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28)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쓰인 현수막 아래 스크린이 펼쳐진다.
“모두 모이셨군요.”
단상 위에 올라간 한서진이 회색 눈동자로 다섯 미소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럼, 지금부터 PV 상영을 시작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한서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 미소녀의 박수가 이어진다.
꾹.
한서진이 리모콘 버튼을 누른 순간.
천장에 설치된 빔 프로젝터가 작동하면서 스크린에 영상이 출력된다.
정말 훌륭한 PV
한서진의 말과 함께 영상이 재생된다.
유려한 작화로 재현된 화려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송출된다.
짧은 기간 안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퀄리티 작화로 재현된 히로인들의 모습.
김덕성이 봤다면 내가 왜 원작 애니를 여기서 또 보고 있는 거지? 라고 어이없어할 정도로 완벽 재현한 PV의 영상미에 모두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박진감 넘치는 효과음과 BGM이 스피커를 통해 소강당 안을 울린다.
[올리비아.] [구하러 왔다. 약속대로.]PV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떨어지는 김덕성의 실루엣과 드레스를 입고 그를 돌아보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상입니다.”
한서진의 차가운 말과 함께 불이 켜진다.
빔 프로젝터가 꺼지고, 스크린이 올라간다.
짝짝짝짝짝짝.
다섯 소녀의 박수 소리가 소강당을 가득 메운다.
“우와아아아! 한서진 씨 역시 대단해!”
에리가 엄지를 위로 치켜세우면서 소리친다.
“역시 한서진 씨한테 맡기기를 잘했어.”
옆에서 작게 박수치던 카스미가 중얼거린다.
“한서진 씨······. 동경하게 되어버려······.”
마코토가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때.
“다 좋지만, 보나파르트의 분량이 많은 건 조금 흠이로군.”
린이 팔짱을 낀 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들떴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찌릿.
에리가 린을 노려보면서 볼을 부풀린다.
“젖소. 기껏 한서진 씨가 열심히 만들어온 결과물에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빨래판.”
“네 비중이 낮아서 화난 것 같은데? 에리링은 만족해. 제대로 ‘주인님은 상냥해’라는 대사랑 주인님이 선물한 목걸이가 나왔으니까. 히히.”
에리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개목걸이를 매만지며 웃는다.
“주인님은 상냥해······.”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린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녀의 말문이 막힌다.
지금의 린은 분하지만 에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반면에 올리비아는 입술이 움찔거리는 걸 애써 참고 있었다.
두근, 두근.
약혼식 난입 장면을 훌륭하게 재현한 PV 덕분에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악.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진다.
척.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오호호호호호호호! 정말 훌륭한 PV였어요!”
올리비아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그 바보의 전속 시녀이자 가장 오래 함께한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인 이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비중이 가장 높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오호호호호호호호호!”
올리비아의 모습을 본 린이 입술을 깨문다.
“큿······.”
린이 넥타이를 움켜쥐는 모습을 본 한서진이 차분한 말투로 말한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시노자키 씨. 앞으로 나올 2차 PV와 캐릭터별 PV, 최종 트레일러와 본편에서는 균등한 분량 분배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길.”
한서진의 차분한 눈동자가 린을 향한다.
올리비아가 아직 정실대전에서 독주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국내 히로인 지지율 조사에서 올리비아와 오차 범위 내에서 경합열세인 린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애니메이션 영화, 가칭 ‘성웅 김덕성’ 프로젝트에는 김덕성 선전뿐만 아니라 또다른 목적도 있었다.
‘이번 애니메이션을 통해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 하렘 멤버들을 간접적으로 지원, 아예 지지율이 잡히지 않는 사이온지 아리스, 요시자키 세이라에 대한 국내 우호적 여론을 생성해야 한다.’
한서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성웅 김덕성 애니메이션이니만큼, 천만 관객 돌파는 당연히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
이번 애니메이션을 통해 한서진은 올리비아와 린의 양강 구도 아래 카스미, 에리의 2중, 마코토 1약으로 이루어진 현 국내 정실대전 지형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려고 계획 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한서진 씨.”
그런 한서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시노자키 씨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의 비중을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하면서도, 서사에 소홀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모든 유명 각본가, 소설가가 참여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한서진의 말에 마코토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이야.’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오른다.
와락.
그런 마코토를 에리가 끌어안는다.
“마코삐, 걱정했구나! 괜찮아. 괜찮아.”
스윽.
에리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여전히 파렴치한 지방 덩어리야! 마코삐!”
“흐앗?! 에리쨩. 하지마아······.”
마코토의 입에서 비음이 흘러나온다.
“또 시작이로군······.”
그 모습을 본 린이 이마를 짚는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수라장 같은 광경을 바라보면서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다.
“좋아요! 이걸로 쿠로사와 하루, 그 도둑고양이에 대한 대비는 완전히 끝났어요!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다들 저한테 감사하라고요! 아시겠나요?!”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그 모습을 보던 카스미가 어색하게 웃는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카스미가 작게 중얼거린다.
그녀의 머릿속에 김덕성이 문화제 실행위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리고 문화제 실행위원장은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가 겸임한다는 사실도.
“착각이겠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애써 지워내면서, 카스미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문화제까지 10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
그날.
옥상에서의 살짝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살짝 걱정했는데, 이후의 아리스는 다행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달라진 점이라면, 둘만 있을 때 조금 솔직해지고 때때로 사투리가 튀어나오게 된 정도.
아리스 때문에 신경 썼던 게 괜한 걱정이 돼서 다행이었다.
원작에서는 준비 과정은 제대로 묘사 안 돼서 몰랐지만, 실행위원회 일은 꽤 바빴다.
그리고 오늘의 실행위원회 회의 안건은.
“오늘은 문화제 준비 사안으로 일본 영웅 협회에 제가 직접 슈오우 학원을 대표해서 협조를 구할 예정입니다.”
일개 학원 문화제에 협회 차원의 협조라니.
쓸데없이 일 크게 벌이는 라노벨식 학원 축제답다.
학생회 회의장에서 아리스의 말을 듣고 있던 그때.
“김덕성 군.”
아리스가 나를 부른다.
“이번 협회행에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아리스의 지명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어머, 이거 완전 데이트 신청?!”
“회장 선배, 완전 대담해!”
“검은 귀축이랑 둘이 나가서 그렇고 그런 짓 하는 거 아니야? 꺄악!”
어김없이 뒤따르는 실행위원들의 웅성거림.
“큭, 회장님······!”
그리고 남몰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입술을 깨무는 학생회 서기, 나가미네 레이지와.
“화이팅! 회장님!”
입모양으로 작게 파이팅을 외치는 부회장, 모리시타 미호가 보인다.
잠깐의 짧은 침묵이 흐른다.
아리스의 뺨이 움찔한다.
“······안 됩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아니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살짝 떨린다.
[파트너, 설마 레이디가 저렇게까지 권유하는데 바람맞힐 생각은 아니지?]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괜찮습니다. 가도록 하죠, 일본 영웅 협회.”
“알겠습니다. 김덕성군. 그럼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나는 아리스와 함께 학원을 빠져나와 전철을 타고 일본 영웅 협회로 향했다.
일본 영웅 협회 본부.
협회 로고와 함께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는 마천루 앞에 나는 아리스와 함께 섰다.
빌딩 정문 앞에 도착하자, 더벅머리의 느슨한 인상을 지닌 미남자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나는 저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일본 영웅 협회 부회장.
협회장 시노자키 이치로의 오른팔이자, 협회의 2인자.
“슈오우 학원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 양, 그리고 이쪽은 한국의 영웅 후보생 김덕성 군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명왕 나카야마 소지로라고 합니다. 협회장님이 당신들 좀 안내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여간, 그 양반은 날 왜 이렇게 부려 먹는 건지. 귀찮아 죽겠네. 협회 이거 완전 블랙 기업이야.”
일본의 EX랭크 영웅.
명왕(冥王) 나카야마 소지로였다.
나카야마 소지로가 블랙 기업 사축처럼 투덜대면서 머리를 긁적댄다.
“아무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카야마 소지로가 투덜대면서 우리를 데리고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한다.
위압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
여기 있는 방은 단 하나.
협회장 집무실뿐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광경.
“아, 여기만 오면 숨이 턱하고 막힌다니까. 젠장.”
옆에 있던 소지로가 투덜투덜댄다.
그는 투덜대면서도 충실히 우리를 협회장실 앞까지 안내했다.
“자,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할 일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칼퇴근해야하거든요.”
우리를 바래다준 소지로가 빠르게 퇴근한다.
그와 함께 협회장 집무실 문이 지잉하고 자동으로 열린다.
이사장 집무실보다 더 쓸데없이 넓은 협회장실은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일본 전통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통유리 창문 밖에는 옥상 정원으로 조성된 일본 전통 정원이 보인다.
현대적인 초고층 마천루 꼭대기 층이 일본 전통 방이라니.
애니메이션에서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현실이 되니까 더 이상하다.
대체 무슨 해괴한 연출인지 모르겠다.
“사이온지 아리스와 김덕성 군. 두 사람 다 꽤 오랜만이군.”
유카타를 입은 이치로가 우롱차를 마시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리 와서 앉게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아리스와 함께 고개를 숙인 뒤에 협회장 맞은편에 앉는다.
“먼저 차부터 들게나.”
쪼르륵.
이치로가 도자기 주전자에 담긴 우롱차를 찻잔에 따른다.
책상 위에는 화과자가 놓여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하나 집어 먹는다.
단맛이 입안에 감돈다.
맛있네.
어차피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없다.
설명은 아리스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나는 꿔다논 보릿자루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래, 문화제 협조를 구하러 왔다지?”
“그렇습니다. 일단 서류부터 드리겠습니다.”
스윽.
아리스가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이치로에게 건넨다.
팔랑팔랑.
이치로가 서류를 넘기며 훑는다.
“이번 슈오우 영웅 학원 문화제는 작년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개최될 예정입니다. 도쿄도 및 지역 상점가, 일본 유수의 대기업과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였고, 포스터, 책자 배포와 특설 웹사이트를 포함한 마케팅 활동 역시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
아리스의 설명에 이치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그래서 협회의 스폰서도 받고 싶다는 건가?”
“예, 슈오우 영웅 학원은 제1회 문화제부터 협회와 인연을 맺어왔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슈오우 학원은 전국 제일을 넘어 세계 제일을 다투는 우수한 영웅 학원. 협회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스폰서 계약은 아닐 것입니다.”
이치로의 질문에 대답하는 아리스.
“알겠네, 뭐 스폰서 계약. 하도록 하지. 그럼 사무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탁.
이치로가 찻잔을 내려놓는다.
“김덕성 군.”
이치로의 우울한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여기 있는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와 자네는 무슨 관계지?”
이치로의 말을 들은 순간.
“푸웁!”
아리스가 마시던 우롱차를 입에서 뿜는다.
쪼르르르르, 딱.
그와 동시에 창문 밖에 조성된 일본식 옥상 정원의 시시오도시가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돌겠네.
이 염병할 시시오도시가 여기도 있었구나.
라면 먹고 갈래?
[대핀치에 몰린 김덕성! 과연 우리 파트너는 이 역경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투 비 컨티뉴!]머릿속에서 애니메이션 나레이션 같은 목소리가 울린다.
흑태자다.
라노벨 세상에서 내가 저딴 나레이션을 들어야 하나.
기가 찬다.
“사이온지 양. 왜 당황하지?”
이치로의 눈동자가 우롱차를 뿜어버린 아리스를 향한다.
아리스의 뺨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다.
“그건······.”
“매사에 침착하고 공사의 구분이 확실한 완벽초인, 현역 영웅을 능가하는 실력자이자 일본 최고 명문인 슈오우를 대표하는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와의 인상과는 맞지 않는 모습이로군.”
이치로의 냉정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우롱차를 붙잡은 아리스의 손이 떨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모습은 여기 앉은 사람이 내가 아는 사이온지 아리스가 아니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치로가 말을 끊는다.
“김덕성 군과의 관계가 그 냉정한 사이온지 아리스를 동요하게 할 정도로 깊은 관계라는 의미인가?”
아리스가 고개를 숙인다.
사실 라노벨이라면 팔불출 딸바보 히로인 아버지의 심술 장면은 클리셰 중의 클리셰.
따라서 이치로의 저런 모습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아리스라는 것.
본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콤플렉스인 아리스에게 완벽초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치로의 말은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의 거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나이기에,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지?”
이치로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아리스의 어깨가 떨린다.
분명 라노벨에서는 흔한 광경.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아리스의 얼굴이 패닉에 빠져 있다.
[파트너, 레이디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신사로서 그냥 두고 볼 거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그럴 리가.’
흑태자에게 즉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