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13)
그녀가 꼼지락대던 손가락을 멈춘다.
“좋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고민은······.”
아리스의 얼굴이 귓불까지 붉게 물든다.
“그건 제가······. 기껏 김덕성 군. 당신을 돕기 위해서 조금 무리해서 한국까지 왔는데······. 일은 이미 전부 끝났고······. 이사장님과는 다르게 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녀가 고개를 떨군다.
아리스의 어깨가 떨린다.
“그래서······. 학생회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아리스가 어색하게 웃는다.
“걱정은 고맙지만 그렇게 대단한 고민은 아닙니다. 그저 제대로 학생회장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 저에 대한 자책일······.”
“선배 말대로 별로 대단한 거 아니네요. 쓸데없는 고민이야. 괜히 걱정했어.”
맥이 탁 풀린다.
그래도 정체가 빨리 들킨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 말을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역시 그렇죠? 죄송합니다. 김덕성 군. 학생회장으로서 약한 모습을······.”
“선배 덕분입니다.”
할 말은 해야겠다.
내 말을 들은 아리스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게 무슨······.”
“선배가 제게 매일 지도해준 지옥 훈련 덕분에 빌런을 여유롭게 제압하고 하루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움 못 된 거 아닙니다.”
이런 말 하니까 조금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아리스가 침울한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원작의 아리스는 웃는 모습이 제일 매력적이었으니까.
게다가 내 말은 팩트이기도 했다.
흑태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아리스와의 단련 덕분에 무라마사를 여유롭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훈련 안 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어쩌면 끝났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아찔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염병, 나도 라노벨 주인공 다 됐네.
하여간 나는 이 세상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냥 내다 버리십쇼. 선배.”
으 오글거려.
내가 내뱉고도 손발이 부르르 떨린다.
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쁜 칭찬을 날린다.
하산은 무슨.
내가 이런 말 다시 하나 보자.
오늘만이다. 오늘만.
“······.”
아리스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김덕서이 니, 니는······! 우에······!”
홍당무처럼 빨개진 아리스의 입에서 칸사이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척.
그녀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마, 말을 그렇게······. 남사스럽게 잘하는긴데! 니 다른 가시나들한테도 다 이러나? 으으으으······. 머스마가 허우대는 멀쩡한대 속은 완전 기생오래비가 따로없데이······. 내는 파렴치해서 몬살겠데이······. 돼, 됐으니까 내는 나갈란다!”
홱.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간다.
쾅.
방문이 거칠게 닫힌다.
왜 저래.
내가 오글거림을 참고 위로해줘도 난리네.
염병.
하여간, 얘네 사고방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파트너, 청춘이네. 청춘. 캬하하하하하하하]머릿속에서 흑태자의 얄밉게 경박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
그렇게 아리스까지 나간 뒤.
모두가 잠들 시간쯤.
나는 방을 나가 저택 뒤뜰에 조성된 강변 공원으로 향했다.
한강에 비치는 화려한 서울의 야경.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여기저기 부서진 빌딩과 피해 복구 작업이 한창인지 밤인데도 열심히 움직이는 중장비들이 보인다.
자판기에서 꺼낸 콜라를 들고 벤치에 앉는다.
한강뷰가 좋기는 좋다.
이래서 인생은 한강물 아니면 한강뷰라는 말이 있는 건가 싶다.
내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여기 계셨군요. 김덕성님.”
등 뒤에서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있었다.
단정한 회색 단발, 흔들림 없는 무표정과 깊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
한서진이다.
“무슨 일로 왔냐?”
“내일 일정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말투로 말하는 한서진.
내일 일정?
그런 게 있었나?
내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를 읽은 모양인지, 한서진이 곧바로 말을 잇는다.
“내일 일정은 부활동에는 빠질 수 없는 활동인 단체 합숙입니다. 합숙 장소는 강원도 평창에 있는 김덕성님의 개인 리조트입니다.”
“웬 리조트?”
뭐?
단체 합숙 그거 원래 별장으로 가는 게 라노벨 국룰 아니었어?
언제부터 그게 별장에서 리조트로 규모가 대책없이 커진 거지?
왜 내 재산목록에 나도 모르는 리조트가 있는 거냐고.
“그렇습니다. 이번 김덕성님의 귀국을 맞아 로테그룹에서 김덕성님께 기증한 종합리조트로, 원래 이름은 로테월드 리조트였습니다.”
뭐? 뭘 기증해?
이런 씨발. 아직도 뇌절이 안 끝났다고?
오빠의 최애캐가 될 거야
김덕성의 방을 뛰쳐나온 아리스가 입술을 깨문다.
“읏······.”
빨갛게 타는 저녁노을처럼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부끄럽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이 가시나가 참말로 미쳐뿟데이······. 제정신이 아닌기라······.’
쿵쾅쿵쾅.
그녀의 심장이 뛴다.
아리스의 머릿속에 김덕성이 한 말이 메아리처럼 맴돈다.
[선배 덕분입니다.]화악.
아리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내 덕분이라고······.’
선배와 함께한 훈련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수직상승한 아리스의 심박수는 아직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
아리스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진다.
그날.
여름 학교 바닷가 샤워장에서 있었던 키스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하다.
계속해서 뛰는 심장 소리에 아리스가 커다란 가슴 위에 오른손을 올린다.
“으읏······.”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가 대외적으로 가진 이미지들, 학원 최강이니 학원 최고 인기 아이돌이니 품위 있는 아가씨니 하는 것들은 전부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지금의 사이온지 아리스에게서 학생회장이라는 포장을 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녀의 본질은 각성 전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촌스럽게 생긴데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릴 때부터 따돌림당해 친구 하나 없던 숫기 없는 시골 소녀.
항상 옥상에서 혼자 쓸쓸이 도시락을 먹던,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던, 주변에서 놀림 받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리스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만약 본모습을 들키게 된다면.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짝, 짝.
아리스가 양손으로 뺨을 소리 나게 때린다.
‘진정해야한데이 진정하지 않으믄······.’
그럴 일은 없다.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다.
아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래도 오늘은 부끄러웠다.
자신이 시골 소녀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사실은 숫기 없는 외톨이라는 사실까지 들킨 것만 같아서.
경멸받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경멸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감싸줬을 뿐이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그날.
교토 호텔에서 의도치 않게 시골 소녀라는 사실을 들키고 동침까지 했던 날 아침.
그가 말했던 목소리가 아리스의 귓가에 맴돈다.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아리스의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답을 찾지 못했다.
두근.
고장 난 것 같은 심장만이 거세게 고동치고 있을 뿐이었다.
*
기어이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파트너, 일어나.]흑태자의 모닝콜을 들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오늘 일정이 리조트 합숙이었지.
별장도 아니고 리조트 합숙이라니.
대체 거기서 뭘 할 예정인지 짐작도 안 간다.
살면서 리조트는 겨울에 스키 탈 때 빼고는 가본 적 없는데.
스키하니까 원작 겨울방학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히로인들이랑 같이 스키 여행을 갔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그게 원작 16.5권이었지.아무튼 리조트라니.
설마 별일 있겠나 싶다.
리조트는 기본적으로 휴양, 즉 쉬려고 가는 곳이니까.
가서 실컷 쉬다가 오면 된다.
대학 MT 때 갔던 유스호스텔이랑 별로 다를 거 없겠지. 부활동 합숙 자체가 한국으로 따지면 MT랑 비슷한 이벤트기도 하고.
‘그럼 어디 한번 실컷 놀아 볼까.’
[파트너.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래,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노는 게 진정한 영웅의 마음가짐이지! 캬하하하하]흑태자가 머릿속에서 경박하게 웃는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선다.
“김덕성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은 일행분 것까지 전부 챙겨 리조트로 보냈습니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마당에 서 있는 한서진.
그녀가 평소처럼 차분한 말투로 말한다.
벌써 짐까지 전부 부쳤다니.
새삼스럽지만 정말 빈틈없는 일 처리가 아닐 수 없다.
“주인님! 이제 일어났구나? 에리링, 꿈에서도 주인님 보고 싶었어!”
한서진 옆으로 선캡을 쓴 에리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여름이라 그런지 사복까지 입은 모습이 아주 본격적으로 휴가를 즐기려는 모양.
그나저나 꿈에서도 날 보고 싶었다니.
악몽이 따로 없다.
“덕성. 간밤에는 잘 잤나? 어제 일도 많고 해서 혹시 잠을 설치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했었다.”
에리 다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 건 린.
여전히 엄마 같은 말투로 내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린이 모성애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흥, 늦잠 자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정말이지······. 역시 당신 같은 바보는 전속 시녀인 제 보필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군요!”
올리비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백금빛 머릿결이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아침부터 한옥 마당에서 츤츤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 좀 실감이 난다.
내가 아직 이 엿 같은 라노벨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후배 군! 일어났구나! 보고 싶었어.”
“주군······. 나도 여기 있어!”
보라색 머리 미소녀, 카스미 선배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걸고 옆에 있던 마코토가 소심한 표정으로 거든다.
“김덕성 군. 일어났군요. 지금은 방학이라 늦게 일어나도 상관없지만, 학기 중에도 그렇게 늦잠을 자면 곤란합니다.”
그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 합류했던 아리스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매일 교복만 입던 학기 중과는 다르게, 나풀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눈에 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리스가 시선을 피한다.
“파렴치한 시선으로 상대를 훑는 버릇은 자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김덕성 군.”
그녀의 귓불이 빨갛게 물든다.
억울하네.
내가 언제 파렴치한 시선으로 봤다고.
원래라면 아침 인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지만.
“김. 간밤에 잘 잤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 어제 퇴원했어.”
갑작스럽게 불쑥 등장한 유지 덕분에 나는 아침 인사를 계속해서 받아야만 했다.
하루만에 퇴원이라니.
주인공이라 그런지 회복력이 장난 아니다.
유지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한다.
“하루 구해준 거······. 정말 고마워. 김.”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싱긋 웃는 유지.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
유지가 내게 손을 내민다.
이거 악수하자는 거지?
하여간 누가 라노벨 주인공 아니랄까 봐, 이런 쓸데없는 제스처에 신경 쓰는 거 봐라.
“됐어. 악수 같은 거 할 필요 없어.”
쿠사나기와의 충격적인 대면 이후.
나는 끔찍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당분간 유지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절대 게이가 아니다.
“아하하하······.”
내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기 위해 내밀었던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유지.
[마스터. 저것 봐요. 쿠사나기 말대로 저 남자는 인성이 덜된 사람이라고요.]유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춤에 있는 그의 칼에서 쿠사나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뭐? 인성이 덜 돼?
저거 일부러 나 들으라고 말한 거지?
저놈의 칼을 분지를 수도 없고, 골치가 아프다.
“쿠사나기. 김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마스터의 악수를 거절하다니 쿠사나기는······.]“그건 내가 아직 부족해서 그래.”
유지가 주먹을 불끈 쥔다.
뭐?
갑자기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김. 앞으로 너와 악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반짝이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유지.
라노벨 주인공다운 결연한 표정이다.
악수할 수 있는 자격? 아니 그냥 남자랑 하기 싫은 건데?
속이 울렁거린다.
대체 이 빌어먹을 착각을 어디서부터 교정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