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76)
밀양 얼음골 사과면 청송 사과랑 같이 한국에서 유명한 특산물 사과.
맛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다행이군. 아, 혹시 입맛에 안 맞을까봐······. 샤인머스캣도 준비했다.”
부스럭.
린이 과일바구니에서 연두색 포도,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꺼낸다.
오.
안 그래도 요즘 샤인머스캣이 먹고 싶었는데, 정말 사올 줄은 몰랐다.
“이번에도 아, 해다오.”
린이 샤인머스캣을 한 알따서 내게 먹여준다.
샤인머스캣을 받아든다.
역시 이 맛이지.
사과도 좋지만, 매번 사과만 먹으면 물리기 마련이다.
가끔은 다른 과일도 먹어줘야 한다.
꼬르륵.
굶주렸던 탓일까.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먹은 위장이 요동친다.
허기가 몰려든다.
샤인머스캣과 린이 깎은 밀양 얼음골 사과를 먹는다.
“맛있게 먹는 것 같아 기쁘군. 덕성. 그래도 급하게 먹지 마라. 체한다. 물도 마셔가며 먹어라.”
린이 생수 페트병을 올린다.
이런 멘트 하나하나까지 진짜 엄마 같아서.
기분이 생숭생숭하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후후.”
린이 웃는다.
그녀 말대로 과일을 천천히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에반젤린과 내가 입원한 이곳은 2인 병실.
원래대로라면 내 입원 소식을 들은 올리비아를 포함한 다른 여자들이 와야 정상인데.
왜 안 오지?
올리비아를 포함한 다른 애들이 없으니 약간 허전하다.
“다른 애들은?”
“아아. 그것 말인가? 습격 사건 이후 실습이 일시 중단됐다가 안전 점검 후 재개됐다. 오늘이 실습 마지막 날이니 곧 올 것이다.”
린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샤인머스캣을 집어먹으려던 순간.
덜컥.
병실 문이 열린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나를 포함한 병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린다.
거기에는.
“어라, 깨어난 덕성 오빠다! 덕성 오빠! 세-라땅 오빠 엄청 보고 싶었어!”
원래보다 더 어려진 모습을 한 백발 적안 미소녀, 세이라가 품에 본인 상반신만큼 큰 하얀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하.
진짜 미치겠네.
시노자키류의 최종병기(삽화 有)
“덕성 오빠!”
애처럼 해맑게 웃는 세이라.
그녀의 모습에 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라노벨 세상 원주민인 린, 국뽕 븝미인 에반젤린, 컨셉 중2병인 베아트리체조차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 이제 일어난 거야? 세-라땅이랑 놀아주는 거야?”
세이라가 헤헤헤 웃으며 품에 안은 하얀 곰인형의 팔다리를 만진다.
그녀가 달려와 내 침대 위에 올라탄다.
“덕성 오빠. 세-라땅은 덕성 오빠가 정말 보고 싶었어!”
세이라가 내 환자복 소매를 잡고 옅게 웃는다.
원래라면 이 할매가 노망난 게 아니냐며 역겨워했을 장면.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평소보다 어려진 모습.
유아 퇴행적 언행.
나는 세이라가 저런 모습을 언제 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누님······.]흑태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댄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세이라는 10년 전 제자였던 프로페서에게 입은 중상 때문에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하는 상태.
그녀가 15세 외관 미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그때 입은 상처 때문이다.
하지만 라노벨에서 등장하는 이런 외관과 나이가 일치않는 미소녀 캐릭터의 클리셰가 으레 그렇듯, 세이라 역시 일시적으로 전성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패널티가 바로.
“덕성 오빠. 이제 몸 좀 괜찮아?”
이 유아 퇴행 현상이다.
전성기 모드가 끝난 뒤의 세이라는 일시적으로 유아 퇴행 현상을 겪는다.
그게 지금 내 눈앞에서 세이라가 저러고 있는 이유다.
여름 축제 때처럼 주책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전성기 모드에 대한 부작용인 것이다.
주책 부리는 건 역하지만, 지금은 진짜 환자기 때문에 내가 뭐라할 수가 없다.
[······누님, 하여간 주책은.]‘주책이 아니야.’
흑태자의 착각을 정정한다.
‘일시적으로 전성기 수준의 힘을 사용한 데 따른 부작용일 뿐이야.’
[······.]흑태자가 잠깐 침묵한다.
[······그렇다면 우리 누님, 더 잘 대해 줘. 마음에 안 들어도. 널 구하기 위해서 부작용까지 감수한 거니까.]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흑태자.
그의 말에 굳이 답하진 않았다.
“후우.”
한숨이 나온다.
결국 또 나 때문이라 이거지.
하여간, 할망구 진짜 주책이라니까.
쓸데없이 전성기 모드까지 쓰다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염병.
“오빠, 얼굴 안 좋아. 괜찮아? 아직 많이 아파? 세-라땅이 호 해줄까?”
고스로리 드레스와 프릴 달린 헤어 밴드 덕분에 인형처럼 보이는 세이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아니, 괜찮아.”
“흐응. 그렇지만 아파 보이는데. 오빠. 시로쨩도 오빠가 걱정된대.”
세이라가 품에 안은 하얀 곰돌이를 만지작댄다.
저 곰인형 이름이 시로였구나.
곰인형 이름 같은 건 별로 안 중요한 설정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저렇게 친절하게 쓸데없이 다시 상기시켜주다니.
불필요한 친절이다.
“······이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린이 세이라에게 말을 건다.
“으응? 와! 가슴 큰 언니다!”
린의 말을 들은 세이라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파고든다.
“이사장님, 그, 그러시면 간지럽습니다······.”
당황한 린이 얼굴을 붉힌다.
“언니 가슴 푹신푹신해······.”
세이라가 린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원작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오긴 했다.
원작 11권에서 프로페서와의 전투가 끝난 뒤에 유아 퇴행 모드가 된 이사장이 아리스를 보고 엄마라고 안기는 장면이 있다.
옆에 있던 유지는 아빠 취급당하는 건 덤이고 말이다.
그런데 원작의 이 빌어먹을 클리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이야.
돌겠네, 정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하십시오. 이사장님.”
린이 세이라의 하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의 입가에 모성애 가득한 미소가 떠오른다.
“언니 품, 너무 좋아······. 엄마 같아. 덕성 오빠는 아빠 같아!”
마침내 그 대사가 나오고야 말았다.
세이라가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아, 진짜.
환자라서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니다.
무슨 엄마 아빠야.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저, 정말입니까?”
“응! 언니!”
그녀의 질문에 세이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 제가 엄마고 덕성이 아빠······. 엄마, 아빠······. 엄마아빠······.”
화악.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둘 다 짠하다, 짠해. 에휴. 파트너. 인마. 평소에 그러니까 두 사람한테 좀 잘해줘.]흑태자가 잔소리를 한다.
척.
린이 무릎 위에 세이라를 앉힌 채,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후후, 덕성. 역시 네 미래의 현모양처이자 가족이 될 사람은 나뿐이다.”
그녀가 자신 있게 웃는다.
현모양처는 무슨.
말을 말지.
내가 뭐라하려던 그때.
“이사장님! 혹시 여기 계십니까?”
열린 문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든다.
“김덕성 군······?”
거기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은빛 눈동자의 늘씬한 미소녀.
사이온지 아리스가 있었다.
아리스와 시선이 마주친다.
“정신을 차렸습니까? 다행입니다.”
아리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그 모습에 다른 세 여자의 시선이 아리스를 향한다.
“읏?!”
시선을 의식한 아리스의 예쁜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척.
아리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이건 어디까지나 슈오우 학원의 모든 생도를 대표하고 책임지는 학생회장으로서, 생도인 당신의 안위를 걱정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공인. 사심이 있는 게 아니니 착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리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그때.
“아-쨩 언니!”
아리스를 발견한 세이라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녀가 린의 품에서 뛰어내려 세이라에게 달려간다.
“아-쨩 언니 왔어! 보고 싶었어!”
세이라가 자연스럽게 아리스에게 안긴다.
“아, 예. 이사장님. 몸도 안 좋은데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협회장님이 혼내실 겁니다.”
세이라를 안아 올린 아리스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녀를 어른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숙련된 솜씨.
세이라가 원작에서 주책을 부릴 때나 유아 퇴행 모드로 들어갔을 때는 아리스가 받아준다는 설정이었지.
모성애마저 느껴질 정도.
협회장을 언급하자 세이라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유아 퇴행 모드 세이라는 이치로를 무서워한다는 설정.
이런 데만 쓸데없이 상세한 설정이 오늘따라 원망스럽다.
오늘따라?
나도 미쳤군.
여기는 원래 이렇게 막돼먹은 세상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미친 라노벨 세상을 결코 좋아할 수 없다.
“알았어. 아-쨩 언니. 말 잘 들을게. 세-라땅은 착한 아이니까.”
세이라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세-라땅. 시로쨩이랑 아-쨩 언니랑 같이 놀래.”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이쪽으로.”
유아 퇴행한 세이라의 손을 잡은 아리스가 나를 바라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김덕성 군. 몸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뭐, 조금 삐걱대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정말이다.
치료 스킬 아니면 포션이라도 쓴 모양인지, 내 몸은 꽤 쌩쌩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야 좀 뻐근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그럼 저는 이사장님을 보좌해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리스가 내게 목례한 뒤, 세이라를 데리고 병실을 나간다.
“······.”
병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돈다.
침묵을 깨뜨린 건 에반젤린.
“뭐랄까, 폭풍 같은 상황이었사와요.”
그녀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말한다.
[에휴······.]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동료인 세이라의 추태를 적나라하게 목격했으니, 현자 타임이 올 수밖에 없겠지.
이해한다.
솔직히 내가 봐도 좀 그랬으니까.
하지만 날 구하다가 저렇게 유아퇴행한 모습을 보니 살짝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어쨌건 세이라가 저렇게 된 것도 내 책임이니까.
어쩔 수 없다.
돌겠네, 진짜.
[앞으로 수행, 더 열심히 하자고. 파트너. 이런 일 안 생기려면 말이야.]흑태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야지.’
그의 말이 맞다.
저 빌어먹을 꼴을 안 보려면 내가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나도 웹소설 주인공처럼 독식 날먹 편법으로 쉽고 편하게 강해지고 싶었는데.
고구마 지뢰밭 같은 염병할 라노벨 세상 같으니.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그날, 프랑스에서 결심했으니까.
이 엿 같은 라노벨 세상 따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내가 나서서 구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원작을 비틀어버린 게 나니까.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이야. 우리 파트너. 다 컸는데? 옆에서 조언해준 보람이 있다고. 이 형은 우리 파트너가 대견해.]형?
또 소름이 돋는다.
내가 형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을 말지.
흑태자의 헛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쉰다.
그나저나 병실이 묘하게 답답하다.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네.”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덕성, 밖에 나가고 싶나?”
린이 내게 답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그럼 나와 함께 가자.”
척.
린이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갑자기?
너랑 같이?
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자, 린이 얼굴을 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