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66)
로 생각하는거야
[파트너, 일어나.]머리가 아프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파트너, 일어나라고. 오늘 수학여행 출발하는 날이잖아.]흑태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들린다.
번쩍.
눈이 떠진다.
오늘 수학여행 출발일이었지.
짝짝.
양손으로 뺨을 두드리며 잠을 쫓아낸다.
“일어나셨습니까? 김덕성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이른 아침인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회색 단발이 인상적인 정장 미녀.
한서진이 보인다.
“캐리어는 여기 있습니다.”
한서진이 숙소 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보여준다.
“짐은 꼼꼼히 챙겼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여기 화물 리스트입니다.”
스윽.
한서진이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니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잠도 완전히 쫓아낼 겸, 한서진이 내민 화물 리스트를 확인한다.
정말 꼼꼼하게 챙겼다.
확실히 다른 건 몰라도 한서진이 일은 제일 잘 하는 것 같다.
국뽕이 문제지만.
“그럼 수학여행 잘 다녀오시길.”
“그래. 고마워.”
한서진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를 나선다.
집합 장소는 강당.
인원 확인이 끝나면 버스를 타고 학원을 출발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먼저 강당으로 가야 하는데.
“후배 군!”
저 멀리서 낯익은 호칭이 들린다.
“후배 군······!”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미소녀.
카스미 선배였다.
내게 다가온 카스미 선배가 숨을 고르면서 머리를 넘기며 웃는다.
“후배 군, 오늘 수학여행 출발일이지?”
싱긋 웃는 카스미 선배.
“아, 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후배 군처럼 1학년이었으면 좋을 텐데, 후배 군이랑 같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해서 슬퍼.”
카스미 선배가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수학여행은 전 학년이 참여했던 행사인 여름 학교나 문화제와는 달리 1학년만 참여하는 행사.
2학년인 카스미 선배나 3학년인 아리스는 동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기 온 거겠지.
쭈뼛쭈뼛,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카스미 선배를 보니 조금 안쓰럽다.
안쓰럽다고?
내가 요즘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에 많이 유해진 모양이다.
“······후배 군. 내가 준 부적 혹시 아직 갖고 있어?”
귓가에 카스미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부적?
부적이라면 교토에 갔을 때 세이메이 신사에서 샀다고 줬던 그거 말인가?
그 부적이라면.
“여기요.”
배낭을 뒤적거려 카스미 선배가 교토에서 선물해줬던 선물해줬던 액막이 부적을 꺼낸다.
“후배 군······.”
카스미 선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덥석.
그녀가 내 양 손을 붙잡는다.
“후배 군, 내가 선물해준 부적. 소중히 간직해준 거구나······!”
카스미 선배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니 갑자기 왜 이래?
조금 당황스럽다.
“선배. 그 뭐냐. 울지 마시고.”
“으, 응. 미안해. 나쁜 남자인 후배 군은 분명 존재감 없는 나 따위가 선물해준 부적 같은 건 옛날에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간직해준 게 너무 기뻐서······.”
카스미 선배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한다.
부적을 옛날에 버렸을 거라니.
‘대체 선배는 날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사이다패스에 소인배기는 하지만, 선물 받은 물건을 버리거나 팔아치우는 인간 쓰레기는 아니다.
[호시노 양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파트너는 아무리 봐도 나쁜 남자에 츤데레거든.]머릿속에서 흑태자가 헛소리한다.
츤데레, 아니 나쁜 남자는 또 뭐야.
이게 무슨 한국 드라마야?
어이가 없네.
“선배, 좀 진정하십쇼.”
“흑, 흑······.”
내 말에도 계속 눈물을 흘리는 카스미 선배.
[파트너. 이럴 때는 머리라도 쓰다듬어줘야 진정한 신사인 거야.]흑태자가 말한다.
계속 이렇게 울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면 곤란하기라도 하고.
일단 흑태자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스윽.
카스미 선배의 머리에 손을 올린다.
“아······.”
카스미 선배가 움찔한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만 좀 우십쇼. 선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카스미 선배에게 무관심했던 것 같기는 하다.
카스미 선배가 저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내 책임인 것이다.
“응. 나 그만 울게. 나는 선배니까. 후배 군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니까······.”
카스미 선배가 눈물을 닦아내며 웃는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진다.
이럴 때는 화제를 돌려야 한다.
“부적 여기 있습니다.”
카스미 선배에게 부적을 건넨다.
“고마워.”
카스미 선배가 웃는다.
그녀가 부적을 받아들고는 주문을 읊는다.
우우웅!부적 위로 보랏빛 마법진이 떠오른다.
“매지컬☆카스밍☆파워! 얍! 뾰로롱!”
스으으윽.
마법진이 흩어지며 마력이 부적에 스며든다.
아니 주문이 왜 저래.
원작에서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마법소녀가 돼서 저런가.
듣고 있으니 좀 그렇다.
“자, 여기.”
카스미 선배가 내게 다시 부적을 건넨다.
“부적에 방어마술을 걸었어. 그렇게 강한 마술은 아니지만······. 후배 군. 학원 밖으로 나가면 이상하게 항상 사고가 터지고는 하니까······.”
카스미 선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하긴 뭐.
아카데미물 웹소설이나 학원 배틀물 라이트 노벨에서는 무슨 행사를 할 때마다 사고가 터지지만, 원래는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2학년인 카스미 선배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감사합니다. 선배.”
카스미 선배가 준 부적을 품 안에 넣는다.
라노벨 클리셰대로라면 이런 부적이 꼭 주인공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적의 치명타를 대신 맞아서 간신히 살아남던데.
설마 이번에도 그러겠어?
“응. 소녀의 순정을 짓밟는 나쁜 남자지만 소녀의 선물을 소중히 간직한 상냥한 후배 군. 수학여행 잘 갔다와!”
그렇게 카스미 선배의 배웅을 받으며 기숙사를 나선 내가 만난 사람은.
“김덕성군이군요.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학생회장 완장을 찬 은발의 미녀.
사이온지 아리스였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대체 제가 아침부터 여기서 김덕성군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아리스가 양팔을 허리에 얹으며 말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리스 선배.”
움찔.
아리스 선배라는 인사를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녀가 팔짱을 끼면서 말한다.
“······오늘 수학여행을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모르는 척 화제를 돌린다.
“저는 3학년이자 슈오우를 대표하는 학생회장. 1학년 만의 행사인 수학여행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아리스가 말끝을 흐린다.
카스미 선배와 마찬가지로 3학년인 아리스 역시 수학여행에 참가할 수 없다.
그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그래도 수학여행은 특별한 경험. 클래스메이트들과 수학여행을 잘 즐기다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은빛 시선이 내게 향한다.
덥석.
아리스가 내 손을 잡는다.
“그래도 파렴치한 행위는 안 됩니다! 불순 이성 교제도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녀가 소리친다.
아마도 이게 아리스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터.
그녀가 큰목소리로 말한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뭐야? 회장 선배. 검은 귀축 보러 직접 찾아온 거야?”
“좋아하는 남자 벌써 바깥 단속 들어간 거야? 역시 회장 선배. 연애에서도 철두철미해!”
“수학여행에서 불순 이성 교제를 하지 말라니, 검은 귀축한테는 무리한 요구 아닐까?”
“벌써 하렘 멤버들이 검은 귀축 숙소 침투 계획 짜던데?”
“매일 밤마다 광란의 붕가붕가 파티를 즐길 계획이래!”
수군수군.
아침부터 활기찬 엑스트라들의 대화가 들린다.
머리가 아프다.
대체 수학여행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대답하세요!”
아리스가 내게 말한다.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대답은 해야 한다.
“예. 그러겠습니다.”
아리스가 입술을 깨문다.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약속입니다.”
새끼손가락 약속까지 해야하냐고.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건다.
“읏······.”
서로 손가락이 닿자 아리스의 얼굴이 빨개진다.
꾸욱.
그녀와 엄지를 맞댄다.
손가락 약속이 끝난다.
“좋습니다. 저는 김덕성군이 약속을 어기는 파렴치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리스가 그제야 안도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리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그러면 수학여행 잘 다녀오시길.”
아리스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나는 캐리어를 끌고 강당으로 향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학여행을 출발할 시간이다.
*
강당에 모인 생도들은 다시 조 단위로 헤쳐 모여 버스에 탑승했다.
그렇게 슈오우 영웅 학원과 도쿄를 떠난 우리는 긴 버스 타임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벳푸 시.
오이타현에 속한 지방 도시.
일본에서 온천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
원래 일본 서브컬쳐 수학여행 선호 장소 1위는 교토, 2위는 오키나와, 3위는 홋카이도지만 세 장소 모두 교류전, 여름 학교, 임간학교에서 나온 관계로 작가 놈이 부득이하게 목적지로 설정한 장소기도 하다.
이름만 수학여행이지 사실상 온천여행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온천여행도 일본 서브컬쳐의 유구한 클리셰이니만큼, 수학여행을 다루는 원작 9권 내용은 온천여행에서 나오는 모든 클리셰가 뒤범벅된 스토리였다.
남녀 입욕 시간을 누군가 바꿔놨는데 모르고 들어갔다가 히로인과 마주친다던가, 히로인 온천욕을 엿보려고 주인공과 이시하라가 낑낑대다가 들킨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수학여행 에피소드는 꽤 인기가 많았다.
온천 서비스신 덕분이다.
TVA에서는 심의기준 때문에 온천에서도 지나치게 자욱한 안개로 히로인들의 몸을 가려놨지만, BD에서는 안개 작화를 수정해서 안개가 옅어지고 히로인들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서 더 인기가 많았었다.
“지금부터는 조별 자유 여행이에요! 다들 벳푸 시내를 자유롭게 관광한 뒤에 오후 6시에 숙소에 도착하세요! 혹시 늦으면 선생님한테 꼭 연락하고요! 아시겠나요?”
귓가에 마유즈미 선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 수학여행 숙소는 당연히 온천이 딸린 일본 전통 고급 여관인 료칸.
료칸이라.
일본에 와서 온천도 료칸도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묘하게 설렌다.
리그가 언제 쳐들어올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거고 여행은 여행이니 최대한 즐기는 편이 좋겠지.
“자 그럼 수학여행 스타트예요!”
마유즈미 선생이 웃으며 말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의 분홍색 트윈테일이 불쑥 솟아오른다.
“시노자키 공! 김덕성님! 우리 어디부터 가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눈동자를 반짝인다.
“흥. 인간들의 수학여행 따위······.”
옆에서는 베아트리체가 투덜거린다.
“어머, 트릭시 양. 어제 너무 설레서 제대로 잠도 못 자지 않으셨나요?”
그 모습을 본 에반젤린이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면서 웃는다.
“누, 누가 그랬다고 그러더냐! 여는 원래 잠을 자지 않는다! 잠은 하등한 인간들이나 자는 것. 홍련의 성녀인 여는 이미 잠이 필요없는 한층 진보된 신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니라!”
손발을 바둥거리며 변명하는 베아트리체.
결국 제대로 잠 못 잤다는 이야기잖아.
무슨 애도 아니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수학여행지에 와서도 이런 촌극을 봐야 한다니.
내 어이가 하늘로 날아가던 그때.
“내가 계획을 짜오기는 했다만······.”
부스럭.
린이 품에서 무언가 꺼낸다.
그건 굉장한 두께의 서류 뭉치였다.
“그, 그게 무엇인 건가요?! 시노자키 공?!”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도 궁금하다.
린 얘는 수학여행 오는데 대체 뭘 만들어 온 거야?
“시노자키 가문의 비전이 들어 있는 시노자키류 비전 벳푸 여행 가이드다!”
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흔들면서 말한다.
“우와아아아아! 시노자키 공! 완전 대단한 것이와요!”
“후후.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다. 지금부터 이 여행은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 다들 따라오도록.”
에반젤린의 칭찬에 시노자키류 비전 벳푸 여행 가이드를 흔들면서 우쭐대는 린.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흔들린다.
이거 시작부터 불길한데.
이 수학여행, 괜찮은 걸까?