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83)
한서진이 차분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한다.
하렘 계획.
다수의 소녀들을 김덕성과 중혼시킨다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하렘 구성원과 김덕성 사이의 적당한 거리 조절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번 데이트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카스미와 김덕성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한서진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고, 고마워요. 한서진 씨.”
카스미가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시야에 한서진의 모습이 보인다.
유능한 커리어 우먼 복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여자라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알파걸의 모습이었다.
‘역시 한서진 씨······. 멋져.’
카스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그럼 모처럼 부실에 오셨으니 간단한 다과라도······. 대접해드릴게요.”
탁.
카스미가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고, 비치되어 있던 다과를 꺼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롱차와 화과자가 탁자 위에 놓인다.
“대접 감사합니다. 호시노 씨.”
한서진이 절도 있는 태도로 우롱차를 한모금 머금는다.
그 모습을 본 카스미가 우롱차를 마신다.
우롱차 향이 그녀의 입안에 감돈다.
“그럼 지체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혹시 호시노 씨께서 생각해둔 데이트 코스, 있으십니까?”
탁.
찻잔을 내려놓은 한서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녀의 질문에 카스미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아, 아뇨······. 어, 없어요······.”
그녀의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데이트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혼자 있을 때 읽은 연애 소설에서 남녀가 데이트하는 장면은 수도 없이 많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연애 소설을 따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데이트 코스, 추천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한서진의 말에 카스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카스미가 애꿎은 우롱차 잔을 만진다.
“좋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데이트 코스는······.”
한서진의 입술에 카스미의 시선이 집중된다.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키하바라입니다.”
“에에에에에에?!”
한서진의 말에 카스미가 놀란다.
아키하바라.
거기가 어떤 거리인지는 오타쿠 문화에 문외한인 카스미도 잘 알고 있다.
전자 상가이자 오타쿠들의 성지가 아닌가?
“아키하바라는 대체 왜······.”
이번만큼은 카스미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이케부쿠로, 신주쿠, 시부야.
더 나아가봤자 오다이바, 키치죠지, 하라주쿠 정도가 나올 줄 알았던 카스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김덕성이 그런 취향이라면 모를까, 딱히 오타쿠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그동안 김덕성님의 취미 생활을 분석한 결과, 김덕성님은 한국의 웹소설. 그중에서 특히 히로인 캐릭터의 매력을 중심으로 한 일명 ‘캐빨물’을 가장 선호하는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한서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김덕성.
그의 취미 생활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음식이 뭐고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며, 그의 성격이 어떤 성격이고 키는 얼마고 몸무게는 얼마인지.
김덕성에 관한 아주 사소한 사실까지 한서진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보좌 요원으로서, 아니 그를 경애하는 한 명의 추종자로서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김덕성님께서 즐기는 ‘캐빨물’은 당연히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그 원류인 바. 김덕성님 역시 티는 내지 않지만,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즐기는 매니아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리하여 그의 취향을 분석한 한서진은 마침내 하나의 결과에 도달했다.
김덕성.
그가 오타쿠일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케부쿠로에서 메이드 카페를 보고 기겁했던 모습은 아마도 오타쿠들이 흔히 하는 ‘일반인 코스프레’ 또는 ‘씹적씹’에 해당할 것이다.
겉으로는 오타쿠 문화를 경멸하지만, 내심 오타쿠 문화를 동경한다.
그런 태도는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그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데이트 장소.
그곳은.
“따라서 아키하바라야말로 김덕성님이 가장 선호할 데이트 코스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키하바라뿐이다.
한서진이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카스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했고,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알았어요. 한서진 씨. 그럼 후배 군이랑 아키하바라 어디부터 가야 하죠?”
설득당한 카스미의 질문을 들은 한서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탁.
한서진이 책상 위에 태블릿을 꺼내면서 말한다.
그날.
카스미와 한서진은 저녁 늦게까지 아키하바라 데이트 코스를 짰다.
김덕성이 알면 뒷목을 잡고 졸도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니 왜 거기서 나와
토요일.
마침내 카스미 선배와의 데이트 약속일이 다가왔다.
[파트너, 일어나. 오늘 데이트 약속인 거 잊었어?]알람 시계 뺨치는 흑태자 모닝콜이 아침잠을 깨운다.
“으으으······. 더 자고 싶은데······.”
더 자고 싶다.
안 그래도 1학기 내내 바른 생활 사나이처럼 아침 7시에 일어났던 나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방학이니까 좀 더 늘어지게 자도 된다.
[레이디를 기다리게 할 셈이야? 빨리 일어나라고. 파트너.]흑태자가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짝, 짝.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친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을 일깨운다.
어쨌거나 가기는 가야 한다.
약속 장소는 학원 정문 앞.
거기서부터 카스미 선배와 함께 대중교통, 그러니까 전철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다.
씻은 뒤에 외출용 사복으로 갈아입는다.
[오, 파트너. 코디는 이만하면 괜찮아.]흑태자의 코치를 받아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뒤에 기숙사를 나가려던 그때.
[파트너. 카스미 선배가 준 부적은 안 챙기냐?]흑태자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부적.
교토에 갔을 때, 카스미 선배가 선물해준 액막이 부적 말하는 건가?
기왕 카스미 선배와의 약속인데 흑태자의 조언대로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발길을 돌려 서랍장으로 향한다.
축제에서 에리에게 선물 받은 텐구 가면이 벽에 걸려 있는 서랍장 위에는 린이 낚은 금붕어, 카스미 선배가 경품 사격에서 딴 곰인형과 액막이 부적이 있었다.
열쇠고리처럼 매달 수 있는 형태의 부적을 챙겨 메고 있던 크로스백 지퍼 고리에 매단다.
[좋았어. 파트너. 완벽해.]흑태자가 칭찬을 건넨다.
그렇게 부적까지 매단 뒤에 기숙사를 나서 학원 정문으로 향한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교정.
오전부터 따가운 여름 땡볕이 몸을 강타한다.
뜨겁다. 덥다.
빨리 에어컨 쐬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후배 군. 여기야, 여기!”
귓가에 카스미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카스미 선배가 있었다.
청순한 인상을 한껏 강조하는 하늘하늘한 연보라색 원피스 위에 하얀 여름 가디건을 입고, 손에는 조그마한 보라색 가방을 든 카스미 선배가 오른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매번 교복 차림만 보다가 사복 차림을 보니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예쁘기는 하다.
하긴, 히로인 중에서 안 예쁜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후배 군. 시간 맞춰 왔구나. 후후.”
카스미 선배가 입을 가리며 옅게 웃는다.
꼴을 보니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선배.”
“응. 그렇게 오래 기다린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카스미 선배가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내젓는다.
“두 시간 정도······. 기다렸으니까. 응. 별거 아니야.”
그녀가 한쪽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말한다.
두 시간?
별거 아니라고는 해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일찍 나오지 마십쇼.”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건지.
부담스럽다.
괜히 살짝 미안해지기도 하고.
그날, 카스미 선배가 나 대신 몸을 던져 나를 구해준 이후부터.
나는 묘하게 그녀에게 예전처럼 강하게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카스미 선배보다 더 어질어질한 말투를 사용하는 히로인들이 새로 등장해서 그녀의 말투에 그래도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도 있고 말이다.
“······나, 후배 군이랑 단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고······. 나들이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살짝 긴장해서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아. 부담 줘서 미안해. 후배 군.”
카스미 선배가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여간, 카스미 선배는 저렇게 별거 아닌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저기압 되는 게 문제다.
괜히 말한 사람 기분이 찝찝하잖아.
[야, 파트너. 인마. 너랑 단둘이 나들이가 처음이라잖아. 잘 좀 해줘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울린다.
단둘이 나들이가 처음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교토 교류전 이후에는 뉴 월드 리그와의 접점도 끊어졌기에 그녀와 예전처럼 단둘이 만날 일도 없어졌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카스미 선배 입장에서는 좀 섭섭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미안해진다.
“아니,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괜한 소리 해서 미안합니다. 선배.”“으? 응? 아니야. 괜찮아. 그, 그럼. 후배 군, 정말 미안하면······.”
카스미 선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민다.
“소, 손잡아주면 안 될까?”
카스미 선배의 얼굴 전체가 분홍색으로 물든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손을 내민다.
에휴.
린도 그렇고 왜 저렇게 손 잡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알겠습니다. 선배.”
카스미 선배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헤헤······. 후배 군이랑 손잡았어······. 손······. 후배 군은 나쁜 남자에 바람둥이에 귀축이지만 손은 따뜻하구나······.”
카스미 선배가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댄다.
다 좋은데 그 빌어먹을 나쁜 남자 얘기는 좀 그만 하면 안 되겠습니까?
같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킨다.
어쨌건 카스미 선배가 꽤 기분 좋아 보였으니까.
괜히 오늘 같은 날에 산통을 깨고 싶지는 않다.
“그럼 출발하자! 후배 군!”
그녀가 신난 표정으로 말한다.
“나, 후배 군이 좋아할 만한 데이트 코스······. 엄선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카스미 선배가 손을 가리며 소심하게 후후 웃는다.
내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 코스라니?
대체 뭐지?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등골에 맴돈다.
“거기가 어딥니까?”
내 질문에 카스미 선배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는다.
그녀가 내게 다가오자, 제비꽃 향기가 코 끝을 살짝 스친다.
향수 뿌린 건가?
“비─밀이야. 후배 군. 그렇지만 도착하면 분명 좋아할 거야.”
카스미 선배가 묘한 자신감이 서린 미소로 웃는다.
도착하면 좋아할 곳이라니.
어딘지 짐작도 안 가는데.
그렇게 나는 카스미 선배의 손에 이끌려 학원 앞에서 전철을 탔다.
*
그렇게 카스미 선배의 손에 이끌려 전철을 탄 나는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비밀을 엄수했던 데이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여기야! 오늘 후배 군과 내가 데이트할 장소!”
전자 상가와 오타쿠 가게가 밀집한 거리.
미소녀 티셔츠를 입은 오타쿠와 코스튬 플레이어, 그리고 정장 차림의 직장인이 공존하는 기묘한 거리.
오피스 타운이자 전자 상가이며 오타쿠의 성지인 장소.
어떤 의미로는 도쿄 최고의 관광 명소인 아키하바라였다.
어디 가게에서 튼 건지 알 수 없는 애니송이 귓가에 흘러들어온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파, 파트너 여기는 대체······.]길거리 여기저기 붙은 미소녀 포스터와 알 수 없는 전광판을 보고 컬쳐 쇼크를 받은 모양인지 흑태자가 말을 더듬는다.
심지어 미소녀 캐릭터가 랩핑된 자동차, 일명 이타샤(痛車)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저걸 실물로 보게 되다니.
염병.
끔찍하다.
그 빌어먹을 ‘내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 코스’가 얼어 죽을 아키하바라였다는 말인가?
물론 빙의 전의 나는 아키하바라를 상당히 동경하기는 했다.
[일본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흑태자가 경악이 섞인 목소리로 한탄한다.
오타쿠 하면 일본, 그중에서도 아키하바라 아니던가?
오타쿠의 성지에 가고 싶지 않은 오타쿠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친구들이랑 일본 여행을 가면 아키하바라는 무조건 방문하는 걸로 결정했었다.
거기 가면 콜라보 카페 가서 아리스 메뉴 주문해서 인증샷도 찍고, 라디오 회관에서 굿즈도 전부 쓸어오기로 계획했었는데.
내가 그때 왜 그런 미친 생각을 했었지? 돈을 땅바닥에 버릴 뻔했다.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일본 여행도 무산됐지만, 어쨌건.
전생에도 안 갔던 아키하바라를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에서 가게 되다니.
씹덕 세계에서 가는 오타쿠 성지? 정말 미쳐버리겠다.
“윽······.”
탈덕한 지가 언제인데 오타쿠 거리를 보니 눈에서 피가 나올 것 같다.
고통스럽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끔찍한 장소로 나를······.
“왜 그래. 후배 군. 안색이 안 좋아. 혹시······. 아키하바라가 싫은 거야?”
내 앞에 선 카스미 선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색을 살핀다.
싫다고 말하려던 그때.
“내가 신경 써서 후배 군을 위해 고른 장소인데······. 싫다면 미안해······. 후배 군······.”
카스미 선배가 고개를 숙인다.
자꾸 저러니까 빈말이라도 싫다고 할 수가 없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색하게 웃는다.
“정말? 괜찮은 거지? 좋아. 그럼 후배 군. 가챠폰 회관부터 가자!”
카스미 선배가 팔짱을 끼며 나를 이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가챠폰 회관.
아키하바라의 명소 중 하나로, 가챠폰이라 불리는 캡슐 뽑기 기계들이 끝없이 늘어선 가게다.
“우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