다.
“끄르르르륵······.”
성녀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뭐야, 진짜 맥주병이었어?
[파트너, 아무래도 성녀 쟤 수영 못 하는 거 같은데? 이대로 방치할 거야? 신사라면 숙녀의 위기를 보고 지나치면 안······.]흑태자의 잔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물에 뛰어든다.
수영장 바닥으로 꼬르륵 가라앉으며 정신을 잃은 성녀의 모습이 보인다.
헤엄쳐서 그녀를 잡아 끌고 겨우 물밖으로 나온다.
“푸하.”
수영장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는 물을 뱉어낸 뒤, 성녀를 수영장 바닥에 똑바로 눕힌다.
165cm 정도의 아담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부푼 가슴, 장미 안대가 인상적인, 눈을 감고 있는 진한 금발의 미소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흑태자가 말한다.
뭐? 인공호흡?
세계관 설정상으로도 손꼽힐 정도의 초인이 맥주병인 것도 모자라 인공호흡이라고?
누가 라노벨 세상 아니랄까 봐, 샤워부스에 이어 또 개연성 없는 서비스신 이벤트 발생이다.
이게 라노벨이었다면, 인공호흡을 가장한 히로인과의 키스신이 되었겠지.
키스하다가 일어난 히로인이 꺄악하고 얼굴을 붉히고 소리치면서 주인공의 가슴을 두드리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주인공은 덤이고.
아, 라노벨 세상 맞구나.
개연성 없는 염병할 세상 같으니.
하지만 나는 라노벨 주인공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강한 친구 대한민국 육군의 예비역 병장.
라노벨 주인공처럼 흉부 압박 없이 키스만 갈겨대는 유사 인공호흡이 아니라, 상병 진급 누락 때문에 행보관에게 기나긴 모멸과 핍박을 받아가며 몸으로 체득한 대한민국 육군 FM CPR을 성녀에게 맛보여줄 시간이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툭툭툭.
조건반사적으로 성녀의 어깨를 가볍게 여러 번 두드린다.
반응이 없는 성녀.
손가락을 코에 가져다 대서 호흡을 확인한다.
호흡이 없는 상태.
곧바로 수영장 한쪽 면에 있는 AED를 꺼내 상자를 연다.
성녀의 수영복 상의를 벗긴다.
한 쌍의 풍만한 언덕이 달빛 아래 드러난다.
[어우, 파트너. 나는 눈 감고 있을게······. 숙녀에게 실례니까······.]AED 패드 두 개를 하나는 오른쪽 쇄골 아래, 다른 하나는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 붙이고 작동시킨다.
곧바로 흉부 압박을 실시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한국어로 숫자를 세면서, 늑골이 부러져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모든 체중을 실어 흉부가 꺼질 정도로 강하게 찍어누른다.
신성한 CPR에 맨가슴의 부드러운 감촉 따위는 사치다.
[환자에게서 떨어지세요]AED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흉부 압박하던 손을 뗀 뒤, 빨간색으로 깜빡이고 있는 AED의 제세동 버튼을 누른다.
[제세동 실시되었습니다.]안내 음성을 들으며 곧바로 다시 흉부 압박에 돌입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30회의 흉부압박을 끝낸 뒤에,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젖히고, 턱을 들어 기도를 확보한 뒤 곧바로 입술을 맞대고 인공호흡을 통해 그녀에게 숨을 두 번 불어넣는다.
[파트너······. 뭐야, 왜 이렇게 잘해?]잘하기는.
병사들 진급 누락 때문에 대령 진급에 방해될까 봐 빡친 대대장한테 내리갈굼 당해서 분노한 중대장과 행보관의 특별 지시로 한 달 동안 일과 이후 개인 정비도 전부 반납하고 애니랑 놀면서 구급법만 연마하면 잘할 수밖에 없다.
몸이 기억하게 되니까.
흑태자의 낯뜨거운 칭찬을 무시하고 다시 30회 흉부 압박과 2회 인공호흡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렇게 열 번 넘게 30회 흉부 압박을 끝내고, 인공호흡을 실시하기 위해 기도를 확보한 뒤 입술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으려던 그 순간.
번쩍.
성녀의 눈이 떠진다.
그녀의 하나뿐인 붉은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친다.
“읍! 으으읍!”
그녀가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대며 발버둥친다.
입술을 떼어낸다.
“콜록! 콜록! 콜록!”
성녀가 물을 토해낸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어, 어어어어어······.”
그녀가 멍청하게 상반신을 바라보더니, 곧이어 양팔로 뒤늦게 휑한 가슴을 가린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변태! 저질!”
성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변태, 저질이라니.
이 무슨 지극히 라노벨 히로인스러운 반응이란 말인가?
너무 클리셰젹이라 어이가 없을 지경.
역시 이 세상에는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필요하다.
“이, 이봐요오. 다, 당시인, 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오!! 키, 키키키키스도 모자라 가, 가가가슴까지 마음대로오오······. 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
성녀가 고개를 숙인다.
“그거 안 했으면 너 죽었어.”
심폐소생술 알못 같으니.
하여간 살려줘도 난리다.
“······나 이제 시집 못가요오······. 키, 키스로도 모자라 내 가, 가슴까지 외간 남자의 손에······.”
성녀가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채, 책임지세요오!”
한 손으로 흔들리는 가슴을 가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나를 가리키는 성녀.
책임을 지라니.
대체 뭘 지라는 거야?
“뭘? 난 네 생명의 은인이라니까? 살리려고 한 조치야. 심폐소생술도 모르냐? 왜 그렇게 사람이 무식해?”
“······그, 그건······.”
말문이 막힌 성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놨더니 이젠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지랄이네. 살려 줘도 난리야. 아니면, 하등한 인간한테는 감사하기 싫다는 거냐?”
하등한 인간이라는 말을 들은 베아트리체가 움찔한다.
“죄, 죄송해요오······. 그리고······.”
베아트리체가 시선을 회피하면서, 붉게 물든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고, 고마워요오······. 구해주셔서어······.”
“됐고, 수영복이나 입어라.”
무슨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사과 받는 게 이렇게 어렵다.
“아······. 알았어요오······.”
“말끝 질질 끌지 말고. 빡치니까.”
말투 진짜 킹받네.
차라리 중2병 모드가 낫다.
“네에에······.”
하지 말라니까.
하긴, 내 말을 들을 거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여긴 원래 그렇게 돼먹은 세상이니까.
스륵, 스르륵.
“다 입었어요······.”
등 뒤에서 성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수영복을 입고 얼굴을 붉힌 채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성녀가 있다.
수영장에는 아직 그녀와 나, 단둘만 남은 상태.
좋다.
“그래서, 아까 내 제안에 대한 답변은 생각해봤냐?”
“그, 그그그그건······.”
베아트리체가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말을 질질 끌지 말라니까 이제는 더듬네.
어이가 없다.
“혹시 싫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정체를 밝혀버리겠다고 압박하려던 순간.
“······협력, 하, 하하하할게요.”
성녀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좋아.
빌어먹을 CPR을 한 보람이 있네.
고마워요, 행보관.
케이크처럼 쉽게
“협력한다니까 다행이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눈앞의 남자, 김덕성은 그 말만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이탈했다.
수영장에 남은 건 베아트리체 혼자뿐.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베아트리체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으으으으······.”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화악.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