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06)
동기화가 끝없이 중첩된다.
지이이이잉.
머리가 울린다.
오랜만에 두통이 치솟는다.
흑태자 얘 대체 지금 무슨 짓을······.
갑작스러운 두통에 내가 뭐라 하려던 그때.
[어때, 느껴져?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느꼈다.
내 기감이 듀랜달과 완전히 동기화되는 순간을.
지이이이이이잉!
수많은 감각 정보가 오감을 타고 두뇌에 전달된다.
기감이 끝없이 확장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흑태자가 보던 세상의 풍경.
나는 이제야 완전한 일체화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된 기분.
무협 소설에서 깨달음을 묘사하는 것만큼 막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자, 이제 내 이름, 아니지. 이명을 불러.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정령의 이름을 부르는 건, 첫 실체화에서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식.
그 염병할 쿠사나기를 진히로인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 놈이 억지로 쑤셔 넣은 등신 같은 설정이다.
하, 누구는 여자 정령을 불러서 알콩달콩하는데 나는 왜 남자 정령을 불러야 하는지.
아주 기분이 뭐같다.
물론 쿠사나기가 좋다는 건 아니다. 다른 히로인들이랑 다르게 걔는 진심으로 혐오스럽다.
일단 그 어린 외형부터가 도저히 내 취향이 아니고, 아예 남자랑 구분도 잘 안 되는 수준의 절벽 가슴은 진짜 생각하기조차 싫다.
인기투표 1위도 사실상 어부지리인데다 아직도 생각만 하면 빡치는 원작 엔딩의 원흉이 쿠사나기와 그녀의 팬덤인 걸 생각해보면 내가 쿠사나기를 좋아할 일은 세상이 뒤집혀도 없을 거다.
인기투표 그거 부정선거야, 부정선거.
그런 년은 줘도 안 한다.
그냥 유지랑 쿠사나기랑 둘이서 순애나 실컷 찍으라고 해라.
아무튼 모처럼 도달한 실체화의 단계.
게다가 실체화를 통해 하루를 구해낸다면 세이라에게 굳이 빚질 필요가 없어진다.
역겹고 게이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불러야지.
“흑태자.”
내 말이 끝난 순간.
우우우우우웅!
검은 칼날이 떨린다.
그와 함께 허공에 검은 마력이 피어올라 인간의 형상을 갖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투구를 쓴, 그림으로 그린 듯한 기사.
흑태자였다.
펄럭.
그의 등 뒤에 걸친 검붉은 망토가 나부낀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위엄 넘치는 흑기사의 모습을 한 흑태자가 나타나자마자 내뱉은 대사는.
“흐음, 하아······. 이 바깥세상의 청명한 공기.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 알아? 파트너? 흑태자, 아니 흑기사 님이 드디어 지상에 강림했다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영웅의 재림!”
뭐?
“어때? 반했지? 그렇지? 파트너? 아무렴! 반하지 않을 리가 없지! 이 몸의 멋진 자태에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 안타깝지만 난 남자의 관심 따위는 사절이야! 아무리 파트너라도 그건 안 된다고! 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경박하기 짝이 없는 웃음과 자뻑이었다.
하, 머리 아파.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누가 라노벨 아니랄까 봐 대사 수준 봐라.
이거 괜히 실체화한 거 아니지?
아가씨는 좀 더 맞아야 해
“쪽팔리게.”
정말 쪽팔리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모습이다.
“쪽팔리기는, 파트너. 역시 츤데레라니까. 솔직히 말해. 멋있다고.”
흑태자가 경박한 목소리로 말한다.
멋있어? 츤데레?
속이 니글거린다.
하긴 외양만 보면 일본 서브컬쳐 오타쿠적 관점에서는 잘 빠진 디자인이기는 하다.
원작에서도 흑태자 디자인은 멋있다는 평이 많았으니까.
게다가 원작에서는 올리비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묵직하고 과묵한 캐릭터라서 더욱 그렇다.
애니메이션에서도 흑태자는 정성 들인 3D 모델링을 통해 원작 삽화의 느낌을 재현했고.
덕분에 중2병 오타쿠들이 흑태자를 좋아하기도 했었다.
나는 아니지만.
남캐를 좋아하다니, 그건 너무 게이 같잖아.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유지니, 흑태자니 하는 시커먼 남자 놈들이랑만 얽혀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나는 게이가 아니고, 여자를 좋아하는 정상적인 이성애자며 브로맨스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누가 자꾸 엮는지 모르겠는데 만약 이게 웹소설이라면 내가 직접 작가에게 5700자 쪽지를 보냈을 거다. 인류애 드리프트 하지 말라고.
“캬하하하하하하! 이 흑태자, 아니 흑기사님이 나타난 이상 무라마사, 넌 이미 죽은 목숨이란 말씀!”
척.
실체화된 흑태자가 무라마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무라마사의 표정이 사색이 된다.
“어, 어떻게 실체화를······.”
“그건 알 필요 없고, 파트너. 알지? 쿠로사와 군한테 장담한 대로 여동생 아가씨를 무조건 구하라고.”
흑태자의 바이저에 붉은빛이 반짝인다.
척.
흑태자가 손을 올리자 무라마사와 나 사이에 이어진 반투명한 붉은 실이 떠오른다.
마인드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이어진 그녀와 나 사이의 의식 연결선이다.
정신계 스킬인 만큼, 원래라면 안 보여야 정상인 개념을 흑태자가 본인의 힘을 사용해서 실체화한 결과다.
“자, 잠깐. 후냥?! 이거 뭐야, 왜 취소가 안 돼! 히끅!”
무라마사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한다.
파츠츠츠츠츳!
반투명한 의식 연결선에 마력 스파크가 튄다.
붉은색 의식 연결선이 점점 검게 물든다.
“아, 안 돼! 나는 요도 무라마사! 수많은 주인의 영혼을 잡아먹은 공포의 정령이란 말이다! 내, 내가 어째서 처음 보는 애송이 정령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무라마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절거린다.
정령 무라마사가 하루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원래부터 무라마사가 주인의 영혼을 먹어 치우며 본인의 힘을 불리던 요도의 정령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작중에서 무라마사에게 붙은 또다른 이명은 악령.
서브컬쳐에서 흔해 빠져서 식상하기 짝이 없는 영혼 강탈 마검 설정이다.
“캬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 이 흑기사 어르신더러 애송이라고? 이거 신선해서 웃기는데?”
흑태자가 웃는다.
파츠츠츠츳!
“내가 애송이! 애송이란 말이지!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이자, 대(大) 프랑스 제국과 보나파르트 황실의 수호자이며 대재해에서 세계를 구원한 대영웅인 고귀하고 용감무쌍하며 명예로운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님 앞에서 뭐? 수모? 애송이?”
저걸 자기 입으로 다 읊고 다니냐?
쪽팔려 죽겠다, 정말.
“이봐, 아가씨.”
흑태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히, 히끅!”
무라마사가 딸꾹질한다.
“아가씨가 나한테 지는 건 말이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결과라고. 영혼 따위를 강탈하며 얻은 추악한 힘이 파이브 크라운즈가 세계 구원의 위업을 통해 얻은 내 고결한 힘이랑 같은 수준이라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목소리.
흑태자의 말을 들은 무라마사의 얼굴이 하얗게 굳는다.
이 세상에서 무장의 정령이란 이능력자에게 추가로 주어지는 소환수 같은 존재.
사용자의 마력과 능력치에 영향받으며, 소환만으로 사용자의 능력치를 배가시키는 건 물론, 정령마다 고유한 스킬을 보유해서 제한적인 단독 행동까지 가능한 두 번째 무장이다, 라고 설정집에 적혀 있다.
물론 실체화 유지에는 지속적인 마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정령으로서의 포텐은 쿠사나기와 흑태자가 비슷하다.
하지만 쿠사나기가 성장형이면 흑태자는 완성형.
즉, 12권의 쿠사나기보다 지금 흑태자가 더 강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라노벨 대사를 실제로 들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미소녀도 아니고 남자가 왜 저런 대사를 내뱉냐고.
못 들어주겠네.
“사, 살려 주세요!”
“안 돼.”
“저, 절 어떻게 할 거죠?! 부, 분명 엉망진창으로 범해버릴 거죠?! 에, 에로 비디오처럼!!”
“안 해. 이래 봬도 여자는 상냥하게 대해주는 게 젠틀맨의 의무라서 말이야. 그런 험한 짓은 하지 않아. 하지만.”
쭈욱.
흑태자가 검은 실선을 잡아당기자 쿠로사와 하루의 몸에서 반투명한 인영이 서서히 빠져나온다.
“너는 악령이니까, 좀 맞는 건 각오해야겠어.”
“히이이이익! 잘못했어요!! 제성해요!!!”
“파트너, 그럼 뒤를 부탁한다고!”
불쑥.
흑태자가 낚시하듯 실선을 잡아당기자 진홍색 머리 미소녀가 하루의 몸에서 완전히 튀어나온다.
우우우웅.
하루의 손에 쥐어진 무라마사가 빛을 잃는다.
툭.
그녀의 손에서 무라마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스으윽.
하루의 머리색이 진홍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한다.
정확히는 검은색과 진홍색이 동시에 나타나는 투톤헤어.
원작과 똑같은 모습, 무라마사의 빙의가 풀렸다는 증거다.
풀썩.
하루가 내 몸을 향해 쓰러진다.
얼떨결에 그녀의 몸을 끌어안는다.
‘드디어 여기로군.’
이제 남은 건 심상 세계 진입뿐이다.
원작에서는 서로 싸우다가 쿠사나기의 공격이 적중, 무라마사를 하루의 몸에서 분리한 동시에 유지와 하루의 마력이 겹치며 심상 세계로 진입한다.
한 마디로 라노벨다운 우연.
하지만 설정집에서 심상 세계 진입에 대한 뒷설정이 밝혀졌기 때문에 나라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다.
하루의 슈트 가슴 부근에 박힌 축퇴로가 보인다.
무라마사가 빠져나간 탓인지 빛을 잃어가는 축퇴로에 손을 얹는다.
축퇴로는 초상병기의 마력을 제어하는, 차량으로 따지면 엔진과 유사한 초상병기의 구동부.
당연하게도 미약하긴 하지만 사용자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초상병기 자체가 사용자의 의식과 육체를 둘 다 사용해서 조종하는 물건이니까.
“커헉! 그만둬!”
“아가씨는 좀 더 맞아야 해!”
“그, 그게 신사의 마음가짐이야?!”
“프랑스는 원래 그렇다고!”
등 뒤에서 흑태자와 무라마사의 만담이 들린다.
아무튼, 이 축퇴로에 내 마력을 불어넣고 내 축퇴로와 서로 공명시키면 마력을 매개로 일시적으로 상대와 의식을 연결, 심상 세계로 침투할 수 있다.
원래라면 타인의 심상 세계에 침입하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몸의 원주인 영혼이 갇혀 있으며 빙의된 정령은 이탈했고, 정신 방벽도 해제된 데다가 심상 세계가 텅 빈 예외적인 상황이라 가능한 경우다.
하여간 일본 서브컬쳐는 왜 이렇게 설정에 예외를 두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얘는 이래서 예외, 쟤는 저래서 예외 이러니까 오히려 평범이 특별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후.”
심호흡하면서 하루를 끌어안는다.
그녀의 가슴에 있는 축퇴로와 내 축퇴로가 서로 맞닿는다.
그 상태로 마력을 일으킨다.
두근, 두근.
마력로와 블랙 스톤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마력을 펌프질한다.
솟아오른 마력이 마력 회로를 타고 가슴에 있는 축퇴로에 몰린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녀의 축퇴로가 내 축퇴로에 맞춰 반응을 시작한 순간.
“끄윽!”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진다.
성공했다.
그 짧은 감상과 함께 나는 혼절했다.
*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꿈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주변을 바라본다.
자욱한 연기로 흐려진 하늘.
온통 불타고 있는 일본 전통 대저택, 쿠로사와 저택이 보인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과 같은 풍경.
“도착했군.”
여기가 쿠로사와 하루의 심상 세계다.
10년 전, 쿠로사와 가문이 멸족했던 날에 멈춰버린 풍경. 박제된 시간 속에 그녀가 있다.
나는 지금부터 여기서 메사이어가 건 금주마술을 없애고 벽을 세우고 방구석에 갇힌 그녀를 끄집어내야 한다.
허리춤을 더듬는다.
듀랜달이 만져진다.
듀랜달을 뽑고 조용히 마력을 불어넣는다.
[듀랜달 온라인]전투 모드가 전개된다.
평소와는 달리 흑태자의 목소리는 없다.
조금 허전한데.
여기는 타인의 심상 세계 안, 타인인 내 존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정신력이 소모된다.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
‘금주마술의 본체가 있는 곳은 저택 본채.’
정확히는 하루의 방 앞이다.
메사이어가 건 금주마술이 심상 세계 안에서 취하는 형태는 메사이어 본인.
그렇다.
원작에서는 최종 보스의 모습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는 장소가 바로 여기다.
주인공이 과거의 트라우마인 메사이어의 모습을 한 금주마술과의 배틀에서 승리한 뒤, 무너지는 저택 방구석에 갇혀 울고 있던 여동생에게 손을 뻗는다.
지극히 라노벨다운 원작 12권의 하이라이트다.
애니메이션에서도 훌륭한 작화로 재현되어서 여동생 엔딩을 염불하던 ‘하루단’이라는 악성 팬덤 탄생의 원흉이 된 에피소드다.
“염병······.”
그걸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다니.
한숨이 나온다.
어쨌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하는 수밖에는 없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불타는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다.
화르르르륵.
붉은 화마가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저택 전체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있다.
하지만 초상 병기의 전투 모드로 보호받고 있는 나를 침범할 수는 없다.
‘금주마술의 위치는······.’
암흑을 일으켜 퍼뜨리고 기감을 동기화한다.
암흑 레이더라면 찾을 수 있겠지.
아니면 원작처럼.
[불청객이 찾아왔군요.]금주마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던가.
우르르르르.
넘실거리던 화마 속에서 누군가 나타난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하얀 정장을 입고, 백구두를 신은 채 손에 날이 없는 예검을 들고 있는 남자.
라노벨답게 종말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신념을 가진 이 세상의 최종 보스, 메사이어.
그의 모습을 취한 금주마술이다.
[이거, 곤란한데요. 그녀를 구출하면······.]화르륵.
금주마술의 손에 들린 예검에 불이 붙는다.
저택을 휘감은 화마가 놈의 예감으로 빨려 들어간다.
놈이 들고 있는 검이 메사이어의 초상병기, 초월무장 멸세검(World Breaker) 레반테인.
레바테인(Lævateinn)이 아니라 일본식 발음으로 레반테인(レヴァンテイ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