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61)
“알겠사옵니다. 김덕성님.”
“좋다. 베이스캠프 부지로 내가 안내하겠다! 김덕성!”
비키니 차림의 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애니메이션처럼 출렁거린다.
바스트모핑까지 구현되는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같으니.
아무튼, 애니메이션에서 섬 전체 지도를 전부 보여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린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믿음직스러운 상대니까.
“그래, 한번 안내해 봐라, 린.”
“믿고 맡겨주다니 고맙다. 네 신뢰에 시노자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보답하겠다.”
린이 커다란 가슴을 탕탕 친다.
“시노자키 공, 멋져······!”
그 모습을 본 에반젤린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린을 바라보며 말한다.
안 싸우는 건 좋은데, 이건 이거대로 좀 속이 울렁댄다.
“가자, 김덕성.”
에반젤린의 무지성 찬양에 우쭐해진 그녀가 내 오른쪽 손목을 잡고 이끈다.
얼떨결에 손목을 붙잡힌 그때.
“소녀도, 소녀도 김덕성님, 시노자키 공과 같이 갈 것이와요!”
덥석.
에반젤린이 빨개진 얼굴로 내 왼쪽 손목을 붙잡는다.
이게 지금 대체 뭐하는 짓인지.
한숨만 나온다.
[파트너. 여복이 터졌네, 아주. 양손의 꽃이야.]머릿속에서 어김없이 한마디 하는 흑태자.
양손의 꽃?
이제는 뭐라 반박하기도 지쳤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흥. 저런 귀축 같은 열등한 인간이 대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여는 이해가 안······. 히끅!”
뒤에서 살짝 떨어져 따라오면서 이상한 멘트를 내뱉던 베아트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딸꾹질한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붉은 눈동자로 내 눈치를 살피는 베아트리체.
역시 가짜 광기, 패션 중2병 캐릭터다운 모습이다.
그렇게 양옆에 린과 에반젤린이라는 두 짐 덩어리를 매단 채로 도착한 곳은 저 멀리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이 보이는 구릉 위의 평지.
옆에는 밀림이 펼쳐져 있다.
베이스캠프로 삼기에는 명당까지는 아니라도 적당한 장소.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원작에서도 주인공 조가 텐트를 설치했던 그 장소다.
애니메이션에도 나왔던 곳.
“여기다. 어떤가? 김덕성. 내가 선정한 베이스캠프 부지가.”
척.
내 손목을 놓은 린이 한쪽 팔을 펼치면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잘했어.”
칭찬할 건 해 줘야지.
칭찬받은 린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린이 고개를 숙이면서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다가오며 말한다.
“쓰, 쓰담쓰담은······. 안 해주는 건가······?”
쓰담쓰담?
네가 무슨 에리냐, 그딴 거 해달라고 하게.
어이가 없어진 내가 뭐라 하려던 순간.
[파트너, 그냥 좀 해 줘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린의 눈동자를 본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안 되겠지······. 역시······.”
조금만 더 하면 울먹일 기세.
여기서 울면 나만 곤란해진다.
‘어쩔 수 없지.’
[솔직하지 못하긴. 쯧쯧.]흑태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린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을 헝클인다.
“잘했다.”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세간에서는 차갑고 도도한 명문가 아가씨 이미지인데, 내 앞에서는 왜 저렇게 자꾸 푼수처럼 행동하는지 모를 일이다.
“고, 고맙다······.”
“그럼 이제 텐트부터 치자. 다들 거들어.”
생존배낭을 내려놓고 지급된 텐트를 펼친다.
이번에 제공받은 텐트는 8인용.
지지대를 세우고, 지주핀을 박는다.
훈련병 시절 각개전투 숙영의 악몽이 떠오른다.
비좁은 A형 텐트 안에서 훈련병 여섯이서 부대끼고 잤던 서글픈 기억.
그날 저녁 먹었던 눈물 젖은 육개장 컵라면이 떠오른다.
빌어먹을 군대 숙영 훈련 때문에 익숙해진 탓인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하와와와와. 김덕성님의 탄탄한 근육······. 역시 김덕성님! 일하는 모습도 멋있사옵니다!”
옆에서 에반젤린이 낯부끄러울 정도로 해대는 무지성 칭찬을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그렇게 텐트 설치도 끝내고, 삽으로 배수로 공사까지 끝낸 그때.
“이제 일도 끝났으니 다들 티타임을 즐기지 않겠사와요?”
부스럭.
에반젤린이 생존배낭에서 고급 본차이나 찻잔을 꺼내 흔들며 웃는다.
아니, 잠깐. 생존배낭에서 찻잔을?
문득 머릿속에 원작의 불길한 장면이 떠오른다.
생존배낭에 챙기라는 본인 몫 식량은 안 챙기고, 홍차와 찻잔 세트만 잔뜩 챙겼던 에반젤린의 모습이.
원작에서는 그래서 결국 주인공 유지가 직접 야생에 식량을 구하러 갔어야 했었다.
“야, 에반젤린. 설마 너 생존배낭에 찻잔이랑 차만 넣어온 거냐?”
“그렇사옵니다. 김덕성님. 티타임을 빠뜨린다는 건 영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어요!”
부욱.
생존배낭 지퍼를 열어 안에 꽉꽉 들어찬 본차이나 찻잔 세트와 휴대용 전기 포트, 차가 든 주머니와 스콘, 잼을 보여주는 에반젤린.
그 안에 식량 따위는 없었다.
불닭 소스는 가득했고.
아니 왜 불닭 소스를.
염병.
아무리 영국인이라도 그렇지.
국가별 스테레오타입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엿 같은 라노벨 세상 같으니.
결국 밀림 속으로 식량 채집을 나가야 한다.
“무슨 문제라도 있사옵니까? 김덕성님. 안색이 안 좋사와요.”
에반젤린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녀의 핑크빛 눈동자가 순진하게 빛난다.
그래, 원작에서도 이랬었다.
티타임을 즐긴답시고 무인도에서 밀크티를 끓여 스콘이랑 같이 먹었었지.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겠냐. 에휴. 티타임인지 뭔지 하자.”
잘못된 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과 이 세상을 만들어내 엿 같은 원작자 RIN이다.
체념하면서 자리에 주저앉는다.
“흥흥흥흥흥~♪”
달칵.
에반젤린이 콧노래를 부르며 휴대용 테이블과 의자를 펼친다.
“오늘은 특별히 김덕성님을 위해서 한국의 전통차를 준비했사와요.”
한국의 전통차?
원작처럼 밀크티가 아니라?
대체 뭐지?
“무슨 전통차인가? 스튜어트.”
린이 에반젤린에게 질문한다.
에반젤린이 입가를 가리면서 웃으며 답한다.
“쌍화차여요. 후후후후. 너튜브 채널 한국인의 반상에서 조제법을 배웠답니다.”
뭐? 쌍화차?
여기가 무슨 쌍팔년도 다방이냐?
기차 타는 데 사이다와 삶은 달걀을 준비했던 올리비아는 양반이었다.
어이가 없다.
그걸 또 그런 데서 배우다니 너튜브의 해악이 이렇게 심각하구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국뽕 영상들도 그렇고.
너튜브는 역시 규제되어야 한다.
쑤욱.
에바젤린이 커다란 은빛 보온병을 꺼낸다.
“소녀, 새벽부터 김덕성 님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쌍화차를 달였사와요. 후후.”
진짜 다방이냐고.
쪼르륵.
보온병에서 김이 뜨끈뜨끈 피어오르는 쌍화차가 새하얀 본차이나 찻잔에 담긴다.
그녀가 배낭에서 꺼낸 계란을 까서 넣은 뒤, 내 앞에 계란 둥둥 띄워진 쌍화차를 대령한다.
“여기 있사옵니다. 김덕성님. 쌍화차는 계란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조심해서 드셔야 맛있사와요!”
이것도 너튜브 채널에서 들은 얘기인가?
쌍화차 향이 코 끝에 물씬 풍긴다.
맛만 볼까.
후루룩.
입안에 쌍화차를 머금는다.
달콤씁쓰름한 한약 맛 비슷한 게, 생각보다는 괜찮다.
“어떠시어요? 김덕성님? 소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쌍화차의 맛이?”
“뭐, 괜찮네.”
나쁘지는 않다.
“후후. 여기 스콘과 잼도 있사와요. 드셔보셔요.”
에반젤린이 내 옆에 딱 붙어서 웃으면서 스콘을 쪼개고 딸기잼을 골고루 조심스럽게 발라준다.
쌍화차에 스콘이라니.
이 영국도 한국도 아닌 조합은 대체 뭐란 말인가?
딸기잼을 바른 스콘을 입안에 넣는다.
딸기잼의 달콤한 맛과, 퍽퍽한 스콘이 어우러져 꽤 맛있다.
잼 발라서 맛없는 과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스콘을 먹는 동안, 에반젤린이 린과 베아트리체에게도 쌍화차를 차려준다.
“흠······. 쌍화차도 꽤 괜찮군. 한국의 맛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쌍화차를 마시며 품평하는 린.
한국의 맛이 뭐가 특별해.
“인간의 차 따위에 흥미는 없지만······. ‘홍련의 성녀’인 여의 혀를 즐겁게 할 정도는 되는구나. 합격이니라. 계약자여.”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주절대는 베아트리체.
기분이 좋은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홍련의 성녀라니.
작명 센스 하고는.
후루룩.
쌍화차를 다시 마신다.
[파트너, 자연을 벗삼아 즐기는 티타임, 진짜 낭만적인데?]낭만은 모르겠고, 분위기가 그럴싸하긴 하다.
그렇게 여유 넘치는 티타임을 끝낸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작처럼 에반젤린이 식량을 안 가져온 관계로, 추가 식량 채집에 들어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 설치랑 티타임도 끝냈으니, 지금부터는 식량 채집 활동에 돌입할 거야. 채집은 2인 1조로, 나와 린이 한 조. 에반젤린이랑 트릭시가 한 조로 나누고, 숲 안에서 과일, 버섯 등의 식량을 채집하는 거지.”
내 말을 들은 린의 얼굴이 붉어지고, 에반젤린이 웃는다.
내가 린과 같은 조를 자처한 이유는 별 거 없다.
중2병 성녀와 하와와 국뽕 영국 공주보다는, 그래도 린이 한참은 선녀니까.
아무리 라노벨 세상이라 해도, 쟤네 둘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흥. 홍련의 성녀인 여가 대체 왜 인간 따위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
“모르겠으면 알게 해줘?”
“······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특별히 어울려주도록 하지. 영광으로 여기도록 하여라. 인간이여.”
내 한 마디에 바로 깨갱하는 붉은 눈을 내리까는 성녀를 마지막으로 조 배분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식량 채집뿐.
“이번에도 내가 앞장서겠다! 김덕성! 나만 믿고 따라와다오!”
또다시 내 손목을 덥석 잡은 린과 함께, 나는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무인도에서의 일주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운이 없군
무인도에 조성된 밀림은 울창했다.
빙의 전, TV에서 스쳐 지나가듯 봤던 아마존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무성한 수풀 속,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나는 린의 손길에 이끌려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린은 보무도 위풍당당하게 거침없이 밀림을 휘젓고 있었다.
“야, 린. 너 식량 어디 있는지 제대로 알고 가는 거 맞냐?”
이러다가 혹시 길 잃는 건 아닐까 살짝 불안해져서 던진 질문.
거기에 그녀가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한다.
“물론이다. 김덕성. 나만 믿어라. 이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망고나무 군락지가 있을 거다.”
평소의 자신 없는 모습과는 다른, 명백히 확신에 찬 표정.
약간 수상하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움찔.
반문을 들은 린의 몸이 떨린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물론 나는 이 섬에 망고나무 군락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작에서 주인공과 올리비아, 에반젤린 세 명이 밀림 속에서 길을 헤맨 끝에 발견한 게 그거니까.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섬 상세 지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가는 길까지는 모른다.
책빙의가 아니라 다른 아카데미물 웹소설처럼 게임에 빙의했다면 차라리 길 찾기가 쉬울 텐데.
게임이었다면 맵으로 지형이 구현되니까.
염병.
나만 라노벨이야, 나만.
왜 나만 꿀 못 빠냐고.
“그, 그건······.”
입술을 우물거리는 린.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자 같은 걸 뒤로 재빨리 감춘다.
린이 눈을 질끈 감고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며 소리친다.
“다, 다 아는 방법이 있다! 확실한 정보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나를 믿어다오. 김덕성······!”
에휴.
일본 만화 보면 저런 수상한 책자 들고 있다가 티 나게 감추면서 얼버무리는 장면이 클리셰긴 한데, 그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숨긴 물건이 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번 여름 학교는 협회장인 이치로도 참관했으니, 딸바보인 그 빌어먹을 아재가 린에게 가이드북 같은 거라도 쥐여줬겠지.
“그래, 뭐. 믿지. 뭐. 잘했다. 린.”
그래도 밀림 안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
“후, 후후후후후후······. 여자력 수행의 효과가 나타나는군. 김덕성. 역시 네 미래의 현모양처는 나밖에 없다!”
또또 오버한다, 또.
린 쟤는 다 좋은데 그 빌어먹을 육탄 돌격이랑 현모양처 얘기만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성 갈기 싫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안내나 마저 해라. 린.”
“아, 알겠다······.”
평소의 쭈그러든 모습으로 돌아간 린.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파트너, 이번에는 말이 좀 심했어. 숙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신사답지 않게.]흑태자가 한마디 한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의기소침한 모습은 별로 안 보고 싶다.
“그렇다고 처져있지 말고. 나까지 처지니까.”
“······으읏?!”
내 말을 들은 린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헤실헤실 웃는다.
“고, 고맙다. 김덕성······. 너는······. 역시······.”
“고마우면 안내나 마저 해.”
상냥하니 뭐니 오글거리는 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말허리를 잘라 사전에 차단한다.
“아, 알았다!”
내 말에 살짝 놀라면서, 귓불까지 빨개진 얼굴로 앞장서는 린.
이제 좀 살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