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37)
“지금? 이 옷차림으로?”
유지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메이드복을 입은 상태에서 애니메이션 상영회에 간다니.
아무리 착하고 호구인 유지라지만, 그렇다고 여장 메이드 차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클래스메이트에게 보이고 만다면······.
“안내 안 해줄 거야? 오빠······. 하루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부탁하는 하루의 필살기에 시스콤인 유지는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응. 알았어. 내가 안내할게. 하루.”
“아싸! 그럼 지금 출발!”
하루가 메이드복을 입은 유지를 앞세우고 대로를 걷는다.
그 뒤로 일행인 사오리, 레나, 쿠사나기, 이시하라가 따라붙는다.
“대체 나는 왜······.”
이시하라가 죽상이 된 얼굴로 메이드복 차림인 자신의 옷을 보며 중얼거린다.
애니메이션 상영회까지 1시간 반 남은 시점이었다.
*
올리비아의 인절미 팥빙수를 끝으로 요리부 코스프레 카페에서는 별다른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계산하겠습니다.”
“알겠어요. 회장 선배.”
카페를 나가기 전, 카운터에서 잠시 메이드복 차림의 카스미 선배와 아리스 사이에서 눈싸움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뿐.
나는 순조롭게 코스프레 카페라는 위험 지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흐음······. 풍기 문란 행위가 자행되는 위험한 공간이었습니다. 학칙에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지만······. 저런 불건전한······.”
아리스가 얼굴을 붉힌다.
“흠흠. 아무튼 김덕성군이 저런 풍기 문란 행위에 동참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실행위원을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100%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사이온지 양의 곁에 붙어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고?]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붙는다.
아리스가 좋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실행위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코스프레 카페 안에서 집사복을 입고 있거나, 대로변에서 코스프레를 하고 전단지를 돌렸겠지.
어느 쪽이건 끔찍하고 손발 오그라드는 상황인 건 틀림없다.
역시 실행위원이 최고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리스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분홍색으로 물든다.
“그럼 다음 부활동으로 가죠. 김덕성군.”
코스프레 카페 이후 부활동 현장 점검은 별거 없었다.
다도부의 일본 전통 찻집을 마지막으로 부활동 행사 점검이 끝났다.
“이제 클래스에서 하는 행사와 공연만 남았군요.”
아리스가 별관에서 나오면서 중얼거린다.
그녀의 말대로 노점과 부활동 점검이 끝났으니 남은 건 클래스에서 하는 유령의 집, 카페 같은 행사와 교내 밴드 공연 점검만 남았다.
“그럼 1학년 A반부터 가보도록 하죠.”
아리스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1학년 A반이라니.
그거 우리 반이잖아?
우리 반이 준비한 문화제 행사는 애니메이션 상영.
그렇다.
대한민국의 문화 역량을 총동원해서 만들어낸 내가 주인공인 빌어먹을 씹덕 애니메이션이다.
지금까지 애써 잊고 있었던 끔찍한 진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걸 봐야 한다고? 아리스랑 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김덕성군? 무슨 일 있습니까?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요.”
아리스가 내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이마에 닿는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이마에 전해진다.
아리스가 손을 뗀다.
“열은 없어 보이는데······.”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사이온지 양, 저렇게 자연스러운 스킨십이라니······. 이거 만만한 상대가 아닐지도 모르겠어.]머릿속에서 흑태자가 쓸데없는 해설을 한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봐야 할 빌어먹을 애니메이션.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아직 걱정하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 괜찮습니다. 그냥 가시죠.”
“알겠습니다. 김덕성군. 몸이 안 좋으면 언제건 말해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아리스와 함께 교정을 걸어 본관에 도착했다.
본관 창문마다 걸린 현수막이 시야에 스쳐 지나간다.
본관 건물에 들어선 뒤에, 1학년 A반으로 향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우리 반의 모습이 던전 입구처럼 보인다.
옆에 붙은 애니메이션 포스터의 모습도 보인다.
씹덕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그려진 내 모습을 보니 눈에 피가 나올 것 같다.
보기만 해도 미친다는 우주적 공포가 이런 거였나?
내가 괴로워하고 있던 그때.
“하와와와······. 김덕성님! 오랜만인 것이와요! 소녀, 에반젤린이어요!”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흔들리는 핑크 블론드 포니테일, 기괴한 애기븝미 말투가 인상적인 교복 미소녀.
국뽕 불닭 애기븝미 공주 에반젤린이었다.
그 옆에는 캡과 선글라스, 마스크를 착용한 코토리 베이지 머리카락의 미녀가 있다.
“아, 안녕하세요. 김덕성님······.”
한류 아이돌, 유세라였다.
그녀가 부끄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후후후. 소녀, 김덕성님을 뵙고 김덕성님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현장에서 직관하기 위해서 영국에서 머나먼 극동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와요! 그런데 어머나! 여기에서 유세라님과 마주한 것이었어요!”
“그, 그렇게 됐어요······.”
에반젤린의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라.
딱 봐도 서로 초면이라 어색한 유세라에게 친화력이 지나치게 높은 에반젤린이 들이대고 있는 꼴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가 낮게 중얼거린다.
“김덕성군은 정말······.”
“선배?”
정말 뭐?
내 말에 아리스가 살짝 놀라더니, 다시 원래 무표정으로 돌아가며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럼 1학년 A반 현장점검에 들어가도록 하죠.”
휘잉.
찬바람이 쌩하고 불면서 아리스가 나보다 먼저 1학년 A반 안으로 들어간다.
아, 이거 진짜 가야 하나.
각오는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진다.
PV만 봐도 끔찍했는데, 본편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안 된다.
그렇게 내가 망설이고 있던 그때.
“소녀도, 소녀도 같이 가겠사와요!”
“저도 가겠어요! 김덕성님!”
등 뒤에서 에반젤린과 유세라의 아우성이 들린다.
결국, 나는 그녀들에게 반 강제로 떠밀려 1학년 A반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그 끔찍한 장소로.
검은 머리 소년의 영웅담
결국 나는 교실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실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창에는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고, 벽에는 온통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그 빌어먹을 포스터가.
“하와와와······. 온통 김덕성님이 가득! 소녀, 감동이어요!”
착.
에반젤린이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며 말한다.
그 옆에 있던 유세라가 포스터를 손으로 만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힌다.
“기, 김덕성님!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는 유세라.
그럴 것까지야.
그녀의 사과 아닌 사과를 받아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칠판과 교탁, 책상과 의자가 있던 내가 알던 1학년 A반의 모습은 없었다.
책상과 의자는 어디 갔는지 전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극장에서나 볼 법한 의자가 줄줄이 들어섰다.
“검은 귀축과 하렘 멤버의 애니메이션 극장판이라니! 대체 무슨 내용일까?”
“R18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벌써 부끄러워······.”
관객석에 앉은 엑스트라 방청객들이 수군거린다.
부끄럽다니.
대체 뭘 상상하고 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다, 다다당신! 이제야 온 건가요?!”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에 앉은 메이드복 차림의 백금발 미소녀, 올리비아가 보인다.
프렌치 메이드 차림이었던 아까와는 달리, 노출이 줄어든 빅토리안 메이드 복장.
“정말이지, 항상 늦는다니까요. 흥. 지각쟁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리면서 얼굴을 붉힌다.
그녀 옆에는 마찬가지로 메이드복을 입은 카스미 선배, 마코토, 에리, 린이 있다.
“주인님! 주인님 왔구나! 에리링 주인님 보고싶었어냥!”
쫑긋.
에리의 주황색 트윈테일 위에 있는 고양이귀가 움직인다.
빌어먹을 고양이 말투 아직 포기 안 한 거냐고.
“후배 군, 늦었어.”
“주군, 기다렸어.”
메이드복을 입은 마코토와 카스미 선배가 내게 말한다.
“어서 와라, 덕성. 마침 다들 널 기다리던 참이다.”
기모노 위에 메이드복 에이프런을 입은, 일본풍 메이드 복장의 린이 옅게 웃는다.
왜 다들 메이드복 차림이지?
여기가 지금 코스프레 행사 현장도 아니고.
“헉! 저기 봐. 검은 귀축 하렘 멤버들이야!”
“전부 메이드복을 입고 있어!”
“밤마다 기숙사에 하렘 멤버들을 불러서 시녀복을 입히고 밧줄로 구속한 뒤에 한꺼번에 침대 위에서 전부 상대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꺄아아아아악!”
이제는 인사를 한 것만으로 자지러지는 엑스트라들.
대체 검은 귀축 유니버스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 거지?
이쯤 되면 어이없는 걸 넘어서 웃기다.
내가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김덕성 군. 여기입니다.”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툭툭.
그녀가 본인 옆자리를 두드린다.
그때.
“이봐요 당신! 설마 회장 선배 옆자리에 앉을 생각은 아니겠죠? 당신의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옆자리에 앉으세요! 명령이에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소리친다.
“주인님! 에리냥 옆자리 앉아줄거지냥? 에리냥, 주인님 성분 없으면 죽어버릴지도······.”
“주군! 에리랑 나 가운데 앉아줄 거지?”
에리와 세트로 들이대는 마코토에.
“우리를 뿌리치고 회장 선배한테 가는 후배 군은 나쁜 남자야. 여자의 순정을 짓밟은 후배 군······. 미워. 저주할 거야.”
오랜만에 볼을 부풀리며 내게 나쁜 남자 소리를 하는 카스미 선배.
“덕성! 내 옆에 앉아라. 영화 상영 도중 손을 잡는 건 물론 허, 허벅지도 마음대로 만져도 괜찮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절대 영역이 돋보이는 하얀색 사이 하이 삭스를 신고 왔으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린까지.
개판이 따로 없다.
“하와와와와······. 이건 우리가 낄 판이 아닌 것 같사와요. 유세라 양. 우리는 따로 앉는 것이와요.”
“으, 응······. 그게 좋겠어요.”
내 뒤에 있던 유세라와 에반젤린이 은근슬쩍 빠져서 빈자리에 앉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지던 그때.
“뭐 하고 있습니까? 김덕성군. 당신은 지금 제 수행원이지 않습니까? 학생회장으로서의 명령입니다. 제 옆에 앉으세요.”
아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아리스의 말을 들은 에리가 입을 내밀며 말한다.
“권력 남용 반대야! 사이온지 선배! 우우우······.”
“큿······.”
입술을 깨무는 린.
“으으으으으······. 권력에 져버리다니······. 이럴 수가······.”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분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를 치는 올리비아.
“사이온지 선배······. 권력을 사용하다니, 한 방 먹었어.”
“지이이이이······.”
카스미 선배의 한마디와 어김없이 의성어를 소리 내는 마코토까지.
개판이 따로 없다.
“역시 사이온지 선배! 학생회장의 권력에는 검은 귀축도 꼼짝 못 하는구나?”
“멋있어! 박력! 사이온지 언니! 절 가져요!”
“어쩌면 침대 위에서의 사이온지 선배는 여왕님일지도?”
“검은 귀축도 침대 위에서는 한 마리 어린 양이 되는 거야?”
또 한번 진화하는 검은 귀축 유니버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어쨌거나 누구 옆에 앉냐는 소모적인 논쟁이 아리스 덕분에 정리되기는 했으니 고맙긴 하네.
“알겠습니다. 사이온지 선배.”
“지금의 당신은 제 수행원.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김덕성 군.”
살짝 토라진 무표정의 아리스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 옆에 앉던 그때.
“덕성 오빠! 나 왔어! 니시시시.”
저 멀리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하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덕성쨩이 잔뜩! 여기는 사오리의 천국일지도? 앗! 덕성쨩이다! 오랜만이야!”
옆에 있던 사오리가 안경을 빛내며 하얀 가운을 흔든다.
소매가 쓸데없이 긴 하얀 가운 안에 받쳐 입은 내 캐릭터 티셔츠가 보인다.
정말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옆에는 부끄러운 듯 뒤에 숨은 연두색 머리 미소녀, 사토우 레나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하하하하······. 안녕, 김. 조, 좋은 오후지?”
메이드복을 입은, 여장이 수상할 정도로 잘 어울려서 누가 보면 진짜 미소녀로 착각할 만한 검은 머리 미소년.
쿠로사와 유지가 있었다.
놈은 부끄러운지 역겹게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눈에 봐도 여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여장 메이드 금발 태닝 양아치, 이시하라 다이키가 있었다.
“하, 하하하하. 안녕하심까. 형님! 날씨가 참 좋지 않슴까!”
본인도 어색한지 암막 커튼 때문에 바깥 풍경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쓸데없이 날씨 이야기를 하는 이시하라.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눈이 아프다.
반면에 쿠로사와 유지는 여장이 쓸데없이 잘 어울린다.
하긴, 2010년대 초반 그 시절 라노벨 주인공은 히로인보다 여장이 더 잘 어울리는 게 국룰이기는 했지.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도 좋은 작화로 몇 번 등장한 장면이었는데, 오토코노코라는 말이 유행했던 2010년대 초반이라서 국내에서 통할 수 있었던 유머지 BL드리프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금은 농담으로라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다.
아무튼 나는 여장이 싫다.
“뭐죠? 당신. 왜 쿠사나기의 마스터를 음흉한 시선으로, 역시 당신은······.”
그러니까 쿠사나기가 저렇게 쓸데없이 발작할 때마다 원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저 빌어먹을 칼을 뽀개고 싶다는 말이다.
“너는 좀 닥쳐라. 씨발. 자꾸 누굴 게이로 몰아?”
“뭐라고요?!”
내 말에 쿠사나기가 반발하며 뭐라 말하려던 그때.
“쿠사나기. 덕성 오빠가 닥치라잖아. 혹시 말 못 알아먹어? 혹시 쿠사나기는 청각에 초 문제 있는 타입?”
하루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쿠사나기에게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