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96)
유세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내게 묻는다.
우리 서진이라.
그러고 보니 처음에 만났을 때도 한서진을 저렇게 친근하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
“둘이 무슨 사이냐?”
궁금증이 도져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받은 유세라가 요망하게 웃는다.
“이제 저한테 관심이 좀 가요?”
아이돌이라서 그런지 웃는 모습이 쓸데없이 예쁘긴 하다.
그래봤자 라노벨 히로인인 다른 부원들이랑 비슷한 수준이긴 하지만.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소꿉친구요.”
친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내 상상 이상으로 절친이었다.
탁.
유세라가 곤룡포를 입은 내 양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우리 서진이 어떻게 생각해요? 김덕성님?”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야······.”
말끝이 저절로 흐려진다.
한서진이라.
얼마 전, 여름 학교가 끝났을 때 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는 항상 차분하고 사무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그녀지만, 그건 내가 그녀의 상관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친구인 유세라에게는 고충을 털어놨을지도.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어떻게 답해야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서진 일이라니.
평소에 본인 마음을 잘 안 털어놓는 타입이라 그런지 괜히 신경 쓰인다.
[뭘 그걸 고민해. 파트너. 그냥 네가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답해. 거짓말하면 바로 눈치 챌 거야. 여자의 감은 의외로 무섭다구.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가 조언을 한다.
오랜만에 도움이 된 조언.
“그냥, 뭐. 나한테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 없으면 안 될 정도로.”
확실히 이제는 한서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녀만큼 유능하고 시키는 일을 전부 알아서 척척 잘 처리하는 보좌관은 없다.
“없으면 안 될 정도라, 알았어요.”
유세라가 상큼하게 웃는다.
아까와는 달리 뭔가 진심이 깃든 듯한 미소.
그녀가 내 옷매무새를 만지작대면서 말한다.
“자, 끝. 다 됐어요. 이제 나가면 돼요. 김덕성님.”
내가 살다살다 임금님이나 입는 곤룡포를 입게 될 줄이야.
내가 왕이 될 상도 아니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탈의실 문을 열고 나선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은.
“주인님이다! 주인님! 주인님. 에리링 한복 입었어, 어때?”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에리였다.
에리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잠깐, 색동저고리?
왜 한복을 입고 있냐?
이게 그 외국인에게 한복 입히기인가 뭔가 그거냐?
“빨래판. 여전히 새치기하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군. 날 봐라. 덕성. 나도······. 이번에는 한복을 입어 봤다. 어······. 어떠냐?”
뒤에서 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리자 남색 저고리를 입은 린의 모습이 보인다.
저고리 아래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풍만한 가슴이 눈에 띈다.
대체 얼마나 크면 펑퍼짐한 저고리에서도 거유가 티 나는 거지.
“마, 마음에 드나? 네,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붉힌다.
“후배 군! 나 예쁜 한복 입었어······. 여기 봐줘!”
옆에는 보라색 저고리를 입은 카스미 선배가 손을 흔들고 있다.
그녀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빛난다.
“주군, 나도······. 한복 입었어. 이, 이상하지는 않지?”
마코토가 소심한 목소리로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초록색 한복 아래, 린과 버금가는 크기의 거유가 흔들린다.
보기 민망한데.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다들 어색하기 짝이 없군요!”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꽃신을 신고 손에 전통 쥘부채를 든 올리비아가 한복을 입은 채 우아한 태도로 나타난다.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는 바로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요. 역시 그렇죠, 당신? 왕의 의복을 입은 당신한테 어울리는 유일한 여자는 프랑스의 고귀한 황녀인 저뿐이라고요!”
“아니, 보나파르트. 틀렸다. 덕성의 현모양처가 될 사람인 나야말로 가장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다! 그가 왕이라면 나는 왕비가 될 거다!”
“에리링,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어! 은하 제일 미모의 소유자인 에리링이야말로 한복이 최고로 잘 어울리는 귀여운 미소녀라고!”
올리비아의 말에 바로 반발하는 린과 에리.
라노벨 히로인들이 경복궁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고 다투는 광경이라니.
이런 건 원작에 당연히 없었다.
현실감이 없어서 현기증이 치민다.
“그럼 본인한테 물어봐야죠. 당신, 이 중에서 누가 제일 한복에 어울리나요? 뭐 보나 마나 당연히 당신의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겠지만요!”
척.
올리비아가 한복 저고리 위에 손을 올리면서 의기양양한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덕성. 나야말로 가장 동양적인 미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부디 나, 나를 선택해다오!”
옆에서는 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붉히고 있다.
“주인님. 은하 제일 미소녀 에리링한테는 안 어울리는 옷이 없어. 한복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역시 주인님의 1등 노예인 에리링이 제일 귀엽지?”
색동저고리를 입은 채 볼을 부풀리는 에리.
“후배 군, 나도, 나도 참가할래!”
“주군, 나도 봐줘······.”
마코토와 카스미 선배가 옆에 끼어든다.
다섯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누구를 선택할 건가요?!”””””
목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이 빌어먹을 선택 강요, 얼마 전 여름 축제 때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유카타였는데 지금은 한복이고, 그때는 도쿄였지만 지금은 서울이다.
서울까지 와서 이런 빌어먹을 라노벨 이벤트를 겪을 줄이야.
돌겠다.
주변을 둘러본다.
남자 한복을 입은 유지와 이시하라가 자기들끼리 경복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누구는 이 염병을 하고 있는데.
아주 살판났네, 살판났어.
머리가 지끈거리던 그때.
“다들 한복을 입으셨으니, 이제 경복궁 관람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한서진이 있었다.
하얀 저고리에 연한 분홍색 한복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궁궐이라는 배경과 어우러져 진짜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 같은 착각을 자아냈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제일 한복이 잘 어울리는 건 한서진이었다.
“에리링······. 완패했어······.”
그 모습을 본 에리가 입을 가린다.
“큿······. 아무리 시노자키류 비전 신부수업으로도 역시 한국인한테 한복으로는 이길 수 없는 건가······.”
뒤이어 입술을 깨무는 린.
“······으으으으으, 분해요! 이건 반칙이에요! 이, 이럴 수는 없어요!”
주먹을 쥐는 올리비아.
“서진 씨······. 너무 대단해······.”
“지이이이이······.”
감탄하는 카스미 선배와 그녀 뒤에 숨어 의성어를 소리 내는 마코토까지.
압도적인 한복 맵시를 자랑하는 한서진의 등장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까 선택 강요 이벤트는 완전히 사라졌다.
반응을 본 한서진의 얼굴에 드물게 물음표가 떠오른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무 일 없어. 서진아.”
그새 쪼르르 달려간 유세라가 한서진의 손을 덥석 잡는다.
“빨리 김덕성님이랑 일행분들한테 경복궁 안내해야지?”
“그래야지. 그럼 다들 전부 절 따라오십시오. 먼저 근정전부터 가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복을 입은 채 유세라와 함께 근정문을 넘었다.
본격적인 귀국 둘째날의 시작이었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근정문을 지나자 눈앞에 근정전이 보인다.
사극에서 자주 나왔던 경복궁의 정전이 지금 내 눈앞에 실물로 비치고 있다.
빙의 전에 몇 번 와본 기억이 있는 만큼, 딱히 새로울 건 없었다.
경복궁은 원래대로의 경복궁이었다.
“우와아아아······!”
에리가 탄성을 터뜨린다.
그녀의 주황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여기가 한국의 궁궐이군요······.”
올리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얘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던 프랑스 황녀였지?
프랑스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 풍경도 꽤 아름다웠는데.
무엇보다 프랑스에는 이런 빌어먹을 국뽕도 없었다.
“확실히 규모가 웅장하군. 일국의 중심이라 할 만해.”
옆에서 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역시 한국으로 오길 잘한 것 같아. 후배 군.”
“엄청 크다······!”
미소 짓는 카스미 선배와 마코토까지.
다들 즐거워 보여서 그건 약간 마음에 든다.
“주인님! 에리링, 여기서 사진 찍고 싶어졌어. 에리링이랑 같이 사진 찍자!”
에리가 색동저고리 소매자락을 팔랑팔랑거리면서 내게 말한다.
“빨래판, 누구 마음대로 그와 사진을 찍겠다는 거지? 덕성. 저 빨래판 말고 나, 나와 기념사진을 찍어다오······.”
옆에 있던 린이 에리를 비난하면서 한 발짝 나선다.
그녀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이봐요, 지금 누구 마음대로 그와 사진을 찍겠다는 건가요? 그의 전속 시녀인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허락 없이는 그의 털끝 하나도 못 건드린다고요! 이이이이익!!”
올리비아가 얼굴을 붉힌다.
그 모습을 본 에리가 눈을 가늘게 뜬다.
“허락 없이는? 황녀님. 역시 주인님을 좋······.”
“아니라고요! 누누누누가 저저저저런 우주 제일 바보한테 과, 과과관심이 있다는 건가요?! 언어도단이라고요! 이, 이이이건 어디까지나 저, 전속 시녀로서의 의무니까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얼굴을 붉힌다.
이러다가는 근정전에서 오늘 하루를 다 보낼 기세다.
어쩔 수 없다.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나선다.
“헛소리 좀 그만하고, 다 같이 찍으면 되잖아. 기념사진.”
내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볼을 부풀리는 에리, 입술을 깨무는 린, 얼굴을 붉히는 올리비아가 보인다.
“흥, 어쩔 수 없죠. 이번 한 번만 자비롭게 당신 말에 따라주죠. 감사하게 생각하라고요. 아시겠나요?”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린다.
그녀가 걸어와서 내 오른쪽 옆에 선다.
“에리링. 단둘이 못 찍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주인님이랑 기념사진 찍을래!”
뒤이어 에리가 왼쪽 옆에 서고.
“······나는 미래의 남편인 네 말에 따르겠다. 덕성.”
린이 입술을 깨물며 내 뒤에 선다.
“나도, 나도 후배 군이랑 사진 찍을래!”
“나도 주군과 함께······!”
카스미 선배와 마코토가 달려온다.
옆에서 경복궁을 관광하고 있던 유지와 이시하라가 합류하는 걸 마지막으로 근정전 건물 앞에 부활동 멤버 전원이 모였다.
“자, 그럼 사진 찍도록 하겠습니다.”
어느샌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한서진이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셔터를 누르려고 할 때.
“그럼 안 되지. 서진아.”
덥석.
유세라가 한서진의 손을 잡는다.
“너랑 나도 사진, 같이 찍어야지.”
유세라가 웃는다.
“내가······? 하지만 나는 자격이······.”
유세라의 말에 한서진이 당황한다.
그녀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떠오른다.
“어허. 그럼 김덕성님한테 물어보자.”
갑자기 나에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세라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김덕성님. 서진이랑 저도 같이 사진 찍어도 되죠?”
웃는 얼굴로 묻는 유세라.
그러고 보니 베르사유 궁전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한서진만 빠져 있기는 했다.
괜히 마음이 찝찝하다.
[파트너. 설마 허락 안 해줄 건 아니지?]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내게 말한다.
어이가 없다.
‘당연히 해야지. 넌 날 뭘로 보고 그러냐?’
[소인배?]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답변.
내가 말을 말지.
흑태자랑 대화 자체가 손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래.”
고작 사진 정도야.
못 해줄 것도 없다.
‘난 소인배가 아니니까.’
[상처받았어? 파트너?]‘시끄러워.’
흑태자의 말을 무시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그건······.”
“허락받았으니까 같이 찍자. 우리도.”
한서진이 뭐라 하기 전에 유세라가 그녀의 팔을 잡아끈다.
“김치.”
대열에 합류한 유세라가 브이자를 그린다.
찰칵.
타이머를 눌러놓은 모양인지 사진 촬영음이 카메라에서 울린다.
그렇게 몇 번 사진을 찍고 나서야, 기념사진 촬영이 끝났다.
“읏······.”
사진 촬영이 끝나자 한서진의 얼굴이 드물게 붉어진다.
어째 한국에 와서 표정이 다양해진 모습이다.
“자, 그럼 다음 코스로!”
유세라가 관광 가이드처럼 앞장선다.
*
그 이후로는 별거 없었다.
경복궁 안에 뭔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두려워한 내가 부끄러워할 정도.
“여기는 강녕전이에요. 강녕전은 조선시대 임금님의 침소로 사용된 공간으로······.”
유세라는 생각보다 관광 가이드 역할을 잘했다.
한류 아이돌이 고작 관광 가이드라니.
어이가 없다.
그렇게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긴장이 풀린 상태로 사진도 찍고 그럭저럭 관광을 거의 끝내갈 때쯤.
“자, 그럼 이제 김장 체험을 시작할게요.”
유세라의 입에서 끔찍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뭐?
“김장 체험? 설마 여기서?”
김장 체험이라는 말을 들으니 잊고 있었던 역겨움이 다시 치솟는다.
경복궁에서 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