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45)
아리스는 달렸다.
전투 모드도 해제한 채로 정처 없이 달렸다.
아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내 때문이데이.’
그녀의 머릿속에 방금 있던 일이 떠오른다.
괴인으로 변한 신지가 자신을 공격했을 때.
아리스는 미처 반격하지 못했다.
전교생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는 충격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아리스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학원 최강인 건데······.’
학원 최강.
완벽 초인 학생회장.
그렇게 불리던 아리스였다.
하지만 학원 최강의 무력도 정신적 트라우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자랑하던 라이트닝의 기프트도, 초상병기도.
바다와 같은 마력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사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손가락질받으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했을지도 모른다.
‘폐를 끼쳐버렸데이······.’
하지만 김덕성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고 신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대가로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상처를 입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어서.
비겁하게 도망쳤다.
[회장 선배, 지금까지 전부 속인 거예요?] [실망이야.] [촌년 주제에] [모두를 속이다니, 최악, 최저야.]귓가에 그녀를 비난하는 환청이 울린다.
아리스가 입술을 깨문다.
‘내 따위는······.’
민폐를 끼쳐버린 나 같은 건.
모두를 속인 나 같은 건.
이대로 사라지는 게 낫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뛰었다.
“회장 선배?”
“회장님?”
아리스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말을 걸었지만, 아리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아······.”
본관 건물 옥상.
문화제가 열리는 학원이 내려다 보이는 장소.
난간에는 안전 펜스가 설치되어 있고, 환풍기와 낡은 책걸상이 버려진 옥상 풍경이 아리스의 시야에 들어온다.
“아아아······.”
아리스가 좀비처럼 걷는다.
옥상.
아무도 없는 곳.
1학년 시절, 학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때 유일하게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준 공간.
그녀의 손이 안전 펜스를 붙잡는다.
문화제가 한창인 교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는······.”
우짜면 좋노.
사투리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면서 아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
아프다.
팔에 난 상처가 아직 욱신거린다.
피가 흐른다.
[파트너, 그런데 사이온지 양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가는 거야?]‘당연히.’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갈 만한 장소는 한 군데밖에 없다.
폐허가 된 구교사를 떠난 그때.
“당신!”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백금발이 인상적인 푸른 눈의 미소녀.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 이게 지금 대체 뭔가요?! 피, 피가······.”
올리비아의 얼굴이 하얗게 굳는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왼팔을 만진다.
올리비아의 손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다.
“별거 아니야, 그것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
사라진 아리스를 찾아야 한다.
내가 올리비아의 츤데레 대사를 각오했던 그때.
“······당신, 지금 급한 일이 있는 거죠?”
올리비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평소처럼 볼을 부풀리지도, 말을 더듬지도, 츤츤거리지도 않는 진지한 표정.
그녀가 나를 보며 말한다.
“그래도 이렇게 다친 채로 다니면 안 돼요. 정말이지······. 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전속 시녀인 이 저를 걱정하게 만들다니······.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올리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욱하고 긴 빅토리아 메이드복 치마를 찢어낸다.
치마를 찢어낸 천을 내 팔뚝에 묶는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응급 처치는 하고 다니셔야죠. 정말, 당신은 전속 시녀인 이 제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군요! 저한테 감사하세요! 아시겠나요?”
올리비아가 애써 웃으면서 팔뚝을 붕대처럼 묶어서 리본을 만든다.
“자, 다 됐어요.”
올리비아가 웃는다.
“올리비아, 그······.”
“쉿.”
올리비아가 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댄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요. 다녀오세요. 바쁜 일이 있는 거잖아요? 나중에 설명 들어도 괜찮으니까······.”
올리비아가 옅게 웃는다.
“빨리 다녀오라고요! 아시겠나요?”
“······그래. 고맙다.”
올리비아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뒤에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구교사를 벗어난다.
“꺄악! 검은 귀축이야!”
“저거 뭐야? 혹시 피야?”
“방금 커다란 소리 대체 뭐야?”
“회장 선배, 굉장히 슬픈 얼굴로 걷고 있었는데. 혹시 검은 귀축한테 차인 거야?”
교정을 달리고 있는 내 귓가에 엑스트라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언제나처럼 쓸모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쓸만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아리스가 여기로 향했단 말이지.
내 시야에 본관 건물이 보인다.
추측이 맞았다.
아리스는 옥상에 있을 것이다.
방금 소동 때문인지 어수선한 본관 건물 계단을 오른다.
뚝, 뚝.
팔뚝에서 천을 붉게 물들인 피가 흘러내린다.
탁.
옥상 문을 연다.
휘이이잉.
불어오는 바람. 돌아가는 환풍기 팬.
푸른 하늘이 인상적인 옥상 펜스 근처에 그녀가 있었다.
사이온지 아리스.
은발을 휘날리는 그녀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은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친다.
“기, 김덕성군······.”
미연시 CG에서 흔히 보던 옥상 펜스에 기댄 미소녀가 현실화된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탁.
옥상 문을 닫는다.
“······.”
아리스가 말을 더듬는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입술을 깨문다.
솔직히 말해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시골 출신이라는 점이 대체 왜 콤플렉스인지.
대체 왜 그런 시답잖은 것으로 사람을 따돌렸는지.
그렇다고 내게 인간의 악의를 얕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돌림, 일본어로 이지메라고 불리는 이 행위의 발단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휴먼시아 같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를 놀리는 별명으로 ‘휴거’ 같은 신종 멸칭이 탄생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픽션과는 다르게 현실의 비극에는 대단한 계기도 극적인 스토리도 개연성도 없다.
조금의 차이로 시작된 따돌림이 점차 발전해서 지속적인 집단 괴롭힘의 형태로 변했다.
아리스는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것이다.
어떤 비극은 평범해서 더 불행하다.
상냥한 라노벨 세상, 픽션적으로 과장된 캐릭터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쾌할 정도로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불행한 과거가 아리스에게는 있었다.
“······오, 오지 마세요!”
아리스가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떨군다.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청춘물 라이트 노벨이 떠오른다.
주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사춘기 청소년인 주인공이 히로인들이랑 같이 꿈과 청춘을 고민하면서 하렘을 차리던 내용들.
그 당시에는 그런 내용을 굉장히 몰입해서 봤었고, 인생 역작이니 최고 명작이니 하고 찬양하던 시절도 있었다.
부끄럽게도 청춘물 주인공과 나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들을 우상화해서 롤 모델로 삼기도 했었다.
하지만 10년 후,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본 청춘물은 달랐다.
이십대 후반의 나는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고등학교 시절에 품었던 고민, 청춘이니 꿈이니 이상이니 하는 것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청춘물 역시 오글거린다, 별것도 아닌 고민을 가지고 왜 저렇게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중대사항처럼 진지하게 끙끙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아예 판타지인 이세계물이 낫지.
그래, 그랬었다.
“저, 저는······. 저는······. 당신을 상처 입히고······. 모두한테 거짓말하고······.”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난리야.
오글거리네.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빙의 전 내가 지금 상황을 소설로 봤다면 아리스의 고민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건 픽션이 아닌 현실.
그리고 아리스 역시 청춘물 히로인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학생회장, 학원 최강 사이온지 아리스는.
“······모두를 속였습니다. 저는······. 저는······. 학생회장의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강한 척하지만 속은 여린, 그리고 별것도 아닌 걸로 진지하게 청춘과 꿈에 대해 고민하는 방황하는 10대 청소년이다.
나와 같은 어른이 아닌, 그 나이대의 고민과 그 나이대의 사고방식을 지닌.
아직은 어린 학생.
그뿐이다.
털썩.
아리스가 주저앉는다.
내 상처가 욱신거린다.
올리비아가 묶어준 천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
“선배.”
“······.”
아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 나이대 소녀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아리스에게 손을 내민다.
“잡으시죠.”
아리스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한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그, 그 손을 잡을 자격이······.”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여기서 말로 실랑이를 벌이는 건 곤란하다.
청춘물에서 흔히 나오는 전개처럼 10대 감성을 자극하는 오글거리는 대사로 구원할 자신도 없고.
그러니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히, 히익?!”
아리스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다.
그녀를 힘으로 일으킨 뒤에 곧바로 끌어안는다.
“기, 김덕성군······. 이, 이건······.”
아리스가 말을 더듬는다.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느껴진다.
“괜찮습니다. 선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지금의 선배를 학생회장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선배를 탓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선배가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설령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책임지고 앞장서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스가 움찔한다.
“저를 믿으십시오.”
“하,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상냥하다.
현실이 아니라 라노벨 세상이니만큼 더더욱.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본인 대신 저를 믿으십시오.”
내 말을 들은 아리스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제가 당신을 책임지겠습니다. 전부. 그 어떤 비난의 화살도 감수하겠습니다.”
그녀의 멘탈이 무너진 건 나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책임져야만 한다.
카스미 선배가 나를 감싸다 상처받은 것처럼, 에리가 원작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올리비아가 약혼 문제로 일찍 귀국했을 때처럼, 에반젤린이 나 대신 적을 막다 다쳤을 때처럼.
전부 내 책임이다.
아리스의 얼굴이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든다.
그녀가 내 허리를 양팔로 감싸면서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저, 정말입니까? 정말 당신을 상처입혀버린 저 같은 사람이라도······. 당신이 도리어 책임을 떠맡겠다는 것입니까? 다, 당신이 제 방패가 되겠다는······. 겁니까?”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간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느껴진다.
“네. 그렇게 할 겁니다.”
“흑, 흐윽······. 흐아아아앙······.”
내 말을 들은 아리스가 대답 대신 눈물을 터뜨렸다.
학원 최강, 학생회장 아리스가 아닌, 그 나이대 소녀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