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98)
폭주하고 있는 건 온라인뿐만이 아니었다.
오프라인.
현실의 한국 역시 김덕성과 일행들의 김장 체험 생방송에 미쳐가고 있었다.
[성웅 김덕성 재단 사랑 나눔의 김장 행사]방금까지 비어 있던 광화문광장에 현수막이 나부끼고 천막이 설치된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김덕성이 나오는 김장 체험 방송이 송출된다.
그 밑으로 시뻘건 김치 양념과 절인 배추가 놓인 탁자 근처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김치를 담그고 있다.
넓은 광화문광장을 꽉 메울 정도로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김장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김덕성과 함께 김치를 버무리고 있었다.
서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대구, 부산, 인천, 울산 등등
지방 광역시와 대도시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때아닌 여름의 대규모 김장 행사였다.
심지어 청와대 상춘재 앞마당에서도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여 김장 체험 생중계를 보면서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렇게 오랜만에 김치를 담그니 참 좋군요.”
유세라.
성웅 김덕성 재단 이사장인 그녀의 지시로 김덕성 김장 체험 방송과 동시에 재단 주최 나눔의 김장 행사를 전국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김치는 사회 소외 계층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김덕성이 봤다면 뒷목을 잡고 졸도할 상황.
펄럭.
광화문광장의 태극기가 휘날린다.
*
건물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서울.
옥외 광고판부터 버스정류장, 버스 옆면과 뒷면, 도시철도역, 도시철도 전동차 래핑까지.
온통 김덕성으로 뒤덮인 대도시의 중심에 크림슨색 사이드 테일을 휘날리는 소녀가 있었다.
뉴 월드 리그, 13사도의 일좌를 차지하는 빌런 무라마사였다.
“제정신이 아닌 나라로군.”
얼굴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착용한 소녀, 무라마사의 빨간 눈동자가 옥외 전광판에 나오는 김덕성 김장 체험 방송에 꽂힌다.
아무리 봐도 이 나라는 제정신이 아니다.
국민부터 국가 수뇌부까지 전부 미쳐 있다.
고작 생도 따위에 이토록 열광하다니.
무라마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고작 이런 극동의 소국 따위가 마스터의 발목을 붙잡다니······.”
무라마사 옆에 서 있던 거구의 남자, 만일을 대비해 그녀와 함께 한국에 파견된 또 다른 13사도인 맨헌터가 혀를 찬다.
한국.
마스터인 메사이어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몰랐을 약소국.
그런 나라가 리그의, 메사이어의 위대한 플랜을 방해하다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맨헌터.”
무라마사가 짧게 말한다.
“이제 곧 마스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말이야.”
“알겠어. 미스 무라마사.”
맨헌터의 대답을 들은 무라마사의 빨간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서울에 리그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김장에는 수육이 필수
마침내 김장이 끝났다.
내 앞에 놓인 대야에 내가 만든 빨간 김치 다섯 포기가 보인다.
그 고생을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맛있어 보인다.
[휴, 파트너. 고생했어.]솔직히 김장보다는 그걸 방송으로 송출하는 대국민 수치 플레이가 더 힘들었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지 벌써 겁이 난다.
역시 한국에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면 졸업할 때까지, 아니 원래 세상에 돌아갈 때까지 절대로 이 세상의 한국에는 안 올 생각이다.
아무튼 김장은 다 끝났다.
맛이나 좀 볼까.
김치를 한 줄기 쭉 찢어 입 안에 넣는다. 400년 정통 양념 비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맛은 있다.
김치를 먹으니까 새삼스럽게 원래 세상 생각이 또 난다.
이렇게 김장한 날이면 수육을 삶아서 갓 담근 김장 김치랑 같이 먹었었다. 그게 참 별미였는데.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로는 김치를 사서 먹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도 없어졌다.
괜히 입맛이 쓰다.
‘수육은 없나······.’
애써 부정적인 추억을 지워낸다.
아무튼, 김장에는 수육이 필수다.
[수육? 삶은 돼지고기 말하는 거지?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가 굳이 안 해도 될 질문을 하던 그때.
“영차!”
김장 체험에서 한발 빠져 있던 유세라가 한서진과 함께 커다란 상을 가져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육이 수북이 쌓인 밥상이었다.
“저랑 서진이가 수육 삶아왔어요! 김덕성님! 맛있게 드세요!”
유세라가 생글생글 웃는다.
그래, 안 그래도 대국민 수치 플레이 중인데 수육도 안 주면 안 되지.
“우와아······.”
에리가 주황색 눈동자를 반짝인다.
“맛있어 보이는군······.”
옆에 있던 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은 점심시간.
돌도 씹어먹는다는 소년소녀, 그것도 칼로리를 많이 소모하는 영웅 후보생들을 모아놓고 밥도 안 주고 김장일만 시켰으니 슬슬 배가 고플 때가 되긴 했다.
“역시 김장에는 수육이 빠지면 안 되죠! 후후.”
올리비아가 입을 가리면서 웃는다.
‘아까 김치 종류 읊는 것도 그렇고, 저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거지?’
이제는 어이없는 걸 넘어서 신기하기까지 하다.
[파트너. 저게 다 파트너를 위해서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직접 한국 문화를 배운 거라고. 감사히 생각해. 알겠어?]흑태자가 머릿속에서 팔불출 헛소리를 해댄다.
흑태자는 다른 건 다 좋은데 자기 동생 이야기만 나오면 급발진해서 문제다.
짝.
유세라가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한다.
그녀의 박수 소리를 들은 부원들의 시선이 유세라에게 꽂힌다.
“이제 김장 끝. 김치를 맛볼 시간이에요! 수육을 김치에 싸서 드시면 더욱 맛있답니다!”
연예인 출신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진행자나 가이드 역할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는 모양.
괜히 귀찮게 이거저거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다.
“수육을 김치에······. 과연, 한국에는 그런 문화가 있는 모양이로군.”
“에리링, 처음 알았어. 김치랑 수육이랑 같이 먹는 거였구나.”
“이게 주군의 나라의 전통 음식······.”
“후배 군이 즐겨 먹는 요리······.”
린, 에리, 마코토, 카스미 선배의 눈빛이 수육과 직접 담근 김치로 향한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코웃음을 흘린다.
“하여간, 당신들의 무식함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군요!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주변에 머무르려 하다니! 전속 시녀로서 모조리 0점! 전부 탈락! 탈락이에요!”
척.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선언하더니, 김치를 젓가락으로 부욱하고 찢어서 수육에 돌돌 말아 내 입술 앞으로 건넨다.
“자, 아 하세요!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손수 담근 김치라고요! 한 조각도 남김 없이 전부 먹으세요! 아시겠나요? 흥!”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린다.
또 시작이네.
한숨을 쉬면서 김치를 받아먹으려고 한 그 순간.
“잠깐. 새치기는 반칙이다. 보나파르트.”
옆에서 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불쑥.
린이 젓가락으로 김치를 들어 내 앞에 들이댄다.
“이, 이건 내가 담근 김치다······. 마,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다······. 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덕성. 꼭 먹어다오!”
소심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는 린.
린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져 있다.
동시에 이렇게 먹으라고 들이밀면 곤란한데.
뭐라 하려던 그때.
“흥. 젖소. 네 어설픈 요리로 주인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어? 주인님. 에리링이 손수 담근 김치야! 에리링, 요리에서만큼은 최고로 자신 있으니까! 맛있게 먹어줘! 히히.”
에리가 웃으면서 본인의 김치를 들이민다.
“큿······. 빨래판······.”
에리의 말에 린이 입술을 깨물던 그때.
“후배 군! 나, 김치 열심히 담갔으니! 내 김치도 맛봐줘!”
“주군, 내 것도······!!”
옆에서 카스미 선배와 마코토가 마찬가지로 김치를 들이댄다.
내 눈앞에 들이민 김치와 수육만 다섯 조각.
차라리 벚꽃놀이 때 도시락 배틀이 낫지.
김치 가지고 요리 배틀 하는 건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정신이 혼미하다.
“당신······.”
“······덕성.”
“주인님!”
“후배 군.”
“······주군······.”
올리비아, 린, 에리, 카스미 선배, 마코토.
다섯 미소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라노벨 세상에 떨어진 지도 이제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
쟤네가 원하는 게 뭔지는 눈 감고도 알 수 있다.
누구 김치가 제일 맛있는지 선택해달라는 의사 표현이겠지.
“누구 김치가 제일 맛있는지 선택하세요! 물론 당연히 제 것이겠지만요!”
올리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이럴 줄 알았다.
“······덕성. 나, 나는 별로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너를 향한 마음이라면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 너라면 미래의 현모양처인 내 애정이 깃든 시노자키류 비전 김치의 진가를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다.”
린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린다.
시노자키류 비전에 이제 김치도 포함되냐?
어이가 없네.
“주인님. 요리에서만큼은 에리링 질 수 없어. 주인님이 임간 학교에서 에리링의 된장국을 선택해준 것처럼, 이번에도 에리링이 만든 김치를 선택해줄 거지? 에리링, 주인님을 믿어. 왜냐하면 주인님은 상냥하니까.”
에리가 볼을 부풀린다.
“후배 군, 나는, 나는 이번 만큼은 후배 군한테 선택받고 싶어. 다른 후배들한테 지지 않아! 그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내 김치를 선택해줘!”
카스미 선배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붉힌다.
“주군······. 이번 만큼은 날 선택해 줄거지? 지이이이이······.”
의성어를 입으로 소리 내는 마코토에다.
[파트너, 당연히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손수 만든 김치를 선택해주겠지?]머릿속으로 올리비아 선택을 종용하는 흑태자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다.
여기까지 와서 시식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한숨을 쉬면서 차례대로 김치를 맛본다.
우물우물.
다섯 히로인이 담근 각양각색의 김치가 차례대로 뱃속으로 사라진다.
다른 요소 다 배제하고 순수하게 맛만 따지면 에리가 만든 김치가 제일 맛있다.
설정집에 폼으로 요리 잘한다고 적혀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올리비아의 김치는 무난하게 괜찮았고, 카스미 선배와 마코토의 김치는 나쁘지는 않았다.
린의 김치는,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양념이 꼼꼼하게 안 발라져 있어서 그런지 뭔가 맛이 미묘했다.
“·········.”
다섯 미소녀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니, 그녀들뿐만이 아니다.
유세라와 한서진, 김치 명인 할머니, 그리고 촬영을 담당하고 있는 김 PD와 스태프까지.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김치와 수육을 먹어 치우느라 여념이 없는 유지와 이시하라를 빼면.
살짝 억울하다.
주인공은 한국에 와서 꿀만 빨고 있는데, 나는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엿 같은 라노벨 세상 탈출 마렵네.
[파트너. 결정의 시간이야. 신중하게 생각해.]쓸데없이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흑태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만큼은 흑태자의 조언이 맞다.
지금 이 빌어먹을 김치 캣파이트가 전국 팔도 안방에 생중계 되고 있을 테니,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답을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내가 담근 김치를 수육에 싸서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역시 이 맛이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꼭 김치를 직접 담아서 어머니께 수육과 함께 드려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다섯 히로인을 향해 늘어놓았다.
*
비슷한 시각.
슈오우 영웅 학원, 이사장실.
휑할 정도로 넓은 사무실 내부에는 두 여자가 있었다.
접대용 소파에 다리를 꼰 자세로 앉은 검은 고스로리 드레스를 입은 백발적안 미소녀, 요시자키 세이라와 그녀 옆자리에 앉은 은발 은안의 늘씬한 미소녀,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였다.
두 여자의 시선은 지금 이사장실 벽면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에 꽂혀 있었다.
스크린에는 일본이 아닌 한국 공중파 방송이 비치고 있었다.
김장을 하며 화기애애하게 하하호호 웃는 김덕성과 다섯 소녀의 모습이 세이라의 시야에 들어온다.
“으으으으으······.”
부들부들.
세이라의 손이 떨린다.
“도저히 못 참겠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이 몸이 직접 한국으로 가야겠도다.”
벌떡.
세이라가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마음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반반 뒤섞여 있었다.
나도 한국에서 그와 함께 한국 문화를 즐기고 싶다.
그런 생각이 세이라의 마음 한쪽 구석에서 샘솟았다.
원래라면 애써 스스로의 마음을 억눌렀겠지만, 김덕성을 잃을 뻔한 여름 학교 이후로는 감정 통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세이라였다.
“······안 됩니다. 이사장님.”
세이라의 말을 단칼에 잘라내는 아리스.
하지만 세이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미약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이 몸보다 아-쨩이 더 한국에 가고 싶은 것 같거늘.”
세이라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아리스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건······. 아닙니다. 김덕성 군이 한국에 간 이유는 어디까지나 부활동······. 학생회장인 제가 간섭할 명분이 없습니다.”
아리스가 학생회장 완장을 만지작대며 입술을 우물댄다.
슈오우 학원의 학생회장으로서, 아리스에게는 생도들의 자율적인 부활동을 보장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호오. 그 말은 아-쨩은 명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떠나겠다는 말이냐?”
“언니는! 그, 그게 무신 말이고! 그런 거 아니데이! 흡!”
정곡을 찔린 아리스의 입에서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아리스가 본인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리스가 손부채를 부치면서 말한다.
“아무튼 아닙니다······.”
“후후. 우리 아-쨩은 사투리가 귀여워서 놀리는 보람이 있다니까.”
촤르륵.
세이라가 레이스 부채를 펼치며 웃는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가 말한다.
“너무합니다. 이사장님.”
“어허, 아-쨩. 이사장이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야지.”
“······세이라 언니······.”
붉어진 얼굴로 답하는 아리스를 보면서 세이라가 흡족하게 웃는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스크린 속 김덕성에게 고정된다.
“한국이라······.”
세이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이번에는 못 갔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하고 싶다.
세이라의 머릿속에 한국의 길거리를 김덕성과 단둘이 손잡고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