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99)
세이라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가 한숨을 쉰다.
김덕성이 김장 체험을 하는 동안, 학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
내 선택은.
“선택이고 자시고, 너네가 만든 것보다 내가 만든 김치가 훨씬 맛있어.”
바로 나였다.
내 말을 들은 다섯 미소녀의 표정이 멍해진다.
설마 내가 아무도 안 고르고 날 선택할 줄은 몰랐겠지.
[파트너, 진심이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묻는다.
물론 진심이다.
내 입맛에는 내가 담근 김치가 제일 맛있었거든.
나는 뻔뻔한 얼굴로 내가 담근 김치를 수육과 함께 다시 먹었다.
역시 맛있네.
“못 믿겠으면 너희가 내 김치 먹어보던가.”
그녀들 앞으로 내가 만든 김치가 담긴 양은 대접을 스윽 하고 밀어준다.
다섯 히로인이 젓가락으로 내 김치를 맛본다.
“······인정하겠다. 네 김치가 가장 맛있군. 덕성.”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린.
“진짜 맛있는데, 주인님도 역시 한국인이었구나······!”
그 다음으로 에리가 눈을 반짝인다.
거기서 한국인이 왜 들어가.
“뭐······. 그럭저럭······. 나쁘진 않네요. 흥.”
뒤이어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린다.
“주군, 김치 엄청 잘 담가······.”
“후배 군, 요리조리 요령 부리면서 빠져나가는 데 선수야. 완전 능구렁이 후배 군······.”
마코토가 놀라고, 카스미 선배가 이쪽을 찌릿 바라본다.
능구렁이는 무슨.
아무튼, 그렇게 내 의도대로 김치 캣파이트가 흐지부지 엔딩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던 그때.
삐이이이이이이이이!
사이렌 소리와 흡사한 벨 소리가 품속의 스마트폰에서 울린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부원들과 촬영 스태프 전부의 휴대폰에서 같은 벨 소리가 울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재난문자 알림음이다.
갑자기 재난문자라니 뭐지?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내 시야에 들어온 문자 내용을.
[위급재난문자] [한국 헌터 협회] [08월 11일 13:54분경 서울특별시 전역에 원인미상 대규모 게이트 동시다발적 발생과 빌런 의심 거동수상자 출현. 이계종과 빌런의 위협으로부터 몸 보호하며 일반인의 경우 지정된 쉘터로 즉시 이동, 헌터의 경우 지정된 예비 소집 장소로 즉시 집합.]나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빌런 출현? 일본도 아니고 한국에서?
대체 어떤 놈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포털 사이트를 켰다.
위급재난문자가 날아올 정도면 빌런을 찍은 사진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포토) 서울에 출현한 빌런 의심 거동수상자? 그 정체는?]예상대로 기사가 하나 있다.
클릭해서 기사 사진을 확인한다.
사진에는 얼굴 반절을 가리는 빨간 오니 가면을 쓴 크림슨색 사이드 테일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내 얼굴이 굳는다.
형체가 겨우 구분될 정도로 흐릿한 사진이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에는.
‘무라마사······.’
그녀의 옛 이름은 쿠로사와 하루.
원작 12권의 타이틀 히로인이자, 주인공 쿠로사와 유지의 여동생이다.
개판이 따로 없네
10년 전.
메사이어가 검성을 살해하고 쿠로사와 가문을 멸족시켰을 때.
그 참사에서 살아남은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는 쿠로사와 유지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유지 본인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라노벨답게 사실은 아니다.
쿠로사와 하루.
유지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검성의 딸인 그녀 역시 그날의 참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문제는 그녀가 메사이어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것.
흔한 라노벨 클리셰처럼, 그녀는 그날 이후 리그의 하수인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설정.
정확히는 그녀의 신체가 초월무장 요도 무라마사에 깃든 정령 ‘무라마사’의 소체로 이용당하고 있다.
즉, 지금 쿠로사와 하루의 신체를 차지한 건 하루 본인이 아니라 요도의 정령 무라마사.
진짜 쿠로사와 하루의 영혼은 심상 세계에 갇혀 있다.
이건 전부 원작 12권에서 유지와의 전투 직전 무라마사가 오니 가면을 스스로 벗으면서 밝혀지는 사실.
쿠로사와 하루가 13사도 ‘무라마사’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여동생 얼굴을 본 유지는 라노벨 주인공답게 절규하며 달려들었다 무라마사와의 1차전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힌 2차전에서는 실체화한 쿠사나기가 정령 무라마사를 여동생의 몸에서 분리한 순간, 두 사람의 의식이 서로 연결되고 유지가 심상 세계에 갇혀 있던 진짜 쿠로사와 하루의 영혼을 ‘구원’하며 12권이 마무리된다.
미소녀 빌런은 사연이 있으며, 무조건 구원 이후 세탁기를 돌려 아군화되는 라이트 노벨 세상의 상식에 충실하기 짝이 없는 전개.
물론 쿠로사와 하루는 유지의 친여동생이었기에 원작의 주인공 하렘 멤버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라노벨 주인공 여동생 캐릭터가 흔히 그렇듯, 여동생 포지션을 교묘하게 활용해서 주인공에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남매라기에는 조금 과한 애정 표현을 하면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브라콤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왜 하필 지금이냐는 거다.
무라마사를 쿠로사와 하루의 몸에서 분리하기 위해서는 실체화된 정령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진명해방을 각성하기는 했지만 불완전했기에 아직 흑태자를 실체화할 수 없다.
지금의 쿠로사와 유지는 진명해방을 각성하지 못했다.
다른 S랭크인 올리비아와 린은 초월무장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정령도 없다.
이사장 세이라를 부른다고 해도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쿠로사와 하루를 지금 이대로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
정사가 전부 내 손에서 박살난 이상 원작처럼 12권 체육대회 시점에 무라마사가 나타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지금이 쿠로사와 하루를 아군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메사이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모든 히로인과 조력자 캐릭터를 모아야 하고, 거기에는 쿠로사와 하루 또한 포함되니까.
[파트너? 대체 왜 그렇게 심각한 거야?]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입술을 깨문다.
대체 왜 지금 리그가 한국을 습격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유 있게 그런 걸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쿠로사와 하루.
그녀를 아군화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지만 유지가 각성하지 못한 지금, 쿠로사와 하루를 구원할 가능성이라도 있는 건, 아니 무라마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정령의 힘을 막는 데는 같은 정령이 가장 효율적이니까.
염병, 진짜 돌아버리겠네.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던 그때.
벨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울린다.
[요시자키 세이라]전화 발신인은 요시자키 세이라.
전화를 받는다.
[꼬마야! 서울 소식을 듣고 연락했다. 괜찮으냐? 리그의 빌런들이 서울을 침공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흘러나오는 다급한 세이라의 목소리.
[너만 허락한다면 이 몸이 지금 당장이라도 도우러 갈 수 있······.]“오시죠.”
세이라의 말허리를 자른다.
시노자키 이치로도 있지만, 일본 영웅 협회장이라는 그의 직위 때문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요시자키 세이라는 지금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최강 전력.
특히나 지금 같은 긴급 상황에서는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하다.
[정말이냐?]“네. 지금 당장 출발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사장님.”
[알겠다. 빠르게 출발하겠다. 꼬마야, 조금만 기다려 다오.]뚝.
전화가 끊긴다.
통화에서야 조금이라고 했지만, 도쿄에서 서울까지 물리적 거리가 상당한 만큼 시간 단위가 걸릴 게 분명하다.
그동안 내가 버텨야 한다.
무라마사를 상대로.
내 몸이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이 엿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다.
이제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
“이세계 재난 경보 발령으로 촬영 취소됐습니다. 현장에 있는 일반인 인원들은 즉시 광화문광장 쉘터로 대피해주세요!”
고개를 드니 촬영 스태프와 김치 명인 할머니가 빠르게 지정된 대피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김덕성님. 힘내세요!”
작게 파이팅을 외치던 유세라를 마지막으로 썰물처럼 빠진 경회루.
남은 건 먹다 남은 김치와 수육, 그리고 나를 포함한 부원들과 한서진뿐이었다.
“재난문자는 다들 받으셨습니까?”
한서진이 일본어로 말한다.
“응. 우리 모두 받았어. 한서진 씨.”
그녀의 말에 대답한 건 카스미 선배.
카스미 선배가 일본어로 된 재난문자를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본 한서진이 입술을 우물거린다.
그녀가 천천히 말한다.
“지금의 서울은 위기 상황에 놓였습니다. 국정원 첩보에 따르면 서울에 백 개가 넘는 추정 제타 랭크 이상의 게이트가 열렸으며 거기에다 두 명의 S랭크 빌런이 다수의 빌런들을 데리고 침입한 상황이며, 우리는 부끄럽게도 그들의 소재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정 제타 랭크 이상 게이트 백 개?
이건 리그 놈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놈들이 게이트 생성 장치를 사용해서 서울 전역에 게이트를 열어제낀 것이다.
아주 서울을 부수려고 작정을 했네.
거기다 두 명의 S랭크 빌런이라니.
무라마사 말고 S랭크 사도 한 명이 더 투입된 게 분명하다.
“국내에 있는 주한미군 소속 현역 영웅들과 한국 헌터 협회를 포함한 국내 헌터 길드들이 게이트 공략에 나서고 있지만, 사태 수습에는 역부족입니다. 한국을 국빈 방문해주신 김덕성님의 친우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도와달라는 거죠? 한서진 씨.”
한서진의 말을 자른 건 에리.
그녀의 말을 들은 한서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예, 염치없지만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건 한국에 주둔 중인 주한미군 소속 영웅 전력과 한국 국적의 유일한 영웅 후보생인 나뿐.
여기 있는 부원들은 어디까지나 손님, 그러니까 외국인 관광객.
한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서진이 이렇게 숙이며 협조를 구하는 것이리라.
애국심 같은 건 솔직히 별로 없지만, 저 모습을 보니 조금 짠하긴 하다.
내가 이렇게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도와줘야지. 주인님의 나라인걸! 에리링은 무조건 도울 거야!”
에리가 볼을 부풀린다.
뒤이어 린이 한 발짝 나선다.
“나도, 나도 돕겠다. 장차 한국의 며느리가 될 여자로서, 서울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다! 덕성의 나라는 내 손으로 구하겠다!”
린이 입술을 깨물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한서진 씨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섰을 거예요. 왜냐하면······. 여기는 후배 군의 나라인걸요.”
카스미 선배가 그녀답지 않게 당찬 목소리로 말한다.
“주군을 돕는 일이라면 뭐든 좋아! 맡겨줘!”
뒤이어 나선 마코토가 주먹을 말아쥐면서 소리친다.
“김의 친구로서. 아니, 사람이라면 타인의 불행과 빌런의 악행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도와주겠어. 한서진 씨.”
마코토 다음으로 나선 건 유지.
그가 주인공답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와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형님의 일이라면 맡겨달라고!”
이시하라가 옆에 따라붙는다.
마지막으로.
“한서진 씨.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된다고요, 왜냐하면······. 저는 고귀한 프랑스의 공주이자 위대한 흑태자 오라버니의 후계자. 오라버니는 영웅은 절대 불의 앞에서 등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돕겠어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평소와는 달리 결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캬, 역시 내 동생이야. 파트너. 어때. 감동 좀 받았냐?]어김없이 날아드는 흑태자의 대사.
내 이럴 줄 알았다.
여기가 만약 국산 헌터물 웹소설 세상이었다면, 작전 실행 전에 앞서 보상 분배 문제로 냉혹한 이해득실을 따지며 한 줌의 이득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살벌한 정치질을 해야 했겠지.
안 그래도 일분일초가 중요한 시점에서 비협조적이고 이기적인 놈들을 상대로 설득하거나 힘을 통해 강제로 찍어 눌러야 했겠지.
지금처럼 무지성 신뢰를 통한 자원봉사는 갑질과 사이다를 추구하는 국산 웹소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오직 쓸데없이 상냥한 라노벨 세상이기에, 이성보다 감성과 신뢰가 앞서는 감정 과잉 세상이라서 가능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호구 고구마 전개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그 빌어먹을 상냥함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숙인다.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한서진 씨. 이건 영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니까요.”
유지가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웃는다.
“맞아요! 당연한 일에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한다.
상냥한 세상다운 훈훈한 모습.
“알겠습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그때.
파츠츠츠츳!
한서진의 손목에 찬 헌터 위치가 스파크를 일으킨다.
번쩍.
헌터 워치에서 섬광이 터지며 홀로그램 영상을 띄운다.
“뭐지?”
뭔가 불길하다.
모두의 시선이 한서진의 헌터 워치를 향한다.
“저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원인을 알아보겠······.”
한서진이 드물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 혼잣말에 답하려던 그때.
[그럴 필요 없다.]홀로그램 영상에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크림슨색 사이드 테일에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빨간 오니 가면을 쓴 소녀.
[나는 무라마사.]무라마사였다.
[마스터의 대행자로서, 위대한 마스터의 이름을 빌려 너희들에게 고한다.]무라마사의 음성이 경회루에 울린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모두 이 도시와 함께 얌전히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여라.]씨익.
무라마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스윽.
그녀가 빨간 오니 가면을 벗는다.
붉은 눈동자 아래,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쿠로사와 하루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염병.
이거 일부러 벗은 거다.
100% 고의다.
원작 12권처럼 하루의 맨얼굴을 이용해 유지를 도발, 유인해서 죽이려는 무라마사의 얕은 수작이다.
“······말도 안 돼, 설마······. 설마······. 하루? 진짜 하루야?”
문제는 라노벨 세상답게, 우리 호구 주인공에게 그 얕은 수작이 너무나 잘 먹힌다는 것.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굳건한 의지를 가진 유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의 입에서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그게 너희가 우리의 대업을 방해한 대가이자, 우리의 위대한 마스터께서 베푸는 마지막 자비다.]뚝.
홀로그램 영상이 꺼진다.
“하루······!!”
유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친다.
애니메이션에서 무라마사의 맨얼굴을 첫 대면 했을 때처럼 멘붕하는 표정으로 절규하는 유지.
모처럼 훈훈했던 분위기가 산산조각난 건 덤이다.
아, 진짜.
개판이 따로 없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