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74)
미소녀에서 미녀로 순식간에 변한 세이라가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유언은 다 지껄였나. 이반.”
전성기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되찾은 세이라의 핏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요염한 미녀로 변한 세이라의 풍만한 가슴이 흔들린다.
진짜 백색 여제가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이반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의 시선이 눈앞의 세이라를 바라본다.
“놀랍군. 설마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반의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근육이 긴장한다.
이반이 세이라를 비웃은 이유는 그녀가 반쪽짜리 EX랭크였기 때문이다.
파이브 크라운즈.
30년 전, 대재해에서 인류를 구원한 다섯 영웅.
그들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인 레드 스타에게 수학한 이반 본인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이 눈앞에 서 있다.
반푼이가 아닌, 전성기 시절의 백색 여제가 거기 있다.
이계종의 파도가 밀려오고, 인류가 존망 위기에 놓였던 순간.
인류의 선봉에 서서, 수많은 이계종을 참살해서 마침내 세계를 구원해낸 절대자가 저기 있다.
“하지만······. 마력로에서 마력이 줄줄 새고 있군.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길어봤자 15분······. 하지만 이 몸이 상대라면 너도 전력을 다해야 할 테니 훨씬 줄어들겠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이반은 세이라의 패널티를 꿰뚫어봤다.
“하,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 몸으로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그가 세이라를 빈정댄다.
“네놈을 처형하는 데는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할지니······.”
이반의 질문에 세이라가 차게 웃는다.
“감히 이 몸을 주제넘게 걱정할 필요 없다.”
츠팟.
세이라의 하얀 양산이 펴진 순간.
[부르셨나요, 마스터.]그녀의 등 뒤에 반투명한 백색 여인이 나타난다.
세이라의 초월무장에 깃든 정령, 아마테라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세이라의 몸을 중심으로 백색 영역이 뻗어나간다.
심상전개의 진언이 세계에 새겨진다.
[종언을 부르는 백색 세계]【World End White】
지이이이이이잉!
세이라를 중심으로 마력파가 퍼진다.
번쩍.
새하얀 백광이 주변을 가득 메운다.
무인도를 얼리던 이반의 심상전개, 영구 동토(Crystal Land)가 새로이 나타난 새하얀 빛의 영역에 삽시간에 밀린다.
“큭!”
찬란한 백색 빛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영구 동토를 보는 이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반의 얼굴에 핏줄이 돋는다.
우우우우웅.
차르 너클이 회전하며 마력을 뿜어낸다.
EX랭크 강자들의 승부는 곧 공간 대결.
상대에게 본인의 영역이 빼앗기는 순간 패배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반이 기합을 내지른다.
그의 얼굴에 핏줄이 돋아난다.
두근, 두근.
그의 마력로가 쉴 새 없이 마력을 뽑아내고, 차르 너클이 회전한다.
아까와는 다른, 진심 전력을 다한 방어.
하지만 얼어붙은 대지의 해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주 잠깐.
콤마 몇 초 정도 해빙을 멈췄을 뿐.
“이반.”
츠팟.
세이라의 몸에 섬광이 일어난다.
그녀의 신체가 순식간에 영구 동토와 백색 세계의 경계까지 이동한다.
소복.
그녀가 경계선을 밟자, 얼어붙은 대지가 그만큼 찬란하고 따스한 백색으로 물든다.
세이라의 차가운 눈동자가 핏발 선 이반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설마 네놈과 이 몸이 같은 EX랭크라고, 수준까지 같을 거라 착각한 건 아니겠지?”
번쩍, 번쩍.
세이라의 등 뒤에 반짝이는 전구처럼, 백색의 광구가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퇴물 따위가! 과거의 망령 따위가──! 감히······. 감히! 대(大) 소비에트의 앞길을 막겠다는 것이냐! 시대에 역행하겠다는 것이냐!”
이반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진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세이라의 말이 맞았다.
같은 EX랭크 사이에도 수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한 다섯 영웅의 일좌를 차지하는 저 괴물을.
그는 정면 승부로 이길 수 없다.
아니,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후퇴해야 한다.’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후퇴뿐.
이반은 긍지 높은 무인 따위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호승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객기 때문에 개죽음을 당하는 건 사양이다.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
나아가 그의 진정한 소망인 세계 적화를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리고 후퇴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괴물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많은 시간도 필요 없다.
1초.
단 1초만 벌 수 있으면 된다.
위이이이이잉!
차르 너클이 회전한다.
이반이 본인의 마력로를 쥐어짠다.
“스푸트니크──”
우우우우우우웅!
끔찍할 정도의 마력이 양쪽 주먹에 모여 삭풍을 피워올린다.
아직 불완전한 기술.
전부 터득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괴물, 백색 여제를 속이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래야, 1초라도 벌 수 있다.
“노바!!”
번쩍.
일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든다.
어마어마한 풍압이 세이라를 향해 휘몰아친다.
그 사이로, 백색 광구가 피어오른다.
스푸트니크 노바.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이자, 소련 최강의 영웅이었던 ‘레드 스타’ 니콜라이 카사트킨의 필살기.
이반이 전력을 다해 쥐어 짜낸 마력으로 불완전하게 구현된 백색의 별이 공간을 찢어내는 끔찍한 삭풍과 함께 세이라를 향해 날아든다.
“오랜만이군.”
세이라가 웃는다.
촤르륵.
그녀가 부채를 펼친다.
“허나, 니콜라이의 별에 비하면 네놈의 별빛은 반딧불에 불과하느니라.”
탁.
세이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그녀의 등 뒤에 선 정령, 아마테라스가 우아하게 손을 흔든다.
그 순간.
쿠-콰-콰-콰-콰!
세이라의 등 뒤에 서 있던 광구에서 폭발적인 빔이 쏘아진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던, 이반이 혼신의 힘을 다해 쏘아낸 백색의 별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킬조차 아닌, 세이라의 기초적인 마력 폭발 테크닉이 이반의 필살기를 깔끔하게 지워낸 것이다.
그 사이에서, 세이라는 느꼈다.
이반의 기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패배한 개처럼 도망갔구나. 이반.”
세이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후회할 텐데.”
부웅.
이반의 귓가에 세이라의 조롱이 들린다.
그가 입술을 깨문다.
뭐가 도망이라는 거냐.
이건 후퇴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이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력을 다해 꽝꽝 얼은 바다를 달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쫓지 않는 거지?’
세이라.
그녀는 자신을 쫓을 수 있다.
그런데도 쫓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미 포기한 건가?’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에 사고를 할애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반은 대신 도주경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괴물의 기감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서 안전을 확인한다면, 그때 긴급 귀환 장치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도주 계획을 세운 그때.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지?”
그의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린다.
그와 함께 이반의 전신을 저릿한 압박감이 짓누른다.
이반의 손이 떨린다.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거기에는.
“이반 안토노프.”
탁한 초록빛 머리카락, 우울한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인.
일본 영웅 협회장이자 EX랭크 영웅, 뉴 크라운즈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괴물.
검성의 뒤를 이은, 일본 현역 최강의 영웅.
검귀(劍鬼) 시노자키 이치로가 어두운 녹색 바디 슈트를 입은 채, 손에 탁한 녹색 마력이 타오르는 일본도를 들고 공중에 비행 모드로 떠 있었다.
“!!”
이반의 얼굴에 낭패가 떠오른다.
백색 여제.
그 괴물을 따돌리기 위해, 마력의 대부분을 쥐어짜낸 그였다.
심상전개는커녕 진명해방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찬 이반에게 이치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
세이라가 전대의 괴물이라면, 이치로는 현역 괴물이니까 말이다.
“소련의 사냥개 따위가 감히, 감히······.”
이치로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내 땅인 일본에서, 사랑하는 내 딸과 내 예비 사위를 건드리다니······.”
이치로의 절제된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묻어 나온다.
이치로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는 지금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시노자키 린.
이제야 겨우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된 그였다.
수많은 세월 동안 어긋난 관계가 이제야 맞춰졌다.
그런데 그 행복을 앗아가려는 자가 눈앞에 있었다.
검성의 그림자에 파묻혀 삐뚤어진 자신의 마음을 구원하고, 딸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한 소년, 김덕성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놈이 눈앞에 있었다.
“······더 말을 섞을 가치도 네놈의 이름을 불러줄 이유도 없군. 이 자리에서 죽어라.”
이치로가 일본도형 초상병기, 오오카네히라를 하늘로 치켜든다.
[백귀야행]【Wilde Jagd】
이치로의 심상전개 진언이 세계에 새겨진다.
우르르르르르르릉!
먹구름이 몰려든 하늘에서 우레소리가 울린다.
탁한 녹색 안개가 순식간에 전역을 덮는다.
그 너머,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백귀야행(Wilde Jagd)
지금까지 사냥해서 종속시킨 이계종과 빌런의 혼백을 해방해서 적을 유린하는 이치로의 심상전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우우우우우······.]혼백들이 내지르는 섬뜩한 귀곡성이 이반의 청각을 어지럽힌다.
이반의 얼굴에 절망이 떠오른다.
“그러길래, 이 몸이 후회할 거라 하지 않았더냐. 이반.”
어두운 녹색 안개 한쪽 구석, 찬란한 백색 서광이 비친다.
어둠 속 한 줄기 희망 같은 불빛.
하지만 이반에게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빛이었다.
백색 서광 사이로, 하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요염한 미녀가 양산을 탄 채 날아서 다가온다.
요시자키 세이라.
그녀가 얼굴 한가득 조소를 띄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세이라를 맞이한 이치로가 목례한다.
주륵.
세이라의 입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린다.
“괜찮습니까?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하셔도?”
세이라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고개를 젓는다.
“이 몸은 괜찮다. 이치로 군. 네가 걱정하기에는 백 년은 이르다. 그리고······.”
척.
세이라가 접힌 부채 끝으로 이반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놈은 내 사냥감이다. 이치로 군. 너는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도 모르느냐?”
“하하하하. 레이디 퍼스트가 아니라 장유유서겠지요. 이사장님. 이사장님께서는 한발 물러나 있어도 괜찮습니다. 젊은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여자의 나이로 장난치는 무례한 버릇은 여전하구나. 쯧.”
세이라가 혀를 찬다.
“좋다. 그럼 이 몸이 특별히 저놈의 지분 절반을 내게 양도하지. 웃어른으로서의 아량이니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자신 동네 똥개 취급하며 모욕하는 세이라와 이치로의 언행에도 이반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세이라가 자신을 놓아준 이유는, 이치로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처음부터 함정이었다고.
이반이 마지막 발악으로 긴급 귀환 장치에 마력을 불어넣는다.
“어딜 도망가려고.”
번쩍.
녹색 섬광과 함께 그의 목에 걸려 있던 긴급 귀환 장치가 박살난다.
도주수단까지 봉쇄당한 이반의 눈에 절망이 깃든다.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꼴사납게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소련군 스페츠나츠 3번대 대장, 이반 안토노프 소장.”
탕.
이반이 주먹을 부딪친다.
죽더라도, 위대한 소비에트의 군인으로서 죽겠다.
그런 다짐이었다.
“위대한 소비에트와 인민의 이름으로, 너희를 상대하······.”
이반이 비장한 목소리로 최후의 결심을 말하려던 그때.
번쩍!
백색 섬광과 녹색 회오리가 이반을 향해 날아들었다.
세이라와 이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