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08)
심상 세계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하루를 구하지 못한다면, 나도 하루도 영영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 하루부터 구하고 보자고.”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감을 퍼뜨려 하루의 영혼을 탐지했다.
전환점
10년 전 그날.
빌런의 기습에 저택이 불타고 가족들이 죽던 멸문의 날.
하루는 방문을 잠그고 안에 틀어박혔다.
화르르륵.
불길이 타오른다.
비명이 들린다.
“아빠······. 오빠······.”
그 난장판에서 하루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은 채로 아빠와 오빠를 불렀다.
“······하루를 구해줘······.”
하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퍼졌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렸다.
“오빠! 하루 구하러 왔구나!”
스르륵.
하루가 이불을 벗어 던졌다.
오빠.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오빠.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나 같은 돌머리에 둔재와는 달리,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던 천재인 오빠.
쿠로사와 가문의 자랑거리였던 오빠.
언제나 믿음직하고 듬직했던 오빠.
그가 마침내 구하러 왔다.
그런 희망이 하루의 붉은 눈동자에 깃들었다.
그렇게 이불 밖으로 나온 하루가 마주한 건, 오빠 유지가 아닌.
“······여기 있었군요. 검성의 따님분.”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손에 쥔 남자.
오빠와 같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지만 전혀 다른 인상을 한 남자.
뉴 월드 리그의 마스터이자 검성을 살해한 EX랭크 빌런.
메사이어였다.
“꺄아아아아아악!”
“검성의 아들은 아쉽게 놓쳤지만, 따님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군요. 지금부터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메사이어가 피 묻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미소를 그린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광기가 깃든다.
“······제 신세계 계획에!”
그렇게 하루는 소련 시베리아 비밀도시에 있는 리그의 비밀 연구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하루는 검성의 스킬과 쿠로사와 일족의 혈통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수없이 학대와 고문에 가까운 생체실험을 반복해서 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도 몰랐던 동화의 기프트와 각종 검술 재능을 각성하기는 했다.
“동화의 기프트입니까?”
“초상병기와 감응, 동화해서 병기의 모든 잠재력을 해방해서 100% 성능을 발휘하는 기프트입니다.”
“그렇다면 요도 무라마사의 소체로 쓰면 되겠군요.”
기프트를 각성한 하루는 메사이어의 금주마술에 걸려 강제로 요도 무라마사의 주인이 되어 몸을 강탈당하고 심상 세계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였다.
그녀의 심상 세계가 가문이 불타오르던 그때의 풍경에 멈춰 있던 까닭은.
“······오빠.”
심상 세계의 불타는 저택 안.
그때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하루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하루가 잘못했어.”
그날.
만약 죽음이 두려워서 숨지 않았더라면.
당당히 맞서 싸웠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이런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부 내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야.”
하루가 입술을 깨문다.
“······여기를 나갈 자신도 없는 겁쟁이.”
어려서부터 그녀는 재능이 없었다.
이능은 간신히 각성하기는 했지만 그뿐.
찬란한 재능을 지닌 오빠, 쿠로사와 유지에 비교한다면 그녀는 범재, 아니 둔재 수준이었다.
오빠는 너무나 빛나는 존재라서.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서 감히 열등감을 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의지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재능이 좀 없어도, 둔재라도 가문의 모두는, 세상 사람들은 붙임성 있고 밝고 활달한 성격의 미소녀인 하루를 사랑해줬으니까.
“전부 오빠가 해결해줄 거라고, 그래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나쁜 아이가 되어서······.”
무서웠다.
피가 튀는 전장이 무서웠고, 저택을 습격한 빌런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영웅의 책임 따위는 내팽개치고 싸우지 않고 숨었다.
“그래서 하루가 지금 벌 받는 걸지도 몰라······.”
지금 이건 겁쟁이인 자신에 대한 벌이다.
쿠로사와 하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는······. 하루는 살고 싶어. 겁쟁이라도······. 오빠가 하루를 구해줬으면 좋겠어······.”
생체 실험을 당하던 도중, 리그의 연구원들에게서 우연히 유지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하루는 미약한 희망을 품었다.
언젠가는 오빠가 어렸을 때처럼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어린 시절, 단둘이 공원에 놀러 나갔을 때 게이트가 열려서.
게이트에서 나온 이계종이 자신 위협했을 때, 겁쟁이인 그녀 대신 당당히 맞서 싸웠던 그때처럼.
그 희망으로 버텼다.
강제로 무라마사의 주인이 되어 몸을 빼앗겼을 때도.
심상 세계에 감금당했을 때도.
하루는 오빠가 자신을 구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심상 세계와 요도 무라마사는 하루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녀는 영혼을 좀먹는 고통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시간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심상 세계 속에서.
하루의 의지는 점점 꺼져갔다.
“윽······.”
하루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는 오빠가 아니라도 괜찮아.”
하루가 떨리는 손으로 이부자리를 움켜쥐었다.
“누구라도······. 하루를 이 지옥에서 구해줬으면 좋겠어.”
바싹 마른 입술로 하루는 중얼거렸다.
“하루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아직 못해본 일이 많다.
오빠도 다시 만나고 싶고, 일본 최고라는 슈오우 영웅 학원에 입학도 하고 싶었다.
오빠의 후배로서.
파르페 가게도 가고 싶었고, 편의점에서 푸딩을 잔뜩 사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먹고 싶기도 했다.
또래 여생도들과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싶었고, SNS에 셀카도 올리고 싶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그녀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나, 바보 같아. 하루의 목소리 따위, 아무도 들을 리 없는데······.”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루가 겁쟁이라서······. 아빠 말도 오빠 말도 잘 안 듣던 말썽꾸러기라서······. 벌받는 건데······.”
하루의 눈빛이 죽는다.
그녀의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
요도 무라마사에게 갉아 먹힌 의지력 때문에 영혼이 점점 흩어지는 것이다.
하루의 죽은 눈동자가 희미해지는 손을 바라본다.
죽는구나.
“미안해······.”
소멸을 직감한 하루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그그그그그그.
그녀의 감각에 진동이 느껴진다.
‘진동?’
언제나 불타는 그날의 풍경으로 고정된 심상 세계였다.
이제 와서 이변이 일어날 리 없다.
이 방에서 나가면 금주마술에게 소멸되기 때문에, 여기서 버텨온 게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하루의 머리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오른 순간.
파츠츠츠츳!
스파크와 함께 미닫이 문이 열린다.
하루의 시선이 돌아간다.
거기에는.
“······찾았다.”
오빠와 같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이 서 있었다.
하루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누구야?”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지만 메사이어의 모습을 한 금주마술도, 요도 무라마사의 정령도, 오빠도 아닌 제3의 인물.
그의 등장에 하루가 처음 느낀 건 의문이었다.
하루의 질문에 김덕성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쿠로사와 하루. 널 구하러 온 사람이다.”
어째서였을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쿠로사와 하루.
쿠로사와 하루, 하루, 하루.
‘내 이름을 불러줬어.’
두근, 두근.
하루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린다.
구원.
10년 동안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이었지만, 막상 일어나니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날 구하러 온 거야?”
“그래, 네 오빠인 쿠로사와 유지를 대신해서 왔다고.”
검은 머리 소년이 하루에게 손을 내민다.
어째서일까.
이제는 오빠의 이름을 들어도 설레지 않는다.
두근.
대신 심장이 떨린다.
‘구하러 왔어.’
나를 구하러 왔다.
꿈에도 그리던 구원자가 등장했다.
백마 탄 왕자님도, 오빠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빨리 여기서 나가자. 더 늦으면 우리 둘 다 좆되니까.”
“응. 알았어.”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 갇혀서 시한부 환자처럼 정해진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
하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의, 구원자의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하루가 소년의 손을 잡은 순간.
파츠츠츠츳!
스파크가 튀었다.
하루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동화.
저주받은 그 기프트가 눈앞의 소년과 감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하루의 눈앞에 주마등처럼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하루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동화 능력을 통해서, 상대의 영혼과 동화한 결과다.
지금부터 눈앞에 나타나는 광경은, 소년의 영혼이 간직한 기록들.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한 명의 소년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평범한 소년.
아니, 평범하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소년은 라이트 노벨,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만화, 게임을 즐기는 서브컬쳐 마니아, 오타쿠였으니까.
‘여기는 우리 세상이 아니야······.’
두 번째로 하루는 알아차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환상 속 세상.
저쪽 세계는 같은 현대 지구지만,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환상 속의 세계에는 마력도, 영웅도, 이계종도, 게이트도, 빌런도, 헌터도, 유적도, 초상병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초월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전원이 비능력자인 인류가 역사를 이루고 문명을 건설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세상.
이능력자가 인류 역사와 함께했으며, 이능력과 이계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란 하루에게 있어 그 세상의 풍경은 충격이었다.
그런 세상의 풍경을 본 하루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하루는 떠올렸다.
메사이어의 신세계 계획을.
그가 봤다고 떠들던 진정한 ‘이상향’의 이야기를.
잊을 리 없었다.
메사이어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생체실험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버릇처럼 매번 이상향과 신세계에 대해 떠들었으니까.
이능력과 비일상이 있으니까 분쟁이 일어나는 거라느니, 그런 게 없어진다면 모두가 초월적인 힘에 휘둘리지 않고 인류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가 열릴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들.
그런 말을 생체실험 도중에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 미친 계획에 동참해달라고.
고문 대상인 하루로서는 전혀 동참할 수도,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념이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세상이······. 정말로 실존했을 줄이야······.’
틀림없다.
이곳이 놈이 본 ‘이상향’의 풍경.
하루가 입술을 깨무는 와중에도 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글로 ‘김덕성’이라 적힌 명찰이 달린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년이 랩핑도 안 뜯긴 라이트 노벨 한 권을 서점 라이트 노벨 코너에서 뽑아 든다.
책 제목은 .
백금발 미소녀가 흑발의 미소년과 서로 등을 맞댄 일러스트 표지가 달린 소설책이었다.
하루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였지만, 그녀는 단번에 알아봤다.
‘오빠?’
라이트 노벨 표지 일러스트에 있는 흑발 미소년이 오빠 쿠로사와 유지라는 사실을.
‘이게 그 물 건너에서 한창 유명한 인기 신작 최약영웅? 드디어 정발됐구만.’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한국인 캐릭터가 전투력 측정기로 등장한다고?
소년, 김덕성은 그렇게 구시렁대며 책을 사갔다.
“뭐임? 왜 재밌음?”
집에서 책을 읽던 김덕성이 중얼거렸다.
소설의 내용을 언뜻 본 하루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책 페이지에는 이쪽 세상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영웅, 게이트, 마력, 이계종, 영웅 학원······.
라이트 노벨의 주인공은 쿠로사와 유지.
그녀의 오빠였다.
“헉.”
충격적인 진실을 엿본 하루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온다.
그 와중에도 영상은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쪽 세상의 이야기가 적힌 라이트 노벨, 의 광팬이 된 김덕성은 고등학교를 최약영웅과 함께 보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라노벨을 읽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몰래 보다가 교사에게 걸려서 낭독회를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