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29)
내가 아리스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탁.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찰랑대던 우롱차가 살짝 튄다.
“그만하시죠. 협회장님.”
내 말에 아리스의 눈동자가 커진다.
이치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저랑 회장 선배는 그냥 선후배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호오?”
이치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자네가 직접 나서는 걸 보면,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다.
하여간 사람 시험하는 걸 좋아하는 저 성격은 세탁기가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하다.
물론 여기에 대한 대답도 이미 준비해놓은 지 오래다.
나는 준비한 대답을 내뱉었다.
“사이온지 선배와는 교토 교류전 때 함께 빌런을 토벌한 인연을 계기로 방과 후에 매일 같이 특훈을 하면서 보통의 선후배보다 좀 더 친밀해졌을 뿐입니다.”
거짓이 아닌 팩트에 기반한 대답.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사 협회장의 권력으로 나와 아리스의 관계를 조사한다고 해도 이 이상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김덕성 군······.”
내 대답을 들은 아리스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나를 작게 부르던 그때.
짝, 짝, 짝, 짝.
이치로가 손뼉을 친다.
그가 호탕하게 웃는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사이온지 양이 협회 출장에 학생회 임원이 아닌 생도를 동반한 건 처음이라 그냥 농담으로 해본 이야기였네. 두 사람 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게나.”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도 농담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
이거 설마 그거인가?
부장님 개그처럼 안 웃기는 개그를 권력을 통해 억지로 웃게 하는 뭐 그런 거?
내가 뭐라 한마디하려던 그때.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 협회장님.”
아리스가 고개를 들면서 말한다.
아까 동요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평소의 차분한 완벽초인 아가씨 학생회장 모드로 돌아온 모습.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지네.
“그렇지? 하하하하. 협회 부하들도 내가 농담을 잘한다고 칭찬하더군. 특히 명왕 그 친구가 내 농담을 정말 좋아하지.”
이치로가 웃으며 우롱차를 마신다.
나는 마음속으로 명왕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달했다.
“그래, 아무튼 좋네.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군.”
찻잔을 잡은 이치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말한다.
“김덕성 군.”
이치로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오늘 곤경에 처한 선배를 감싸는 후배의 모범적인 모습, 인상 깊게 봤네. 역시 자네는 탐나는 인재야. 하지만.”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지.
“내 딸아이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흐른다면, 그날부터 자네는 내 원수일세. 은인이고 인재고 뭐고 다 필요 없네. 자네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하여간.
누가 딸바보 캐릭터 아니랄까 봐.
말하는 거 봐라, 진짜.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좋아.”
이치로가 호탕하게 웃는다.
“일도 사담도 끝났으니, 이제 가보게나.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남아있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치로와 아리스가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아리스와 함께 협회장실을 나섰다.
*
탁.
협회장실 문이 닫힌다.
“흐음.”
이치로가 침음성을 흘린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사이온지 아리스라······.”
아리스는 부정했지만, 이치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김덕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꾹.
이치로가 책상 버튼을 누르자, 기계음과 함께 원목 테이블이 현대적인 디자인의 금속 책상으로 뒤바뀐다.
위에 설치된 키보드 자판을 누르자, 홀로그램 화면으로 김덕성과 관계있는 모든 히로인들의 신상정보가 주르륵 팝업처럼 떠오른다.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니시자와 에리, 호시노 카스미, 카미야 마코토, 사이온지 아리스, 에반젤린 스튜어트, 거기에······.”
팟.
백발적안 고스로리 미소녀 사진이 이치로의 눈앞에 떠오른다.
“믿기 어렵지만, 이사장님까지······. 이사장님은 주책이 따로 없군.”
후우.
이치로가 한숨을 내뱉는다.
“우리 사랑스러운 린의 경쟁자가 너무 많군.”
이치로의 눈이 가늘어진다.
김덕성은 초월무장 듀랜달의 주인이자 자신을 구원한 은인.
그를 놓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꾹.
이치로가 버튼을 누르자, 기모노를 입고 신부 수업을 받는 린의 사진이 떠오른다.
꽃꽂이하는 린의 모습을 본 이치로의 얼굴에 흐뭇함이 떠오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린. 이 아비가 너를 도와주겠다. 필요하다면 협회의 힘을 써서라도······.”
이치로가 흐뭇한 목소리로 린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때.
지잉.
자동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저 왔습니다. 협회장님.”
투덜대는 목소리에 살짝 얼빠진 인상을 지닌 남자.
명왕 나카야마 소지로였다.
소지로를 본 이치로가 황급히 홀로그램을 끈다.
“흠흠. 왔나. 나카야마 부협회장.”
“예, 예. 표정 보니까 또 따님 사진 보고 계셨죠? 에휴. 누구는 초과 근무인데 누구는 팔자 좋게 다다미방에 앉아서 딸바보 짓이나 하고 있고. 블랙기업, 아니 블랙 협회 같으니.”
나카야마 소지로가 투덜대면서 자리에 앉는다.
일상과도 같은 그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은 이치로가 말한다.
“조사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이 김덕성이라는 생도, 정보 빼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 슈오우 학원이 다 그렇기는 한데, 얘는 그걸 감안해도 좀 심해. 미치는 줄 알았네. 앞으로 이런 일 시킬 거면 추가 수당 주고 하십쇼.”
탁.
소지로가 투덜대면서 USB 메모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수고했네.”
USB 메모리를 받아든 이치로의 입가에 건조한 미소가 걸린다.
협회의 힘을 사용해 조사한 김덕성 상세 정보.
이 정보를 토대로 김덕성 공략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신부 수업에 힘쓰는 린에게도 도움이 될 터.
‘김덕성 군. 자네는 반드시 시노자키 덕성이 되어야 하네.’
이치로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USB 메모리를 만지작댄다.
쪼르르르, 딱.
시시오도시가 아래로 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아오. 협회장님. 저 시시오도시 아직도 안 치웠습니까? 거슬린다니까.”
소지로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 모습을 본 이치로가 말한다.
“내 취향일세.”
“······악덕 상사, 블랙 협회 같으니. 퇴근도 못 하고.”
소지로의 투덜거림을 들은 이치로가 웃는다.
*
협회 빌딩 앞.
아리스는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읏······.’
두근.
두근두근.
아플 정도로 뛰는 심장이 그녀의 가슴을 옥죈다.
이치로가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답지 않다고 했을 때.
아리스는 패닉에 빠졌다.
이치로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은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네 모습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게 들려서.
완벽 초인 아가씨 사이온지 아리스가 아닌, 따돌림당하던 시골 소녀 아리스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아리스의 숨은 턱하고 막혔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치로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그녀의 겉모습은 전부 거짓, 꾸며낸 가면에 불과했기에.
‘김덕성 군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본모습의 편린이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그만하시죠. 협회장님.]아리스의 귓전에 그의 말이 맴돈다.
일본 영웅 협회장, 시노자키 이치로.
일본 최강이자, 세계에서도 수위권을 다투는 영웅이며, 일본 최고의 권력자인 그에게 김덕성은 정면으로 맞섰다.
‘내, 내를 구하려고······.’
두근.
아리스의 심장이 뛴다.
그녀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가장 먼저 품행을 단정하게 하고 학원의 풍기를 바로잡아야 하는 학생회장이기에,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완벽 초인 아가씨이기에, 연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이건 반칙이데이······.’
아리스가 애써 연심을 부정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김덕성 군 말대로 우리는 그저 선후배······.’
조금 친밀한 관계.
딱 그 정도가 좋다.
그 이상은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김덕성이 그렇게 선을 그었을 때.
아리스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그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그렇게 딱 잘라 부정할 필요는······. 아니, 지금 이 가스나가 무신 남사스러운 생각을?!’
아리스가 고개를 다시 도리도리 젓는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다.
서운해할 이유가 없는데, 자꾸 서운해지는 기분은 뭘까.
아리스가 입술을 우물댄다.
“선배.”
아리스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뛴다.
서운함이 눈 녹듯 깨끗이 사라진다.
“표정이 왜 그렇게 자꾸 계속 변합니까? 평소랑 다르게.”
김덕성의 목소리를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것보다······.”
아리스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거나 또 도움을 받고 말았다.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를 표하는 게 예의다.
그게 설령 후배일지라도.
아리스의 허리가 숙여진다.
*
“아까 절 위해 나서줘서 고마웠습니다.”
아리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허리를 숙인다.
폴더인사까지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 한 건 아닌데.
괜히 이쪽이 머쓱해지는 기분이다.
역시 상냥한 라노벨 세상답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쇼.”
“그래도······. 감사합니다. 김덕성 군.”
“네, 알겠습니다.”
몇 번의 감사 인사 끝에 아리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깐의 침묵.
“그럼 김덕성 군. 이제 저녁 때도 되었고 하니. 혹시 괜찮으시면······.”
아리스가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저랑 같이 라면이라도 먹고······. 가시겠습니까?”
뭐?
제정신인가?
[뭐야, 파트너. 왜 당황해?]머릿속에서 흑태자가 소리친다.
라면 먹고 갈래라고 하니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라면이 그 라면이 아니라 라멘을 가리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 어감 때문에.
염병.
돌겠네.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김덕성 군? 혹시 라멘, 별로······. 안 좋아하는 메뉴입니까?”
내 안색을 본 아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리스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라멘.”
아리스의 입맛은 서민적이라서, 규동과 라멘을 좋아한다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가슴 위에 손을 올리는 아리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싱긋.
아리스가 작게 웃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아리스의 얼굴이 무표정 가면을 쓰고 완벽 초인 아가씨를 연기하던 평소와는 다른, 시골 소녀의 순수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아까 도움의 답례도 해야 하고 하니, 오늘 저녁은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그렇게 나는 아리스의 손에 이끌려 라멘 가게로 향했다.
“여기입니다.”
도착한 곳은 낡은 간판이 달린 허름한 인테리어의 작은 라멘 가게.
가게보다는 포장마차에 가까운 서민적인 비주얼.
대외적으로 명망 높은 집안 아가씨라고 알려진 아리스가 드나들 법한 가게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원작의 아리스가 남몰래 다니는 단골 라멘집이 여기라는 사실을.
즉, 이 라멘집은 학생회장 아리스가 아닌 시골 소녀 아리스로서의 은밀한 취미인 셈이다.
애니메이션에도 나온 적 있고, 원작 7권 에필로그 이후에 수록된 외전에서도 아리스가 일이 좋게 마무리된 뒤 주인공과 단둘이 방문했던 장소이다.
“혹시 가게 외관이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맛은 제가 보장할 수 있으니······.”
내가 잠깐 말이 없자, 아리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한다.
“아뇨, 들어갑시다.”
아리스의 말허리를 자른다.
원작에서도 굉장히 맛있다고 묘사되었으니, 맛없는 가게일 리는 없겠지.
“크흠. 알겠습니다.”
민망한 모양인지 헛기침을 한 아리스의 뒤를 따라 라멘 가게로 들어간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머리에 두건을 쓴, 전형적인 라멘 가게 주인 같은 느낌의 아저씨가 불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아리스의 인도에 따라 자리에 앉는다.
바나 선술집처럼 가로로 길쭉하게 늘어선 테이블 앞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은 상태.
아리스와 함께 라멘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